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이 부캐인 사무라이,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요마사
1592년 4월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는 왜장은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일 것입니다. 그들은 그 7년 전쟁 동안 바다 건너 본국에서 명령을 내리는 전쟁의 수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고 무장으로 조선 땅에서 서로 맹렬하게 충성 경쟁을 펼쳤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도 그랬습니다. 김한빈 감독의 이순신 장군 시리즈 마지막 영화인 <노량에서도 나오지만 1598년 히데요시가 죽은 후에도 조선에 와있던 왜군들은 그 사실을 몰랐었으니까요. 라이벌답게 가토와 고니시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선에서 전쟁 중엔 사사건건 부딪쳤고, 전쟁 후 일본에선 서로 칼끝을 겨누는 아군과 적군으로 갈라서기까지 했습니다. 둘이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종교도 가토는 불교 신자였고 고니시는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물론 우리에겐 둘 다 무지 나쁜 놈들입니다. 조선팔도를 헤집고 다니며 학살과 만행을 저질렀으니까요.
고니시 유키나가(1558~1600)는 임진왜란에 참전한 여러 다이묘들 중에서 선봉인 1군 대장답게 조선 땅을 일착으로 밟아 부산 지역을 격파하고 수도 한양을 거쳐 평양까지 전광석화 같이 북상한 왜장입니다. 반면에 가토 기요마사(1562~1611)는 수도 첫 입성의 공을 고니시에게 놓친 것을 안타까워하며 개성을 거쳐 최북단인 함경도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그때 그는 본국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 시 고니시의 한양 입성 공적을 고의로 누락시키기도 했습니다. 치졸한 라이벌답게 그랬습니다. 함경도에서 가토는 그곳까지 피난 간 선조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생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임진왜란의 명분인 정명가도(征明假道)를 테스트라도 하듯이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의 성까지 점령했습니다. 일본 최초의 만주 진출이었습니다. 이렇게 쉽게 끝날 것과도 같은 임진년의 전쟁은 1593년 1월 명나라의 참전으로 조명연합군이 결성되며 왜군은 남쪽으로 밀려 내려오게 됩니다. 왜장인 가토와 고니시도 물론입니다. 피아의 주체와 진행 방향은 다르지만 훗날 6.25 전쟁과 비슷한 양상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6.25 전쟁과 다른 점은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육지는 몰라도 바다에선 왜군과 어떻게 붙어도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은, 그리고 실제로 세계 해전사에 빛나는 23전 23승, 전승을 달성한 성웅인 그가 있었기에 전쟁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습니다. 100년 넘게 지속된 전국시대로 전쟁 귀신이 다 된 날고 기는 센코쿠 다이묘들을 다 물리치고 일본을 통일한 그는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그가 주도한 일본 통일은 그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가 죽은 1582년부터 8년 후인 1590년에 달성했는데 한 수 아래로 훨씬 쉬어 보이는 조선 정복은 무려 7년이 가도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이순신 장군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히데요시는 그 전쟁의 끝을 보지 못하고 1598년에 먼저 죽게 됩니다. 아울러 그 지루한 전쟁도 끝이 났습니다. 영화 <노량의 초반부에 나오듯 죽기 전 그는 유언으로 조선에 가있는 모든 왜군의 철군 명령을 내렸으니까요. 하지만 우린 안타깝게도 그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뒷말이 무성한 그의 죽음입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가토 기요마사와는 달리 임진왜란 반대론자였지만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참전했습니다. 그것엔 그가 당시 조선과 일본 양쪽 눈치를 보며 살아오던 대마도의 다이묘 소 요시토시의 장인이라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상치 못한 이순신 장군의 신출귀몰한 전투력과 명나라의 참전으로 그 전쟁에 승산이 없음을 간파하고 휴전과 종전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소 어이없게 진행이 되어 결렬이 되면서 임진왜란 중인 1597년 또 한 번 대대적인 정유재란이 일어났습니다. 분노한 히데요시의 명에 따른 것입니다. 협상의 주역인 고니시와 명나라의 심유경이 명의 황제인 만력제와 일본의 태합인 그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심유경은 처형을 당했고 고니시는 혼줄이 났지만 목숨은 건졌습니다. 그 일로 정유재란 시 선봉 1군 대장은 그의 라이벌인 가토에게 넘어갔습니다.
