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석이 형이 보낸 문자에 급하게 겉옷을 걸치고 기숙사 밖으로 나왔다. 기숙사에서 가장 가까운, 아직 운영하고 있는 약국 문을 열었다. 그리고 약국 안 왼쪽 구석에 있는 연두색 ATM 기기 앞에 섰다. ATM 기기에 쓰인 효성(HYOSUNG)은 볼 때마다 신기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신속하게 주머니 속 라임색 토스뱅크 카드를 꺼내 카드 투입구에 꽂았다. 카드가 들어간 기기가 우웅하는 소리를 내는 동안 나는 시험 삼아, 아니 어차피 생활비로 뽑아야 했기에 20,000루블을 출금했다. 그리고 곧장 토스 앱을 켰다. 진짜다. 진짜로 16만 원가량만 차감됐다. “진원아, 지금 루블/원 8이야. 빨리 돈 뽑아둬” 용석이 형이 한 말은 사실이었다.
며칠 전만 해도 17이었던 루블/원이 어째서 이렇게 됐을까 싶지만, 이유는 간단하다. 엊그제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러시아제 미사일이 우크라이나 땅에 떨어지기 무섭게, 러시아의 루블도 바닥을 쳤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가만둘 수 없는 미국과 유럽은 곧장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했고, 그 결과 루블의 가치는 폭락했다. 스위프트에서 배제된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래서 나는 바꿀 수 있을 때 바꾸자는 생각과 바닥 친 루블을 건져낸다는 생각으로 주말에 돈을 뽑았다. 그리고 그 주말이 지나고 학교 가는 버스에서 바라본 창밖은 평소와 다른 풍경이었다. 내가 타는 버스는 항상 베떼베(ВТВ)라고 적힌 파란색 큰 건물을 지나쳤다. 베떼베는 러시아 대형은행 중 하나다. 평소 은행 앞 높게 걸린 러시아 국기만 펄럭이던 때와 다르게, 오늘은 은행 문 앞에 사람들로 줄이 길게 물결치고 있었다. 줄을 선 사람들은 불안함 때문인지 삐쭉 빼쭉 고개를 양옆으로 내밀었다. 하루빨리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루블을 달러로 바꾸려고 하는 모양새였다.
나도 그날 저녁 수업이 끝나고 줄을 섰다. 다만 아침에 은행 앞에서 줄을 선 사람들처럼 손에 카드나 통장을 들고 있는 게 아닌, 나는 대형 마트 안에서 쇼핑 카트의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카트 안은 한 가지 물품으로만 가득했다. 네모난 빨간 봉투에 검은색으로 글자가 쓰인 신라면이었다. 즉석식품 판매대에는 ‘도시락’이라고 하는 팔도 식품의 즉석 라면이 인기가 있는 만큼 갖가지 종류로 여러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인기가 없는 신라면은 판매대 가장 자리에서 한 칸만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적은 칸수만큼 러시아 사람들에게 인기 없는 신라면을 있는 대로 쇼핑 카트에 담고, 지나가던 마트 직원에게 혹시 신라면이 더 없는지 물었다. 직원은 이게 뭐라고 하는 듯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곤 조금만 기다리고 말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직원은 어딘가에서 신라면 한 박스를 가져와 뜯었다. 벅벅벅- 직원이 박스를 뜯는 소리에 주변 사람들도 직원 앞에 서 있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들이 블린(Блин)을 먹듯이 나는 신라면을 먹을 뿐입니다. 그리고 오늘 빨리 사는 게 좋습니다’라는 생각이 그 사람들 시선보다 앞섰다. 신라면은 수입 품목이라 그런지, 러시아에서 한 봉지에 160루블이었다. 도시락이 한 봉지에 25루블인 것과 비교하면 라면 치고 비싼 가격이었다. 오늘도 신라면이 놓인 선반 아래에 적힌 숫자는 160으로 변한 게 없었지만, 루블/원이 절반으로 떨어진 지금 나에겐 2,700원이었던 라면이 1,280원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쇼핑카트를 신라면으로 잔뜩 채웠고, 루블을 라면으로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 은행 앞 러시아 사람들처럼 줄을 섰다.
