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일본 이화학무료 카지노 게임
1913년 6월 도쿄 츠키지의 한 레스토랑. 120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업가, 고위 관료, 지식인 등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이었다. 일본에서 가장 바쁜 이들이 모인 이유는 누군가의 강연을 듣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강연자가 나타나자 관객들은 일제히 환호를 보냈다. 당시 세계적 명성을 떨치던 과학자이자 사업가, 다카미네 조키치였다. 1854년생으로 메이지유신 직후 영국에서 유학했던 그의 이력은 화려했다. 유학 중 습득한 기술로 도쿄인조비료회사를 창업했고, 미국으로 가서 기존보다 500배 강력한 소화 효소인 디아스타제를 발견해 ‘다카디아스타제’라는 소화제를 출시했다. 또한 의학의 다양한 치료제로 쓰이는 아드레날린(에피네프린)도 세계 최초로 추출했다. 다카미네는 이러한 발견으로 다수의 특허를 냈고,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대부호가 되었다. 요즘 말로 하면 성공한 R&D 벤처사업가였던 셈이다.
이날 강연에서 다카미네는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한 마디로 “국민과학연구소를 만들자”라는 것이다. 단기간의 수익 창출에 연연하지 않는, 장기적 관점의 순수기초연구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본래 다카미네는 도쿄제국대학 공대를 졸업한 응용화학자다. 즉 순수과학보다는 기술창업으로 성공한 엔지니어였다. 그런데도 본인의 성공 경로와는 다른 방식의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다카미네처럼 유명한 석학이 이런 주장을 한 데에는 그만한 배경이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근대화 전략이 직면한 딜레마와 연관되었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이때 채택한 기본전략이 ‘따라잡기(catch-up)’다. 즉 서양의 발전 경로를 그대로, 빠르게 따라가서 근대화를 이룬다는 기획이다. 그래서 서양이 그러했듯 부국강병이 최우선 국가 정책이 되었다. 여기에는 서양에 파견한 유학생들, 선진 문물 수입에 앞장선 지식인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이 배워오고 번역한 지식과 기술은 근대 일본의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 이렇게 서구 사상으로 무장한 1세대 지식인들이 도쿄제국대학(1877년), 교토제국대학(1897년), 도호쿠제국대학(1907년) 등 교육 및 연구기관의 교수직을 맡았다. 이들의 지도를 통해 근대화를 이끌 엘리트들이 대거 양성될 수 있었다.
근대화 정책의 성과는 금방 나타났다. 반세기 만에 열강에 진입하여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달아 이기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승전국이 되었다. 이것은 산업혁명이 성숙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군수산업을 바탕으로 생산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제철과 기계공업 등을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고도화되었다.이러한 산업발전은 기업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전기시험소(1891년), 도쿄공업시험소(1900년), 철도대신관방연구소(1913년) 등을 설립해서 중화학공업화를 지원했다. 기업들은 이곳들을 통해 제조기술의 정확성과 품질 경쟁력을 높일 수 있었다.
하지만 한계도 점점 드러났다. 서양을 배워서 부국강병을 이루기는 했는데, 요즘 말로 킬러 콘텐츠나 와해성 기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었다. 게다가 다이쇼 시대 들어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자유분방한 사회 사조가 형성되었다. 그래서 서양 베끼기에 급급했던 메이지 시대에 비해 창조적 지식에 대한 수요도 함께 늘었다. 이러한 사정은 산업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구의 단순 모방을 넘어서는, 일본만의 독창적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요구가 강해졌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불황이 닥치면서 국가적 문제가 되었다. 1914년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자 일본은 영일동맹을 핑계로 참전했다. 열강의 다툼을 틈타 동양에서 세를 넓혀 보려는 목적이었다. 그러자 영국과 교전 중이던 독일이 대일본 수출을 끊어버렸는데, 수입의존도가 높았던 화학공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서 이참에 생산기술을 국산화하자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었다.
유럽과 미국에서도 새로운 개념의 연구소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전까지의 연구소는 산업기술의 지원 목적이 강했다. 예컨대 독일의 제국물리기술연구소는 전기와 조명업체들이 필요로 하는 정밀 측정과 기술표준의 확립을 수행했다. 반면 새로 생기는 연구소들은 물리학, 화학, 의학 등 과학의 기초 분야, 원천지식에 집중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미국의 록펠러연구소(1901년)와 카네기연구소(1902년), 독일의 카이저빌헬름협회(1911년) 등이 그랬다. 여기에는 연구와 강의를 병행하는 대학만으로는 과학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인식도 작용했다. 그래서 과학자들을 연구에만 전념시키는 연구소 설립 붐이 일어났다. 서양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 따라해보면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이런 유행을 놓칠 리 없었다. 일본에도 서양의 연구환경을 경험했던 과학자들은 많이 있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일본에도 기초과학 연구소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제기되었다.
다카미네의 국민과학연구소 제안도 이러한 흐름을 대변했다. 원천기술로 큰돈을 번 그는 미래 산업은 기계공업보다는 물리학과 화학의 새로운 지식이 좌우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일본의 산업혁명은 성공적이었으나, 서양에 우위를 점할 고유의 지식은 부족했다. 다카미네는 새로운 연구소를 세워 이 문제를 해결해야 산업발전이 지속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이다.
