디디에 에리봉, 온라인 카지노 게임로 되돌아가다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이하 『랭스』)를 읽었다. 읽게 된 계기는 순전한 우연온라인 카지노 게임. '책태기'로 몇 주간 책을 손에 들지 못했다가, 3년 넘게 서가에 박아둔 책을 꺼냈다가 끝까지 읽게 되었으니 말이다. 절판을 걱정하여 사두었으나, 몇 번이고 읽으려다 그만두길 반복했었다. 책을 사는 날과 책이 다가오는 날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언젠가 이렇게 만나서 우리는 끝까지 간다. 책을 쌓아두는 '적독가'의 변명은 이럴 때만큼은 타당하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만남의 날을 기대하며 적독가는 책을 쌓아두는 것이다. 절판이라는 끔찍한 이별을 피하기 위하여.
『랭스』는 저자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고향인 랭스로 되돌아가는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회고록이다. 그는 젊은 나이에 고향인 랭스를 떠나 파리에 안착했다. 그리고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랭스는 그에게 잊힌 도시였다. 랭스는 그에게 억압과 모욕의 공간이었다. 그의 성적 정체성은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했고, 지식에 대한 열망(혹은 계급 상승의 열망)은 노동자 계급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졌다. 그에게 노동자 계급 그 자체를 상징했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살기 위해서 그곳을 떠나야 했다.
철저하게 잊고 있던 과거는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불현듯 그의 삶으로 엄습해 들어온다. 뿌리 깊은 증오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 자신과의 화해, 내가 거부하고 내쫓고 부인했던 나 자신의 어떤 부분과의 화해의 시작이었다."(13)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와 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옛날 사진들을 보게 된다. 거기엔 노동자 계층의 비참함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낡은 사진들 속에서 다시 솟아나는 사적인 것과 내밀한 것의 영역은 우리를 우리의 출신 배경인 온라인 카지노 게임세계의 칸막이 속에, 특정 계급에 속한 것으로 여겨지는 장소들 속에, 그리고 어떤 지형도 속에 다시 기입한다."(22)
사진은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켰다. "[성적인] 지배 메커니즘에 관해서는 그렇게나 많은 글을 써댔던 내가, 사회적 지배에 관해서는 왜 쓰지 않았을까?"(23)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출신 계급에 대해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고백하면서 불편함을 느꼈으면서도 정작 이를 진지하게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과 연결시켰던 적은 없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성적 수치에 대해서는 언급했지만, 정작 그러한 성적 수치심이 어쩌면 노동계급의 '아비투스'와 연결되어 있음을 고민하진 않았던 것이다. 이제 그에게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해진다.
"그러니 서로 뒤얽힌 두 여정이 있는 셈이다. 자기 자신을 재발명하는 상호의존적인 두 가지 궤적. 하나는 성적 질서와 마주한 궤적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적 질서와 마주한 궤적이다."(30)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혐오하는 노동자 계급의 호모포비아적 문화, 그로 인해 느껴야 했던 수치는 그가 이 공간, 이 계급을 벗어나고자 하는 강력한 욕망의 동력이었을 것이다. 그는 계급탈주자transfuges de classe(샹탈 자케의 '계급횡단자transclasses')로서의 사회적 여정에 반강제적으로 올라탔다. (애초에 탈주/횡단은 반강제적이다) 그는 자신의 여정을 추동하는 사회적 힘들이 자기 삶의 여정에 남긴 흔적들을 되짚어본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닌, '온라인 카지노 게임적 자기 성찰'인 것이다.
