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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하 Sep 30. 2021

속아 카지노 게임 추천갔지만

가즈오 이시구로 <<남아 있는 나날

자기 자신을 속인다? 신파조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대사라 생각했다. 알고도 모른 척한다는 정도의 의미로만 알고 있다가 이 책을 읽은 후 조금은 그 너머를 가늠하게 되었다. 알고도 넘어가는 정도의 단순한 구가 아니었다. 실제로 속아 넘어간다는 의미였다. 분명히 알만한 것을 몰랐고 모름의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는 말이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은 사실 ‘남아 있는 나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지나간 나날’에 대한 이야기다. 대저택의 집사로 살아온 한 중년 남성은 그의 완벽한 일처리 능력이 꼭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는 그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고귀한 엘리트 집사이다. 한때 전설적인 신화를 남긴 제 아버지를 따라 그는 더욱 집사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카지노 게임 추천에게 충성함은 물론 카지노 게임 추천의 고귀한 인품과 업적에 어떻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간다. 각시처럼 완벽히 집안 살림을 꾸리는 동시에 우렁이처럼 실재하지 않는 편안함을 주는 것이 그의 직무이자 고등집사의 직무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중년이 지났다. 부족함과 아쉬움만 남는데 시간은 어느새 흘렀다. 동료들과의 사적관계도 없었고 아버지의 임종도 ‘겨우겨우’ 지켜냈지만 그것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라면 누구나 감내해야 할 몫이다. 아버지도 마땅히 이해하실 것이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다. 동료 하인들에게는 적절한 업무 지시와 감정의 선을 지켜왔다. 서로 의가 상한 일도 없고 혹여 그럴 위기가 있으면 소신껏 피해를 감내했다. 가령, 화를 내면 묵묵히 받아주고 간혹 직접 쓴 소리를 해야 하면 상대방의 감정을 건드릴 선 따위 넘지 않았다.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엮여서 좋을 것 없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이상한 소식을 듣는다. 평생을 존경해 마지않던 카지노 게임 추천이 나치에 가담했다는 소식이다. 그럴 리 없었다. 카지노 게임 추천은 언제나 올바른 행실에 공평하고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공명정대한 일에 힘을 쏟는 그런 분이었다. 나라의 (숨은) 정치인으로서 비겁한 술수와 책략에는 멀찌감치 거리를 두었고 오히려 순진하다는 비방을 들을 정도로 청렴결백한 양반이었다. 그런 분이 나치라니 가당치 않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도 불구 카지노 게임 추천은 순수하다고는 할 수 있어도 지혜롭지는 못한 사람이었다. 결국 물밑 작업으로, 허나 열성적으로 나치에 가담한 범죄자와 같이 되어 버렸다. 집사는 이전의 카지노 게임 추천에게서 새로운 카지노 게임 추천을 맞는다. 유구한 영국의 문화와 같았던 이전의 카지노 게임 추천과는 달리 새 카지노 게임 추천은 미국인이고 어쩐지 얕고 비속적인 농담이나 지껄이는 양반이었다. 그렇다고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새 카지노 게임 추천은 그에게 오래도록 부재했던 긴 휴가를 허락해주었고 카지노 게임 추천 소유의 멋들어진 차도 흔쾌히 빌려주었다. 그래, 나쁘지만은 않다. 집사는 다시 새로운 카지노 게임 추천에게 충성해야 할 것이다. 다만, 다시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에서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간 자’는 누구인가? 순진무구하여 몰락한 주인인가 아니면 그를 평생 존경하고 섬겨온 집사인가. 두 말할 것 없이 모두이다. 주인은 그가 하는 일이 매우 긴밀하고도 위급한 중요 안이라 여겼다. 현 영국의 미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밤낮 정보를 주고받으며 사람들과 교제했다. 뜻이 맞는 이들과는 계획을 세우고 나랏일을 도모하며 자신이 나라의 세태를 바로잡는 ‘히든 피겨’(Hidden Figure)라 착각하였다. 안타깝게도 모든 희생은 숭고한 일이 아니었을 뿐더러 구역질나는 행위에 가담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애초에 방향 설정이 잘못되어 결과도 참혹했고 과정은 그의 생에 철저한 낭비가 되었다. 주인의 몰락은 딸린 집사의 생에도 영향을 미쳤다. 겉으로 보기에 그가 당할 화는 없었으나 충격과 상실감, 방황과 고독은 어쩔 수 없었다. 그에게 잘못이 있다면 주인의 일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 알려 하지도 않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분수에 맞는 일이라고 철썩 같이 여겼다. 그토록 좋은 주인이라면 당연히 좋은 일만 할 것이라 생각했던 그의 연역법적 사고는 안타깝게도 불행한 결말을 낳았다.