정유재란 시 왜군의 전투력은 5년 전인 임진왜란 초기보다는 떨어졌습니다. 남쪽 지방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우리 이순신 장군의 수군과 육군인 조명연합군은 전보다 강해졌습니다. 초기엔 이순신 장군이 모함으로 파직되어 원균이 지휘봉을 잡으며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해 위기도 있었지만 이순신 장군이 출사표와도 같은 "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전선이 남아있나이다"란 말을 남기고 출정한 명량해전에서 크게 승리함으로써 대세는 조선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의 태화강변에서 성을 쌓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학성공원 자리로 그가 본국인 일본 스타일로 지은 왜성이었습니다. 시간이 급박하니 제대로 짓지는 못했습니다. 왜군은 이렇듯 임진왜란 시 조선에 들어와 많은 성을 축조했습니다. 당시 경쟁자인 고니시 유키나가가 자리를 틀고 있던 순천성도 왜성이었습니다. 일본 성은 대개 그렇듯이 주변에 적의 침략에 대비한 해자를 파고 성 중앙에 고층으로 지어진 천수각이 인상적인 혼마루(本丸)가 메인 건축물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 건물로 니노마루(二の丸), 산마루(三の丸)등의 누각을 배치합니다. 그러다 보니 일본 성은 유사시 성밖에서 농사를 짓는 일반 백성까지 수용하고 보호할 수 없는 형태입니다. 그러나 조선의 성은 긴 성벽으로 둘러싸여 성안에 전투를 하는 군인은 물론 일반 백성까지 모두 수용해 피란처의 역할도 합니다.
조명연합군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기요마사가 축조한 울산왜성을 2차에 걸쳐 집요하게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은 급조해서 만들다 보니 성내에 우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조명연합군은 태화강의 물줄기를 모두 틀어막아 왜군을 아사시키고자 했습니다. 왜군은 성안에 식량은 물론 물도 없어 말을 잡아먹고 말의 피와 오줌까지 마셔가며 버텼습니다. 그렇게 말라죽기 일보직전까지 간 상태에서 조명연합군이 조여들어오자 할복까지 고려했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였습니다. 하지만 구원군이 오며 그는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성을 빠져나갔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으로 돌아온 가토 기요마사는 그의 영지인 구마모토성을 개축하는데 전념했습니다. 그 영지와 성은 1587년 규슈정벌을 훌륭히 수행한 그에게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사한 것이었습니다. 가토는 조선에서 벌인 마지막 전투인 울산왜성 전투에서 성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경험했기에 그의 성을 최고의 요새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1601년부터 7년에 걸쳐 아름답고 단단한 구마모토성을 완성해 갔습니다. 그의 주군 히데요시의 본성인 오사카성과, 또 거슬러 히데요시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났고 도쿠가와 막부 시절엔 쇼군의 혈족이 대대로 살던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 3대 명성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이 세워진 것입니다. 넘사벽이었던 전국시대 최고 영웅인 3인방의 성에 가토의 이름이 붙은 성이 하나 들어갔습니다. 그 정도로 구마모토성을 근사하게 잘 축성하였기에 일본 최고의 성 리스트에 올라갔을 것입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구마모토성에 120개의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토란 줄기로 짠 다다미를 깔았으며 성벽엔 조롱박을 심어 타고 올라가게 했습니다. 역시 굶어본 사람이 배고픔을 안다고 그렇게 유사시 식량으로 사용하기 위해 대비를 한 것입니다. 또한 출타 시 매번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며 부하들도 그것을 따르게 했습니다. 마치 몽고의 칭기즈칸 부대원들이 마상 안장 아래에 유사시 육포로 뜯어먹을 수 있는 소가죽을 깔고 원정을 다녔듯이 말입니다. 그에게 울산왜성 전투의 트라우마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구마모토성의 공사엔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에서 포로로 잡아온 조선인도 동원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구마모토 현내에 있는 근처의 기쿠지성을 생각나게 합니다. 그 성은 과거 야마토 정권 때인 663년 나당연합군과 맞서 싸운 백제의 부흥운동을 돕기 위해 원군으로 참전한 왜인들이 돌아와서 쌓은 산성입니다. 당시 백강 전투에서 패한 왜인들은 나당연합군이 일본까지 침공할 것을 두려워해 그 성을 비롯한 몇 개의 성을 일본 각지에 쌓았습니다. 그때 나라 잃은 백제의 유민들도 일본에 많이 들어왔는데 왜인보다 문명인이었던 그들은 그 성을 축조하는 것을 지도하고 감독했습니다.