그는 흔히 택하는 정신분석학 대신 온라인 카지노 게임을 자기 분석의 도구로 삼는다. 그가 보기에 정신분석학은 주체를 형성하는 다양한 사회적 힘들을 탈사회화, 탈정치화할 뿐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주의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선전가들에 의해 지겹도록 되풀이되며 어름어름 말해지는 개념들로만 이에 대해 살필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보다는 내가 사회적인 거울 단계라고 일컫는 것이 더 중요하다."(108) 그래서 그는 한 개인 내면의 심리를 넘어서서 그러한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회적 힘들을 분석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아버지는 "아주 정확하게 위치 지어진 이 세계-내-존재"(37)였다. 그의 무능력과 괴팍한 성격은 그가 속한 계급의 아비투스가 끼친 영향의 결과물에 가까웠다. 그는 전간기 12남매의 장남온라인 카지노 게임 태어나 끔찍한 전쟁과 가난을 겪어야 했다. 살기 위해 빠르게 공장 노동에 뛰어들어야만 했던 그에게 중요한 것은 빠른 결혼, 가장온라인 카지노 게임서의 책임감, 거주할 집 구하기 등등이었다. 초등교육만 마치고 비숙련노동자로서 삶을 살아온 아버지에게 교육, 교양 같은 것은 '시간 낭비'에 가까웠다. '가부장'은 그에게 뗄 수 없는 자부심과도 같았다. (물론 그는 가족 중등교육에 접근한 첫 번째 인물이었고, 그것이 곧 단절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공장은 앞으로 태어나 그의 가족이 될 이들, 그와 같은 사회적 정체성을 갖게 될 이들을 기다려왔고 계속해서 기다릴 것이었다. 사회적인 결정논리는 아버지가 태어났을 때부터 그를 지배했다. 그는 우리가 '재생산'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온갖 법칙과 메커니즘이 그를 규정해 놓은 것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했다."(54) 아버지에게 학업은 계급 재생산에 방해가 되는 위험하고 불순한 시도였다. 학업으로부터의 탈락이 권력으로부터의 자발적 '배제'가 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겐 이것은 어떤 박탈감을 불러일으키기보다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가업을 잇고, 가풍을 잇는 일. 그러나 디디에 에리봉에게 그것은 끝없는 자기 모욕을 감내하라는 끔찍한 요구였다.
어머니는 사생아였다. '방탕한' 외할머니에게 어린 시절 버려져 다른 집에 맡겨진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선구제원에 수용된다. 똑똑했지만, 고등교육에 대한 열정을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일찌감치 살기 위해 가정부의 삶을 시작해야 했다. 빠른 결혼을 피할 수 있는 선택지는 없었다. 스물 하나, 스물 정도의 나이에 결혼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끝없는 부부싸움에 돌입한다. "상대에 대한 증오가 생활양식이 되는 경지에 올라섰다고 해야 할까."(90) 가부장인 아버지만큼이나 어머니도 폭력적이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헌신적인 노동 덕에 디디에 에리봉은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공부를 무용하다고 여김온라인 카지노 게임써, 어머니는 자신의 좌절감을 분노로 표현함온라인 카지노 게임써 언제든 학업을 중단시킬 만큼 강력한 감정들을 그에게 끊임없이 쏟아냈다.)
"어머니가 새벽 4시에 일어나기 위해 밤에 잠들어 있는 동안, 나는 동틀 녘까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보부아르와 주네를 읽었다."(95) 하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이러한 저작들에 접근할 수 있게 만든 부모님의 구체적인 노동 조건에 대해선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원망했다. 구체적인 노동계급이라기보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혁명의 동력으로서 이상화된 노동계급에 대한 관심이 어린 시절의 그를 사로잡았다. "하지만 어떤 정치적 서사가 그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 실제로 누구인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서사가 화제로 삼고 해석하는 개인들의 삶을 구축된 허구로부터 빠져나간다는 이유로 비난하기에 이른다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98)
그에게 있어서 아버지(그리고 노동계급)의 교육과 동성애에 대한 혐오, 어머니의 '어지러운' 가족 형태는 수치심의 근원이었다. (그가 무규범을 전복이라 규정하며 옹호하는 이들이 "정당성과 '정상성'의 공간온라인 카지노 게임 들어가고자 하는 심층적인 열망"(79)에 대해 무지하다고 비판하는 이유다) 하지만 이런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뿌리와 완전한 단절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본의 아니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이 계보 안에 들어 있다는 자명한 사실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을 때, 과거의 이 끔찍한 일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87)
우연한 마주침은, 탈주/횡단을 가능하게 만든다."예술에 대한 취향은 학습되는 것이다. 나는 배워서 얻었다. 그것은 내가 다른 세계, 다른 온라인 카지노 게임 계급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그리고 내 출신 계급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수행해야 했던, 나 자신에 대한 거의 완전한 재교육의 일부였다."(120) 가족 중 중등교육에 접근한 첫 번째 인물이었던 디디에 에리봉은 학업에 매진했다. 그에게 이것은 단절의 출발점이었다. 그는 형과 동생처럼 학업을 그만두고 평범한 노동계급의 일원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계급으로부터 거부당했고그로 인해 계급 횡단의 동력을 얻었다.