양손에 카지노 쿠폰이 가득 담긴 봉투를 들고 기숙사로 들어왔다. 정면에 보이는 A동은 제쳐두고, 지하에 위치한 주방으로 곧장 내려갔다. 지하에는 외국 학생들을 위한 공용 주방이 있었다. 유럽에서 온 유학생이 많았던 만큼 주방 크기는 넓었지만, 전쟁 때문에 학생들이 귀국한 상태이기에 나 혼자만 쓰는 공간이 되었다. 긴급하게 돌아간 탓에 주방 한구석에는 아직 요슈아가 두고 간 몇 가지 주방용품이 있었다. 요슈아는 사용하고 싶으면 마음껏 사용하라는 듯이 말하긴 했지만 아마 쓸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나는 그 주방용품은 제쳐두고, 위쪽 유리문이 달린 선반을 열고 마트 이름이 크게 적힌 비닐봉지를 주방용품 옆에 올려두었다. 손을 뻗어 하나씩 선반 속 빨간색 신카지노 쿠폰을 핸드폰 배터리 충전 상태처럼 높게 쌓았고, 어떠한 방법으로 카지노 쿠폰을 다양하게 요리할지 기대하며 유리문을 닫았다.
달걀을 넣어 먹기도, 국물을 잔뜩 졸여 비빔면처럼 먹기도, 차가운 냉라면으로 먹기도 했다. 다양한 요리법으로 조리해 먹었지만 결국 평범하게 먹는 게 나에게 제일 잘 맞는다는 결론을 내리고, 하루에 하나씩 꺼내 평범하게 조리해 먹었다. 잔뜩 사다 놓았던 라면이 반 정도 남았을 때였다. 그때 러시아 검색 엔진 메인 탭에서 정부가 이제 달러 환전을 통제하겠다는 기사가 보였다. 이런 사태가 지속되는 걸 보고만 있을 리가 없는 러시아 정부의 조치였다. 달러 환전 통제와 더불어 루블을 은행에 예치해 두면 15% 이자를 주겠다는 특별 조치도 취했다. 그러한 러시아 정부의 조치가 효과가 있던 건지, 러시아를 향한 서방 제재가 큰 효과가 없던 건지 모르겠지만 루블은 금세 가치를 회복했고, 루블/원은 제자리였던 17을 넘어 25까지 올라갔다. 한순간에 내가 샀던 신라면은 1,280원이 아닌 4,000원이 되었다.
높게 오른 루블은 오랫동안 그 위치를 고수했다. 루블이 높은 위치에 올라가 있는 만큼 한국 통장 속 모아둔 돈이 떨어지는 속도는 빨라졌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러시아에서 루블을 직접 만들어 내야 했고, 한국어 과외, 한식당 아르바이트 등 현지에서 할 수 있는 걸 찾았다. 어느 지난날 아침에는 루블/원이 8이 되어 기뻐하며 라면을 한 박스 넘게 사고, 남은 돈으로 월세를 내며 기뻐했지만, 루블/원이 25가 됐을 때는 현지 한식당 주방 속 뜨거운 인덕션 앞에서 프라이팬을 돌리고 있었다. 주문이 많아질수록 머릿속도 인덕션만큼 열을 냈고, 미사일을 발사한 블라디미르 푸틴이 떠올랐다. 그럴 때면 탁! 버너 위에 올려있던 뚝배기를 받침대에 옮기는 소리가 크게 났다.
대형 인덕션 옆 작은 방에는 며칠 전 나처럼 급하게 설거지 업무로 들어온 친구가 있었다. 이름은 코스쨔였다. 한식당 주방장은 러시아어를 잘 못하는 한국인이었다. 코스쨔 또한 한국어를 할 줄 몰랐고, 둘 사이 의사소통이 불가해 코스쨔는 설거지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직원 식사 시간에 보면, 코스쨔는 그리 한식에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밥을 먹는 와중에 코스쨔에게 왜 여기서 일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코스쨔는 집이 무너졌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접경 지역에서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미사일로 인해 집이 무너졌고, 그로 인해 러시아로 피난을 왔다고 했다.
“피난? 근데 너 우크라이나 사람 아니야?”라고 물었다. 코스쨔는 “맞아, 전쟁 전 우크라이나 정부가 우리 집을 부쉈어”라고 대답했다.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니, 코스쨔는 자신이 살던 동네는 친러 성향이 강한 지역이었고 그만큼 우크라이나 정부의 핍박이 있었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할 말이 없어진 나는 조용히 숟가락을 다시 움직이다가, 쥐고 있던 숟가락을 잠깐 내려놓고 코스쨔에게 혹시 카지노 쿠폰 좋아하냐고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