“공업은 그 면목을 일신했지만, 그것은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 선진국들이 수백 년간 고생하여 생각해낸 것을 그대로 수입한 것이다. …(중략)… 이는 우리나라 공업 발달에서 가장 유감스러운 일이며, 우리 국민성이 모방적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방품이다. 그래서 비록 그 제품이 정교하더라도 도저히 그 스승에게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모방무료 카지노 게임 동안 그들은 매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멈추지 않는다. 따라서 모방무료 카지노 게임 동안에는 항상 수동적임을 면할 수 없다.”
이렇듯 다카미네의 연구소 설립 주장은 논리정연했다. 다만 대부분 세상사가 그러하듯, 논리만으로 일이 되지는 않는다.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다카미네가 추정한 연구소 설립 자금은 1~2천만 엔 정도였다. 당시에 이는 해군 전함 1척을 건조하는 비용과 비슷했다. 이에 다카미네는 “전함은 오래 쓰면 폐기처분해야 하지만, 연구소는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를 압도하는 결과가 나온다”라며 연구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비전이 다카미네만의 것은 아니었다. 경제관료 출신으로 재계의 큰손이었던 시부사와 에이이치도 동참했다. 그는 도쿄증권거래소, 제일국립은행, 히토쓰바시대학, 제국호텔 등 500개가 넘는 기업 설립에 관여한 원로였다. 이런 경력으로 인해 오늘날 ‘일본 자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2024년 40년 만에 바뀐 1만 엔 지폐의 주인공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다카미네와는 1886년 도쿄인조비료회사를 창업하며 인연을 맺었다. 1913년 다카미네의 귀국에 맞춰 강연을 주선한 것도 그였다. 다카미네는 연구소 설립 자금 조달에 시부사와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제안을 받아들인 시부사와는 연구소 규정 및 예산 조사회를 만들어 구체적인 설립 계획을 논의했다. 다만 거액의 설립 자금은 역시 부담이었다. 그래서 시부사와는 이 계획을 국가사업으로 추진하고자 제국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했다.
결국 정부의 최고 실력자인 오쿠마 시게노부 총리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학계와 재계에서 시작된 연구소 설립 논의가 정계까지 확대된 셈이다. 오쿠마는 정치인 이전에 와세다대학을 설립한 교육행정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누구보다 계획의 취지를 잘 이해했고, 다카미네와 시부사와에게 큰 힘을 실어주었다. 그는 총리의 권한으로 주요 부처 장관, 학자, 기업가들을 모아 설립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조직이 연구소 설립의 제반 실무를 총괄하게 했다. 이로써 도쿄의 한 레스토랑에서 시작된 국민과학연구소 아이디어는 정부와 민간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17년 마침내 제국의회가 연구소 설립을 의결했다. 예산은 다카미네의 안보다 더 줄어든 800만 엔으로 정해졌다. 총예산의 절반을 정부가 부담하고, 나머지는 민간에서 조달하기로 했다. 미쓰이와 미쓰비시 같은 대기업들이 50만 엔이 넘는 기부금을 내놓았다. 여기에 매년 10만 엔의 황실 하사금까지 받기로 했다. 이런 운영 방식은 국민과학연구소가 모델로 삼았던, 독일의 카이저빌헬름협회와도 유사했다. 다만 예산 규모가 계획보다 줄자 연구 범위도 축소할 필요성이 생겼다. 그래서 다카미네를 비롯한 설립위원들은 원래의 국민과학연구소를 ‘국민화학연구소’로 바꾸는 방안을 고려했다. 기초과학 중에서도 화학은 산업과의 연관성이 크고, 설립위원도 대부분 화학자였기 때문에, 이 대안은 꽤 현실성이 있었다.
그런데 물리학자 나가오카 한타로가 합류하면서 변수가 생겼다. 그는 일본 최초의 물리학 박사인 야마카와 겐지로의 제자로서, 독일 유학 후 도쿄제국대학 교수직을 맡고 있었다. 특히 원자의 미시세계를 탐구하는 양자역학의 태동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당시 나가오카가 제안한 토성형 원자 모델은 최초의 현대적 원자 모델이라고 할 만한 이론이었다. 다만 역학적 불안정성이라는 결함 때문에중도 폐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제안하고 닐스 보어가 발전시킨 태양계 원자 모델이 공식화되는데, 이것과 토성형 모델의 유사성이 밝혀지면서 나가오카의 기여가 재평가되었다. 그는 또한 1939년 유카와 히데키를 노벨물리학상에 추천하여 수상하게 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이런 세계적 석학이 들어오기로 했으니 물리학부를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연구소의 이름은 물리학과 화학을 포함하는 ‘이화학연구소(理化学研究所)’로 결정되었다. 1대 소장은 근대 수학을 일본에 들여온 수학자이자 도쿄제국대학 총장과 문부성 장관을 지낸 기쿠치 다이로쿠가 맡았다. 오늘날 이화학연구소는 주로 일본어 줄임말 리켄(理研)으로 불리며, 일본의 기초과학을 진두지휘하는 국가 연구소의 위상을 갖고 있다. 물론 학계, 재계, 정계로부터 십시일반의 도움을 얻어 겨우 연구소를 만들었을 때만 해도 몰랐을 것이다. 훗날 이곳에서 일본의 첫 노벨상 수상자가 나올 것이고, 동양 최초로 주기율표의 새로운 원소를 발견할 것이며, 100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가게 될 것을 말이다. 그건 아직 먼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