물론 그는 이것을 개인의 '노력'으로 환원시키기보다, 자기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형제들의 자리를 생산해 내는 "부르주아지가, 지배 계급이, 보이지 않는 ― 또는 너무 잘 보이는 ― 적이 가장 일상적인 온라인 카지노 게임적 메커니즘의 가장 평범한 작동 속에서 수행하는 전쟁"(136)의 국면으로 설명한다. 특히나 명시적으로 노동계급을 배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그 결과를 달성해 내는 교육 체계가 어떻게 형제들의 서로 다른 자리를 만들어냈는지 설명해 낸다.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 끔찍한 날것의 통계 무더기가 있지만 나를 압도시키는 데는 하나의 단순한 가능성이면 충분하다. 내가 내 형제의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다."(134)
"나는 우수한 학생이었지만, 늘 학업을 완전히 포기하기 직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179) 그는 불손한 태도로 학교를 다녔다. 언제나 탈락할 위기에 놓여 있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출신의 가난한 학생으로서, 그의 불량한 태도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 방어를 위한 가면처럼 쓰였다. 그런데 어떻게 '탈락'이 예비된 이 시스템을 통해서 그는 교수라는 지금의 상태에 이를 수 있었던 걸까? 그와 비슷한 삶의 경로를 살았던 부르디외도『온라인 카지노 게임 분석에 대한 초고』에서 비슷한 분석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이 책만으로 이해하긴 어렵다는 게 디디에 에리봉의 입장이다.
그는 부르디외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 지점, 즉 '남성성'온라인 카지노 게임부터 튕겨져 나오는 순간에 주목한다. 그는 노동자 계급의 가치가 부과한 모델에 부응하려 시도했지만 금방 튕겨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성성을 긍정할 수 없는 그의 성적 취향은, 가족온라인 카지노 게임부터의 탈출구를 교육에서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비록 교육 체계가 그가 속한 노동자계급의 자녀들에게 가혹할 정도로 탈락을 예비함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탈출구로부터 버려지지 않도록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공부가 아니면, 가족을, 계급을, 동성애자로서 자신을 질식시키는 모든 것온라인 카지노 게임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부르디외와 그가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달리 말해, 나는 민중적이고 남성적인 가치에 맞서서 문화를 선택했던 것이다. 문화가 '구별 짓기'의 벡터, 즉 자신과 타자의 차별화, 타자에 대한 거리 두기와 제도화된 격차의 벡터이기에, 문화에 대한 애착은 젊은 게이, 특히 민중 온라인 카지노 게임 출신의 젊은 게이에게 매우 중요한 주체화 양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그 양식은 그의 '차이'에 버팀목과 의미를 제공할 수 있게 해 주고, 그에 따라 하나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해 주며, 그의 출신 환경에서 나온 것과는 다른 에토스를 주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187)
이런 절박함이 오랫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건 '우정' 덕분이었다. 정확히는 그 당시 '우정'이라는 이름온라인 카지노 게임만 설명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친구가 음악 수업 시간에 한 연주곡을 듣고서 제목을 정확히 맞추는 순간, 그동안 그런 종류의 음악을 조롱하는 문화 속에서 살던 그에게 당혹스러운 감정들이 일어난다. 영화와 소설 등 인문학과 교양에 익숙하고, 멋진 성적 매력을 지닌 부르주아 집안의 자제였던 그는 어느새 저자가 동경하는 대상이 된다. 그는 그를 따라 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무지가 부끄러워 배우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만 지속된 관계였지만, 이것이 디디에 에리봉의 인생을 뒤흔들었다.