그 내용은 제가 일전에 이곳에 쓴 <백제인의 디아스포라 구마모토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로부터 약 천년 후 같은 지역인 구마모토에 그들의 후손인 조선인들이 건너와 이번엔 성 축조에 동원이 된 것입니다. 고국인 조선에서 울산왜성을 쌓았던 자들일 것입니다. 그런 울산과의 인연으로 구마모토시엔 당시 조선인들이 살았던 울산마을과 울산역이 지금도 그 이름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울산시와 구마모토시는 자매결연을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토 기요마사가 구마모토 성내에 설치한 안전장치들은 그의 가문을 지켜내는 데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벌어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편인 동군으로 출정했음에도 그가 뼛속까지 히데요시의 신하라는 것이 밝혀져서 그랬습니다. 증거 중 하나는 구마모토성 안엔 비밀 은거지가 있는데 그 방은 히데요시의 아들인 히데요리를 위한 방이었습니다. 오사카성에 있는 그에게 변고가 생길 시 피란처로 쓰게 할 요량으로 그렇게 설계를 한 것입니다. 가토는 1611년 교토의 니조성에서 열린 이에야스와 히데요리의 회합에도 가슴에 칼을 품고 참가해 옛 주군의 아들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그해에 죽었는데 만약 그로부터 3년 후 벌어진 오사카성 전투 때 가토가 살아있었다면 조금은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난공불락인 구마모토성도 그 역사에 등장했을지 모릅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주군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편이 아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한 것은 서군의 실질적인 대장인 이시다 미쓰나리와 원수 같은 관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싫어 부득이 동군 편에 서서 전투를 수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동군 대장인 이에야스도 명분은 히데요리를 위해 싸운다며 완전한 야욕을 드러내지 않았었으니까요. 그 전투에서 역시 또 그가 싫어하는 고니시 유키나가는 서군 편에 서서 싸워 고니시와 미쓰나리는 전투 후 승리한 이에야스에 의해 바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가토도 결국 그로부터 32년 후인 1632년 도쿠가와 가문의 쇼군에 의해 숙청을 당합니다. 그가 죽고 난 후임에도 막부의 개역(改易)이라 불리는 작업에서 그의 아들로 이어진 구마모토성과 영지가 몰수되었습니다. 마치 부관참시를 하듯이 히데요시의 사람이었던 그를 사후 단죄한 것입니다. 어디든 비정한 정치 세계입니다.
가토 기요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으로 나고야성의 건축에도 큰 공을 세웠습니다.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연 이에야스는 오다 노부나가가 태어나고 떠난 그 성을 번듯하게 개축했습니다. 일본의 중앙에 위치해 중경이라 불리는 나고야(옛 오와리) 지역의 중요성을 고려해 그에 걸맞게 성을 리모델링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엔 그의 아들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고산케(御三家)라 불리는 도쿠가와 가문의 유력자들이 살게 했습니다. 나고야성 증축엔 많은 건축가들이 동원되었는데 가장 난이도가 높은 천수각 건축은 가토 기요마사가 담당했습니다.
