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 게임을 하기에는 부족한 성능을 갖고 있는 컴퓨터가 네 대가 놓여있었다. 컴퓨터를 구매한 지는 십 년은 된 거 같았다. 그 옆에는 마찬가지로 오래된 은색 공중전화가 벽에 걸려있었다. 새로 칠한 듯한 페인트 냄새는 공중전화에 달린 숫자패드 속 벗겨진 잉크를 더욱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래도 이 공중전화가 바깥에 있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내가 속한 용인 경찰서 299중대의 유일한 연락 수단이었다.
‘탁탁탁탁…’ 지인들의 연락처를 적어둔 수첩을 활짝 펼쳐 공중전화 위에 올려두고, 숫자패드를 눌렀다. 아버지, 어머니부터 시작해 겨우 한두 번 만났던 선배들에게까지… 전입 신고를 마친 일주일 동안 나는 시간이 나면 전화를 해댔다. 스타크래프트를 하기에는 아직 신병이었기에, 수첩에 적힌 연락처를 게임하듯이 지워나갔다. 모든 연락처에 빗금이 그어졌다. 그리고 수첩을 다시 펼쳐보지 않은 지 나흘 정도 지나고 나서, 아직 순남이 이모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남이 이모는 청주 이모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우리 어머니를 포함한 이모들의 시대에는 호적에 올라간 이름 외에 또 다른 이름을 가졌다고 한다. 순남이 이모의 본명은 미혜였지만, 가족들은 이모를 순남이라 불렀다. 그래서 나도 자연스럽게 이모를 미혜 이모가 아닌 순남이 이모라고 불렀다. 마치 내가 가족들에게 진원이가 아닌 장군이라고 불렸던 것처럼 말이다. 이모는 순남이라는 이름대로 가족 중에서 가장 순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릴 적 어머니보다 순남이 이모를 잘 따랐고, 아주 좋아했다. 방학이 되면 이모 집에서 장기간 머물렀고, 이모 집에 있던 여러 가지 제품을 만지작거렸다. 윈도우 97이 깔린 컴퓨터, 나팔꽃 모양의 혼이 달린 축음기, 오래된 피아노 등등.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입학 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어째서인지 순남이 이모 전화번호를 누르는 건 잊었다. 그래서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순남이 이모 전화번호를 받았다.
“여보세요”
“순남이 카지노 게임, 저예요. 장군입니다”
“어~ 장군아, 군대는 어때? 잘 지내지?”
카지노 게임는 코 안쪽으로 공기가 잘 통하지 않는 듯한 목소리를 수화기로 흘려 넣었다. 그 맹맹한 목소리를 듣고, 나는 왜 진작 순남이 카지노 게임에게 전화를 안했을까에 대한 이유를 떠올렸다. 카지노 게임가 40~50대가 됐을 때쯤부터였을까. 카지노 게임는 내가 전화를 하면 매번 이 맹맹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어떨 때는 코를 통해 흘러나오는 무언가를 감추려고 훌쩍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고, 또 어떨 때는 목소리 톤뿐만 아니라 발음이 어눌해진 경우도 있었다. 이렇고 저런 카지노 게임의 음성을 토대로 나는 카지노 게임가 술을 잔뜩 마셨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렸다. 그 이후 나는 술에 취한 듯한 그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서, 카지노 게임와 나 사이에 낮지 않은 벽을 세웠다. 입대를 하기도 했고, 오랫동안 카지노 게임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던 나는 이 벽의 존재를 잊었다. 하지만 수화기 넘어로 들려온 카지노 게임의 목소리는 여전히 울적했다.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다 했기 때문에, 사실 나는 카지노 게임와 여유롭게 통화할 수 있었다. 수화기를 든 시각도 청소 시간이 아직 한참 남은 일곱 시 반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십 분은 카지노 게임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스스로 쌓아 놓은 벽의 존재를 다시 한번 알아챘고, 수화기 너머의 카지노 게임보다 벽에 적힌 ‘내가 그동안 카지노 게임에게 전화하지 않은 이유’에 집중했다. “몸은 어때?”, “아픈 곳은 없지?”, “밥은 잘 먹고 있지?”카지노 게임는 같은 뜻을 가진 문장을 다르게 표현하며 반복적으로 나의 상태를 물었다. “괜찮아요, 좋아요”그에 반해 나는 같은 의미의 문장을 똑같은 표현으로 서너 번 대답했다. 네 번째 똑같은 대답을 카지노 게임에게 전달한 나는 결국 “청소하러 가야 할 거 같아요”라는 말을 뱉고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 문장이 내가 카지노 게임에게 전한 마지막 문장이 되었다.
전역을 하고, 군대 밥이 아닌 어머니의 된장찌개가 익숙해질 때쯤에 나는 어머니가 요새 청주 이모와 전화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요새 청주 이모랑 연락 안 하네? 싸웠어?”라고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어머니에게 물었다. 여기까지다. 어머니가 그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떻게 대답을 했는지, 또 그날이 정확히 며칠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청주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기억만 난다. 가족들은 내가 순남이 이모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군 생활 중인 나에게 이 부고를 알리지 않았다. 내가 순남이 이모에게 했던 “괜찮아요, 좋아요” 대답과는 다른, 괜찮지 않은 군대 생활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모가 어떻게, 언제,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이모의 장례식은 어땠는지 모른다. 참, 그런데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이 저녁 식사를 한 식탁은 순남이 이모 집에 있던 빈티지 식탁이었다.
