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 박사
14화 요약
수아의 생일날, 경수는 선물을 준비하다가 K의 전화에 응답하지 못하고 결국 통화를 하게 된다.K는 과거 경수가 자신에게 했던 리얼리즘 논쟁을 문제 삼으며 경수를 몰아붙인다.압박을 받은 경수는 생일 모임을 빠져나가 공중전화박스에서 K와 통화하며 극심한 불안에 빠진다.통화 도중 경수는 결백을 주장하며 오열하고, 결국 정신이 붕괴된 듯 주저앉는다.수아와 시원이 경수를 따라가 위기에 처한 그를 구하고 겨우 지하철 선로 투신을 막아낸다.
15. 카지노 게임 박사
정년을 앞둔 Y교수의 문학 강의는 여름방학을 코앞에 두고서야 끝이 났다.그는 지난 학기를 끝으로 정년퇴임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작년에 새로 부임한 총장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석좌교수라는 타이틀을 달며 종신 교수가 되었다. 그 때문에K의 정교수 임용이 불투명해졌다. 내년 초 문창과 정교수 임용을 기대했던 K에게는 날벼락같은 소식이었다. 교내에서는 한동안 K와 Y 교수 사이가 불편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자신을 키워준 은사였지만 그 때문에 자신의 앞길이 막힌 셈이었다.
K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속으로는 깊은 절망과 좌절감에 빠졌다. 그리고 그 깊은 절망은 분노로 변했다. 그러던 중 예상치 못한 사건이 터졌다. 두 달 뒤, 한 여학생이 Y 교수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K는 Y교수의 종신교수 임명을 축하한다며, 그가 단골로 드나들던 조용한 바에 그를 데려갔다. 그곳에는 K를 은근히 흠모하던 여학생이 친구와 함께 자리를 잡고 있었다.술잔이 오가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얼굴이 상기된 Y교수는 여학생 쪽으로 향하던중 순간 중심을 잃은 듯 비틀거리더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여학생은 당황한듯 표정이 얼어붙었고, 주변 테이블의 시선이 그 장면을 흘끗 훑고 지나갔다.
"Y교수의 성추행을 고발합니다."
며칠 뒤, 교내 게시판엔 ‘익명의 고발자’가 남긴 Y교수의 성추행 폭로 글이 올라왔다.K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 글을 스크롤하다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잔잔히 커피를 들이켰다.결국 Y교수의 석좌교수 임용은 취소되었고, K는 정교수에 한 발짝 다가섰다.그해 가을학기, K는 ‘영미희곡’ 강의를 맡았다.첫 수업 작품으로K는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카지노 게임 박사』를 꺼내 들었다.강의실은 첫날부터 만석이었다, K의 목소리는 자만에 찬 카지노 게임의 독백을 따라 점점 고조되어 갔다.
“카지노 게임여, 이제 무엇을 탐구할지 결정하라. 네 배움의 깊이를 가늠해 보아야 하리라. 겉으론 성직자이나, 내 마음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머무네. 오, 감미로운 분석학이여, 네가 나를 사로잡았도다! 논쟁의 승리가 논리학의 목표라면, 이미 달성했으니 더 읽을 필요 없네. 카지노 게임의 지성에 걸맞은 더 위대한 주제를 찾으리라. 철학자 다음은 의사로다. 카지노 게임여, 의사가 되어라! 수많은 이를 구했지만, 내 처방은 기념되지 않았지. 영원히 살리고 죽은 자를 살린다 해도 시시하군. 의학이여, 작별이다! 법학은 부자들의 상속 문제, 내겐 맞지 않다. 신학은 인간의 죄와 죽음뿐인가? 신학이여, 안녕….”
K는 카지노 게임 박사의 독백을 멈추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자신에게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학생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 다시 독백을 이어나갔다.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인간, 모든 지식을 섭렵하여 전능한 존재가 되고자 했던 인간. 하지만 인간의 지식만으로는 신의 영역에 다다를 수 없음을 깨닫고 결국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비극적인 존재, 그가 바로 지식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에 사로잡혔던 카지노 게임 박사입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대가로 그는 마침내 마법을 부릴 수 있게 되었죠. 그는 모든 학문 중에서 오직 마술만이 자신의 지적 욕망을 충족시켜 줄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고귀한 능력으로 그가 행한 것이라고는 로마 교황과 이슬람 술탄을 방문하여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거나, 황제의 궁궐에서 기괴한 마술을 선보이며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정도였습니다. 악마와의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그는 깊은 후회에 휩싸였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K는 카지노 게임 박사의, 가장 고조되는 지점, 즉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의 파우스트의 독백을 들려주었다.
“오, 카지노 게임! 시계가 열한 시를 울리는구나.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단 한 시간뿐! 이대로라면 나는 영원한 저주에 빠지고 말리라. 멈추지 않는 천체여, 제발 멈추어 다오! 시간이 멈춰 서고, 자정이 오지 않도록! 숭고한 자연의 눈, 태양이여, 다시 한번 떠올라라! 시간을 멈춰 영원한 낮으로 만들거나, 아니 단 하루만이라도, 아니 단 한 시간만이라도 내게 더 허락된다면….”
"아~불쌍하고 가련한 카지노 게임."
"맞아, 그는 지옥으로 떨어질만했어."
강의실 곳곳에서 카지노 게임 박사를 향한 학생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들렸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카지노 게임 박사 이야기가원래는 독일의 전설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어. 오랫동안 독일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던 전설을 영국 작가 말로우가 극으로 완성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후 그의 작품이 유명해지자 독일의 대문호 괴테를 비롯해 다양한 예술가들에 의해 소설과 음악으로 재탄생되었어.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말로우보다 괴테의 작품이 훨씬 더 유명해.”
카지노 게임 이야기가 괴테가 아니라 크리스토퍼 말로우가 먼저였다고? 소진은 K의 강의를 듣기 전까지 카지노 게임의 작가가 괴테인 줄 알고 있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의 이면을 살펴보면 언제나 그 토대가 된 위대한 원전이 존재해.”
K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토퍼말로우의 《카지노 게임 박사》 역시 영문학사에서 중요한 작품이지만, 괴테의 《파우스트》가 가진 문학사적 무게감, 철학적 깊이, 그리고 후대에 미친 광범위한 영향력 때문에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졌지. 마치 원작 소설보다 영화가 더 유명해지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어.”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찼지만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오직 마이크를 통해 울려 퍼지는 K 교수의 열정적인 목소리만이 넓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K를 향한 수백 개의 시선은 다른 어느 교수의 강의 시간보다도 뜨겁게 타올랐다. 만약 그 자리에 소진이 서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마 그는 그 강렬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강의실을 뛰쳐 나가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K 교수는 마치 뜨거운 햇볕 아래서 일광욕을 즐기듯, 자신을 향한 학생들의 뜨거운 찬사를 여유롭게 만끽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