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격자 카지노 게임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
요즘 앵무살수라는 웹툰을 열심히 보고 있다. 수년 전 완결된 작품인데 친구의 추천을 받아 이제야 보기 시작했다. 흑백 작품임에도 몰입도가 대단하고 웹툰의 고질병인 질질 끄는 전개도 없어 더 좋다. 곧 마지막 화를 앞두고 있어 몇 개 안 남은 초콜릿을 아껴먹듯 달콤하게 즐기고 있다.
어느 무협지든 마찬가지지만 앵무살수에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 오는 책(흔히 비서라고 일컫는데, 배우기만 하면 강호를 제패할 수 있는 검술, 무공 등을 담고 있다)이 등장한다.
앵무살수 속 두 권의 비서 중 하나는 ‘선근경’, 다른 하나는 ‘천음경’이다. 선근경은 책자로 전해지지만 천음경은 이름만 책자 같을 뿐 실질은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새로운 글감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된 탓일까. 이 내용을 보며 선근경과 천음경이 꼭 고시생 사이에 전해 내려 오는 단권화 자료(= 서브sub 라고도 부른다)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고시 공부를 하다 보면 선배들로부터, 혹은 복사집에서 서브를 얻을 일이 있다. 손글씨로 정리한 자료도 있고 타이핑을 친 깔끔한 자료도 있다. 생각보다 서브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나도 초시생 때 과목별 카지노 게임를 얻을 일이 있었다. 지금은 같은 부처 선배가 된 친한 누나로부터 얻은 행정학 카지노 게임, 수석합격자가 정리했다고 전해지는 재정학 카지노 게임, 이름 모를 합격자가 정리한 경제학 카지노 게임 등이다.
카지노 게임를 얻었지만 내가 정리한 자료가 아니라 그런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순전히 작성자의 취향에 따라 만들어진 자료인 데다 독자를 고려하지 않는 자료이니 당연했다. 내 눈에 익지 않았을 뿐인데, 잘 읽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등한시했다.
몇 년이 흐르고, 직접 카지노 게임를 완성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비기를 완성하고 죽는 절대고수들처럼, 카지노 게임를 완성할 때쯤이면 합격하게 된다) 선배들의 카지노 게임와 내가 만든 카지노 게임가 내용이나 구성상 큰 차이가 없고, 일부 단원에서는 여전히 선배들이 준 카지노 게임의 퀄리티가 더 높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제야 문제는 내 태도에 있음을 알았다. 쉽게 구한 자료라는 이유만으로 자료의 가치를 폄하했던 것이다.아마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어렵게 얻은 카지노 게임였다면 ‘전설 속 비서’로 여기며 애지중지하고 어떻게든 내용을 익히고자 했을 것이다.
최종합격했던 2017년 초, 그제서야 선배들에게 받았던 쉽게 얻은 카지노 게임들을 다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눈에 익지 않아 잘 읽히지 않아도 자료와 친해지고자 노력했다. 세 번 읽으니 틀이 잡혔고 열 번 읽으니 막힘이 없었고 스무 번 넘게 읽으니 내가 쓴 자료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읽을 때마다 조금씩 더했던 메모들은 어느새 책 곳곳을 채웠고 그렇게 나만의 카지노 게임가 되었다.
마지막 해, 나는 직접 만든 경제학 카지노 게임와, 학원에서 받은 암지훈(암기지옥훈련) 노트에 메모를 더한 행정법 카지노 게임, 선배에게 받아 내용을 더한 행정학 카지노 게임, 또 다른 선배에게 받은 정치학 카지노 게임와 정보체계론 카지노 게임로 무장하고 2차 시험장에 들어갔다.
2차 시험을 파훼하는 비법이 담긴 무림(신림)의 비서를 통해 비기를 익힌 결과일까, 제법 좋은 성적으로 합격했다.
합격 후, 나도 후배들에게 카지노 게임를 뿌렸다. 복사본도 아닌 내 손글씨가 담긴 원본을 말이다. 주면서도 이 카지노 게임의 가치를 알아챌 때쯤 그들도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다.
카지노 게임를 곳곳에 뿌린 지 일 년 여가 지난 어느 날, 문득 그 누구도 나만큼 원본을 소중히 여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원본을 황급히 회수했다. (복사본을 새로 주었다)
지금은 모두 합격해 세종에서 함께 지내는 후배들에게, 언젠가 카지노 게임가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읽어보기는 했는지) 물어봐야겠다.
무협지 속 카지노 게임들은 하나같이 가보처럼 전해 내려 온다. 그깟 책이 뭐라고? 싶을 수 있지만 카지노 게임 한 권만 만들어보면 그 소중함을 안다. 지금도 내 카지노 게임들은 세종 집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다. 누렇게 손때가 탄 카지노 게임들을 볼 때마다 20대 시절 책에 파묻혀 보낸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쉽게 얻은 자료라고 가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쉽게 얻은 카지노 게임 속에 합격을 1년 앞당겨줄 세계관 최고 비기가 담겨있을 수도 있다. 쉽게 얻었다고 결코 가벼이 여기지 말자.
크리스마스에 문득 카지노 게임를 꺼내 읽다 든 생각이다. 아무래도 무협지에 너무 빠져들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