“어, 장군아 왔어?” 조수석 창문 너머로 순남이 카지노 게임가 말했다. 나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반짝이는 검은색 다이너스티였다. 청주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나오면 그 차는 항상 터미널 근처에 주차되어 있었고, 카지노 게임는 선글라스를 낀 채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나는 몇 걸음 안 걷고, 익숙하게 덜컥 차 문을 열었다. 연갈색 시트가 깔린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니, 두 시간 반 정도 타고 온 고속 버스가 생각보다 편하지 않았구나 싶었다. 벨트 매라는 카지노 게임의 말에 찰칵하고 벨트를 채우자 카지노 게임는 이내 기어를 바꿔 차를 움직였다. 차가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카지노 게임는 다시 기어를 바꾸고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차 문을 열고 내려 마주한 곳은 카지노 게임의 빈티지 가게였다. 카지노 게임는 유리문 앞에 붙여둔 ‘잠깐 자리 비움’이라고 쓴 종이를 떼고 손을 높게 들어 열쇠를 꽂아 돌렸다. 문을 스윽하고 밀자, 문틈으로 카지노 게임의 빈티지 가게 냄새가 순식간에 코로 들어왔다.
카지노 게임는 내가 청주에 갈 때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가게 문을 닫았다. 내가 갈색톤을 가진 카지노 게임의 빈티지 가게에 서 있을 때, 가게 문에 쓰인 마감 시간은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카지노 게임는 아무렇지 않게 가게의 모든 전등을 껐다. 그렇게 가게 문을 닫고, 우리는 다시 검은색 다이너스티에 올라탔다. 모충동 금호아파트로 향했다. 차가 아파트에 도착하면 나는 매번 카지노 게임보다 먼저 차에서 내려 101동 101호 문을 열었다. 그럼 문이 채 활짝 열리기 전 빈티지 가게에서 나던 냄새가 콧속으로 들어왔다. 그 냄새는 가게뿐 아니라 카지노 게임가 잠을 자는 공간인 금호아파트에도 배어있었다. 다만 카지노 게임 집에는 가게와 다르게 빈티지 옷들이 널려있지 않았지만, 오래되어 보이는 가구와 여러 빈티지 잡화가 여기 저기 놓였었다.
나는 카지노 게임 집에 들어서면 항상 어떤 새로운 물건이 있는지를 찾아보는 걸 재밌어했다. 하루는 다트판이 있던 적이 있는데, 다트판은 벽이 아닌 바닥에 놓여있었고 다트는 그저 식탁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여러 가지 CD와 LP가 티비 앞에 무심하게 쌓여있었다. 그 옆에는 아남(ANAM)이라고 적힌 금빛 오디오가 있었다. 나는 그 오디오를 처음 본 순간 마음에 들었고, 카지노 게임에게 언젠간 나에게 물려주라고 말했다.
그 오디오는 지금 내 책상 옆에 놓여있다. 오래전에 고장이 나서 작동은 안 된다. 그래도 나는 한동안 그 오디오를 살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오디오는 나에게 소리를 내주지 않았다. 대신 내가 자주 앉는 책상 옆에 조용하게 서 있다. 어머니는 오디오를 볼 때마다 나에게 이제 그만 버리라고 했지만, 나는 몇 번이고 오디오를 수리해 볼 생각이라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 오디오 외에도 우리 집 싱크대 선반에는 프랑스제 초록색 유리컵 네 개, 주방 서랍 안쪽에는 갈색 유리로 된 프랑스제 냄비들, 빈지티 가구들 그리고 카지노 게임 집에 있었던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이 집 안 곳곳에 놓여있다. 물건들이 적어도 이십 년은 넘은 것들이라 누군가 사용하기는 힘들어할 수도 있지만, 내가 군 생활을 하던 중대 속 전화기와 컴퓨터처럼 요상한 힘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각각 나름의 이유로 잘 사용 중인 것들도 많다. 다만 대부분 갈색톤의 물건이라 자주 먼지를 쓸어내 줘야 한다.
카지노 게임와 마지막 전화를 할 때, 빈지티 가구의 먼지를 쓸 듯이 내가 카지노 게임에게 안에 쌓여있던 무언가를 깨끗하게 청소해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카지노 게임는 코를 풀듯이 나에게 무언가를 요청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그 먹먹했던 카지노 게임의 얼굴 가운데를 살포시 쓸어내 줬으면 어쩌면 오늘도 통화를 했을지 모른다. 아니면 “괜찮아요, 좋아요”라고 반복하던 대답에 끝말만 조금 음을 올려 “괜찮아요? 좋아요?”라고 되물었어도 몇 번 통화를 더 했을 텐데 말이다.
…
2018년부터 시작한 유학 생활 속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순남이 카지노 게임에 대한 생각은 시베리아의 눈처럼 끈질기게 이어졌다. 참고로 시베리아의 눈은 봄이 왔다고 생각하는 5월 말에도 온다. 끝내 정말로 따뜻한 날씨가 되었을 때 그간 쌓였던 눈은 진창이 되었고, 그 진창은 바지 끝단에 끊임없이 손을 뻗었다. 진창을 지나, 기숙사에 돌아와 신발을 벗을 때면 바지 끝단이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얼룩은 카지노 게임 가게를 장식했던 빈티지 제품의 색깔을 가졌다. 결국 나는 빨래를 하듯이, 내 안에 쌓여버린 무언가와 함께 순남이 카지노 게임를 털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2023년 7월 초 한국에 온 지 이틀이 됐을 때 태재 작가님의 에세이 수업을 신청했고, 기본적인 틀을 갖췄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한 글자씩 적어나갔다.
수업 중 태재 작가님이 에세이는 지난 일을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에세이와 연결되는 또 다른 일을 만들어낸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마감을 마치고, 이번 주 주말 청주로 향한다. 검은색 다이너스티는 주차되어 있지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