이렇듯 일본 3대 성 중 2개 성의 건축에 관여한 가토였습니다. 또한 임진왜란 시 일본 내 출정 기지였던 규슈 사가현의 나고야성도 그가 건축하였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에게 그 일을 맡겼습니다. 그렇게 일본은 차곡차곡 임진왜란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습니다. 나고야는 위의 혼슈의 나고야와 같은 이름입니다. 이 정도면 가토 기요마사는 칼을 잘 쓰는 사무라이이고, 번을 다스리는 다이묘이지만 유능한 건축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가토 기요마사 사후 266년 후인 1877년 구마모토성은 일본 역사의 중심에 섭니다. 그 이전 세키가하라 전투와도 같은 내전이 그 성에서 벌어진 것입니다. 1868년 시작된 메이지 유신의 주축들의 갈등이 비화된 세이난 전쟁의 격전지가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유신 초기 최고 실력자인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3년 그가주장한 조선 정벌이 유신의 동지였던 오쿠보 도시미치와 기도 다카요시에 의해 불발되자 고향인 가고시마로 낙향하였습니다. 구마모토현 바로 아래 규슈 최남단의 현입니다. 그때 메이지 유신으로 실직한 사무라이들이 유신 정부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그를 추대하며 거병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 내전에서 정부군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 진을 쳤습니다. 사이고는 아무리 공략해도 무너지지 않는 그 성을 향해 그들은 정부군에 진 것이 아닌 가토에게 졌다고 할 정도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명성임을 증명했습니다.
1632년 가토 가문이 쫓겨나간 구마모토성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충성했던 호소카와 타다오키의 아들이 입주했습니다. 호소카와 가문이 구마모토성의 새 주인이 된 것입니다. 타다오키는 임진왜란에도 출정했고 세키가하라 전투에선 이에야스 편에 선 다이묘였습니다. 그 가문은 그때부터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1868년까지 구마모토의 맹주로 위세를 떨쳤습니다. 현대에 들어서는 일본의 수상까지 배출했는데 그가 1993년 연립 내각을 구성해 1955년 창당 후 38년간 독주해오던 자민당 체제를 무너트린 호소카와 모리히로 총리입니다. 그는 그 가문의 18대 당주였습니다. 비록 1년도 못 간 그의 정권이었지만 그는 태평양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그해 11월 우리나라 경주에서 열린 김영삼 대통령과 회견 시엔 일본의 식민 지배에 대해 사과를 하기도 했습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2016년 지진으로 무너져 현재 공사 중에 있습니다. 완전한 복구는 2052년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2024년 11월 방문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은 관람에 크게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성의 핵심인 천수각은 멀쩡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었고 지진으로 무너진 지역을 통과할 때엔 임시 공중 보행로를 높게 세워놔서 관람을 하는 데엔 오히려 더 편하기까지 했습니다. 다다미 속 토란 줄기는 확인 못했고 조롱박보다는 사쿠라가 무성한 성이었지만 유명해진 성내 우물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 입구엔 그 성을 축조한 가토 기요마사의 동상이 그 성의 호위무사처럼 우뚝 서있었습니다. 아니 앉아있었습니다. 구마모토 시민들은 가토 가문이 그 시와 맺은 인연은 짧지만 호소카와 가문과 함께 두 가문을 모두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했습니다. 그날도 성 곳곳엔 두 가문의 문장(가몬)이 함께 걸려있는 모습이 내내 목격되었습니다.
일본엔 오사카성, 나고야성, 구마모토성을 가리키는 3대 명성 이외에 국보급으로 치는 5대 성이 있습니다. 마츠에성, 히메지성, 이누야마성, 히코네성, 마츠모토성입니다. 국보성은 천수각이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성들 중에서 국보급으로 아름다운 성을 지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모도 외모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내부입니다. 국보온라인 카지노 게임 내부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목조로 되어있어 나무로 된 계단을 몸을 구부리고 불편하게 올라가야 하는 성들입니다. 올라갈수록 경사는 더 가팔라지고 면적은 더 좁아집니다. 그 안엔 침략을 대비한 최종 무기 창고도 있고 닌자가 숨어있는 비밀의 방도 있습니다. 반면에 3대 명성과 같은 크고 위용 있는 성들은 내부를 관람에 용이하게 만들어 놨습니다. 외부는 고색창연한 옛 성인데 내부엔 엘리베이터까지 설치해 주상복합과도 같이 리모델링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스타일인 천수각이 중심인 일본의 성은 전국시대 초대 맹주인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16세기 중엽부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