새로운 것에 대한 욕망은 곧장 지성, 급진성, 아방가르드에 대한 열정온라인 카지노 게임 확산되었다. 하지만 부르디외가 '구조의 평행이동'이라 불렀던 것처럼 자신이 뒤늦게 눈 뜬 모든 것은 이미 부르주아 계급의 자녀들에겐 지나간 것들, 익숙한 것들이었다. 격차는 여전히 유지된다. 사람들은 이 만남의 순간 이후로 디디에 에리봉에게 어떤 상승의 순간만을 기대하지만, 정작 그는 긴 공부의 시간을 언제든 탈락할 가능성에 놓인 아슬아슬한 순간들로 기대한다. 노동 계급의 자녀들 중에 비싸고 뒤쳐진 채 시작하는 교육 과정을 견뎌낼 내구성이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를 앞으로 이끄는 '사랑'은 그가 랭스를 떠나게 하는 동력이었다. 반쯤은 강제적이었다. "랭스는 내게 모욕의 도시이기도 했다. 그것은 내 선택을 이끈 또 다른 결정적인 이유였다. 나는 얼마나 자주 '호모새끼'라든가 그 비슷한 단어들로 불려야 했던가?"(225) 그는 자신을 질식시키는 도시에 맞서 온라인 카지노 게임 나름의 '출구'를 찾도록 강제당했다. '지식인'으로서의 나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창조 역시 그러한 출구 찾기의 한 방편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들린 삶(vies hantées)"이 되도록 만든다. 매일 반복되는 권력 작용을 체감하면서.
심지어 대학교에 들어가기 전 그가 익숙했던 저자들, 철학적 사유들조차 "내 온라인 카지노 게임적 위치에 의해 추동된 결과였다. 내가 파리의 대학생들이었더라면, 혹은 이론과 사유의 새로운 노선들이 정교화되는 ― 또 높이 평가받는 ― 중심 가까이에 있었더라면, 내 선택은 사르트르가 아닌 알튀세르, 푸코 또는 데리다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르트르를 경멸적으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된 파리 지식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규칙대로 말이다."(211) 실제로 내가 어떤 이론과 입장에 친숙한 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나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경제적 배경과 그로 인한 접근성의 차이다.
파리의 대학생이 된 디디에 에리봉은 문화의 선두에 서 있었던 파리에서 그동안 충족시키지 못했던 지적인 호기심들을 만족시킬 기회를 얻는다.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적으로 이해해 주는 곳으로, 자신의 욕망을 성취시켜 주는 곳으로 그는 떠난다. 물론 결과가 장밋빛이진 않다. 그는 끝내 고등학교 교사 자격을 얻는 데 실패했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위한 생활비를 버느라 정작 박사학위 논문도 쓰지 못했다.
그의 책은 끝내 자신의 작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머니와의 대화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무슨 교수가 된 거냐? 철학? / 온라인 카지노 게임 쪽이에요. / 그건 또 뭐니? 사회에 대한 거야?"(279) 그는 랭스로 되돌아가는 데 성공한 것인가? 아버지라는 존재를 이해하는 데 성공하고, (늦었지만) 화해에 성공한 것일까? 아니면 애초에 이 여정은 끝내 불가능한 것일까.