뜻밖에도 이 책에서 가장 지혜로운 이는 한때 집사와 함께 일했던 동료이다. 정확히 말하면 집사의 아래 직분을 부여받고 일을 처리해 나갔던 여자집사이다. 그녀는 집사에게 호감을 가지고 그에 대해 알고 싶어 하였으며 대화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집사는 상사로서의 역할에 몰두해있던 나머지 그녀를 보지 못했다. 아니, 그녀가 생각하기에 그도 동일한 감정이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서로를 알아갈 기회가 생기기라도 하면 마치 하찮은 일을 나중으로 미루듯 그녀와의 자리를 피했다. 그녀가 저택을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착하고 성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지만 아쉬운 것이 하나 있다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는 그녀의 삶이 결코 불행하지만은 않았음을 깨닫고 이를 오랜 세월 끝에 만난 카지노 게임 추천에게 고백한다.


“스티븐스 씨, 당신은 지금 제게 남편을 사랑하느냐 안 하느냐를 묻고 있는 것 같군요. (…) 어쨌든 꼭 답변해 드려야 할 것 같네요, 스티븐스 씨. 당신도 말씀하셨듯이 이제 우린 오래도록 다시 못 볼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요, 저는 남편을 사랑합니다. 처음에는 아니었어요. 처음 오랫동안은 아니었어요. 그 옛날 달링턴 홀을 떠나올 때만 해도 제가 정말 영원히 떠나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답니다. 그저 스티븐스 씨 당신을 약 올리기 위한 또 하나의 책략쯤으로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나 막상 여기로 와 한 남자의 아내가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을 때 저는 큰 충격을 받았지요. 그 후 오랫동안 저는 무척이나 불행했어요. 이루 말할 수 없이 ……. 그러나 한 해 두 해 세월이 가고 전쟁이 지나가고 캐서린이 장성했어요.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남편을 사랑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누구하고든 오랜 시간을 함께하다 보면 그 사람한테 익숙해지게 마련이죠. 남편은 자상하고 착실한 사람이에요. 그래요, 스티븐스 씨, 이제 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는 침묵을 지키던 켄턴 양이 잠시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한없이 처량해지는 순간이 없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내 인생에서 얼마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던가.’ 하고 자책하게 되는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면 누구나 지금과 다른 삶, 어쩌면 내 것이 되었을지도 모를 ‘더 나은’ 삶은 생각하게 되지요. 이를테면 저는 스티븐스 씨 당신과 함께했을 수도 있는 삶을 상상하곤 한답니다. 제가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화를 내며 집을 나와 버리는 것도 바로 그런 때인 것 같아요. 하지만 한 번씩 그럴 때마다 곧 깨닫게 되지요. 내가 있어야 할 자리는 남편 곁이라는 사실을. 하긴, 이제 와서 시간을 거꾸로 돌릴 방법도 없으니까요. 사람이 과거의 가능성에만 매달려 살 수는 없는 겁니다. 지금 가진 것도 그 못지않게 좋다, 아니 어쩌면 더 나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닫고 감사해야 하는 거죠.”






후회할 과거가 남아있지만 후회를 인정하고 현재에 충실한 삶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운동화 바닥에 붙은 껌이라도 말끔히 떼어내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지언정 과거를 인정하고 다시 뒤돌아 걷기 시작한다는 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지는 변화이거나 명료한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소설의 제목을 <<남아 있는 나날로 이름 지었다. 아무리 늦어도 거기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고 또 그래야 하기에, 어려움을 응시하며 모든 이들의 <<남아 있는 나날이 숭고한 방향과 정직하고 성실한 발걸음으로 채워지기를 기원하고 있다. 더 이상 어리석지 않은 생, 모든 것을 움켜쥐려 하지만 실상 아무것도 움킬 수 없음을 인정하는 생, 다시 가벼운 발걸음을 시작할 수 있는 생, 사랑하는 이들과 아름다운 여생을 즐길 수 있는 생, 그러한 생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마지막 장에 이르러 집사는 벤치에 앉아 저녁 어스름을 바라본다. 저녁은 누구나 좋아하는 시간이고 야경은 누구에게나 황홀한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듣는다. 과연 어둑해지니 사람들이 조금씩 바깥공기를 마시려 나온다. 함께한 지인과 손을 잡거나 서로를 껴안으며 주어진 시간을 만끽한다. 집사는 여행을 마치며 새로운 카지노 게임 추천에게로 돌아간다. 자신의 최약점인 농담을 시도 때도 없이 일삼는 저 카지노 게임 추천에게 똑같은 농담으로 받아칠 수 있는 위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조금은 가볍고 조금은 편안해질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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