책을 읽으며 나는 거대한 거울을 마주 보고 있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많은 문장들이 그와 나 사이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마치 나를 설명온라인 카지노 게임 것과 같은 기분에 종종 시달렸다. 내가 어째서 끊임없이 '탈주'를 시도하였는지 설명할 수 있는 말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가 아니 에르노, 장 주네와 같은 작가들을 "지적 반려"(307)로 삼았던 것처럼, 내가 그를 일종의 지적 반려 역할을 온라인 카지노 게임 작가로 삼을 수 있을까? 그의 삶에 나의 삶을 겹치려는 시도는 정당한가? 단지 그의 문장들 속에서 내가 읽고 싶은 문장들만 발췌하여 내 삶의 궤적에 맞게 나열하고 있을 뿐이진 않는가?
'내 종족에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같은 게 내게도 있는가? 그전에 내게 그러한 '종족'이라는 게 있는가? 단지 내가 복수하려는 어떤 불분명한 대상이 있고, 그 불분명한 대상은 몇 가지 이미지들의 콜라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복수의 대상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채, 단편적인 문장들로부터 나의 복수의 대상을 재발명해내는 것일 수도 있다. (한국에 '계급'이 있는가?)반대로 정말로 있는데 내가 그저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아니 에르노가 말했던 '종족'이라는 것이 정말로 나에겐 없는가? 경멸하면서도 그 흔적을 지우지 못하는, 나를 배태한 공간이 정말로 없는가? 아마도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적 자기 성찰'은 불가피한 일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전에 썼던 책도 일종의 '자서전'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그때에 들었던 의문도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내 주변 사람들의 삶을 나의 시선과 분석 아래에서 해체하고 재구축하고 서술하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용납할 수 있는 일일까? 『랭스』가 출간된 이후 가족들은 자신의 이야기가 제대로 쓰이지 않았다는 불평을 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힘을 설명하고 이해할 능력을 거머쥐었고, 그 능력을 바탕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설명할 '권력'을 얻었다. 그것을 어디까지 활용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에 관해 말하기를 원하는 순간, 우리가 말하는 대상인 그들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적 정당성 박탈 상태를 다시 공고히 하게 된다. 그들에게 지칠 줄 모르고 덧씌워지는 그러한 위상을 고발하기 위해 말하는 것임에도 말이다."(110) 그는 분명히 자신의 글쓰기 과정에서 이 지점을 유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자인 가족과 서술하는 나 사이에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지리라 믿기 어렵다. 그의 글은 어떤가, 그리고 나의 글은 어떤가. 내가 나의 시선에서 바라본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내 책은합의의 결과물인가? 나는 어디까지 나의 시선 권력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말할 수 없다면 침묵해야 하는가? 온라인 카지노 게임 자신에게로 모든 것을 돌리지 않기 위한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 주변의 세계에 대한 묘사를 시도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다 없다를 나누기 전에, 모두가 말하고 부딪히는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하지만 또 이러한 말조차, 어쩌면 읽을 줄 알고 쓸 줄 알며 말하는 데 능숙한 몇몇의 특권적인 존재들 (어쩌면 나를 포함하여)에게 유리한 협상의 지형인지도 모른다. 말한다는 것 자체도 일종의 특권일 때가 있다. 조심히 특권을 휘두르거나, 특권을 휘두르는 데 따르는 책임도 감수하는 것 외엔 도리가 없어 보인다.
책을 읽고 나서 샹탈 자케의 『계급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류희철 옮김, 그린비, 2024), 피에르 부르디외와 장클로드 파스롱의 『상속자들』(이상길 옮김, 후마니타스, 2024)를 주문했다. 후자는 책에서도 언급되기도 했다.에리봉과 같은 이들은 예외이지만, 그러한 예외를 산출해 내는 어떤 보편적 공식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샹탈 자케의 책은 정확히 그 지점을 설명하려 시도한다. 자수성가와 같은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로 설명하기엔 계급을 탈주하는 존재들의 역량은 온전히 그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의 역량을 형성하는 것은 다양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적 힘들 사이의 조합이다. 힘의 매트릭스라는 게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 모습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