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미국 프린스턴고등온라인 카지노 게임
1940년 10월, 미국 뉴저지주의 한 법정.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선서했다. 1932년 나치를 피해 독일을 떠난 그가 미국 시민권을 얻는 순간이었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20세기 과학의 상징이었던 그는 미국 이민법상 특수 자격자로서 입국할 수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오직 0.3%만 받는다는 ‘특별한 재능을 가진 외국인용 비자(EB-1A)’를 얻은 셈이다. 이것이 오늘날 아인슈타인 비자라고 불리는 이유다. 다만 그런 아인슈타인도 시민권 취득은 쉽지 않았다.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이 늘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은 아인슈타인을 몇 년 동안 감시‧도청하며 1,400페이지가 넘는 파일을 작성했다. 이러한 정치적 긴장 속에서 아인슈타인은 여러 해의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아인슈타인이 독일을 떠나자 당연하게도 많은 대학이 교수직을 제안했다. 강의든 연구든 안 해도 좋으니, 적만 두고 학교의 권위를 높여달라고 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선택은 이제 막 문을 연 미국의 프린스턴고등연구소였다. 이 연구소가 내세운 ‘무한한 학문의 자유’라는 철학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연구 말고는 해야 할 것들이 없었다.교수의 의무인 강의, 논문지도, 행정업무 등은 죄다 면제되었다. 그저 호기심이 생기고 탐구하고 싶은 주제가 있다면, 그걸 연구하는 것만으로 월급을 받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은 미국에 온 직후인 1933년 10월,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첫 번째 종신교수로 이직했다. 이 소식을 접한 프랑스 물리학자 폴 랑주뱅은 이렇게 평했다. “바티칸 궁이 로마에서 신세계로 옮겨온 것과 다름없다. 물리학의 교황이 미국으로 온 것이다. 이제 자연과학의 중심은 미국이 될 것이다.”
초창기 미국의 과학 발전은 주로 기부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미국인들은 세금으로 과학 연구를 지원한다는 인식이 희박했고, 개인 비용 또는 자선사업으로 하는 것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많은 연구기관이 부호들의 기부금으로 만들어졌다. ‘석유왕’ 존 D. 록펠러는 1890년 시카고대학(3,500만 달러)과 1901년 록펠러의학연구소(6,100만 달러)에 거액을 댔고, ‘철강왕’ 앤드루 카네기도 1902년 카네기연구소에 1,000만 달러를 투자했다. 이것은 19세기부터 국가가 과학을 육성하는 체제를 확립한 독일, 프랑스와는 대조적이었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도 이러한 기부 문화의 산물이었다. 1929년 뉴저지주 뉴어크의 사업가 남매, 루이스 뱀버거와 캐롤라인 뱀버거 펄드는 대공황 직전 운영하던 백화점을 매각했다. 이 기막힌 타이밍은 본인은 물론 미국 과학에 큰 행운이 되었다. 이들이 막대한 수익을 사회에 환원하려고 처음 떠올린 아이디어는 의과대학이었다. 유대인이었던 뱀버거 남매는 미국의 의과대학들이 유대인의 입학을 암묵적으로 제한한다고 생각했고, 인종 차별이 없는 학교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평생 사업만 해서 의과대학을 모른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의과대학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를 찾아갔다. 그가 바로 에이브러햄 플렉스너였다.
플렉스너는 교육개혁가이자 사상가로서 전국적 유명인사였다. 1910년 카네기재단의 의뢰를 받아 미국과 캐나다의 155개 의과대학을 점검하고 작성한 『플렉스너 보고서』가 결정적 계기였다. 엄격한 의사 선발과 과학적 연구방법의 도입을 강조한 이 보고서는 현대 의료 교육체계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꼽힌다. 또한 모교이자 미국 최초의 연구중심대학인 존스홉킨스대학을 모델로 삼아 기숙학교를 운영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플렉스너는 이러한 성과들을 바탕으로 플렉스너주의로 불리는 교육철학을 확립했다. 그것은 “의무는 없고 기회만 준다”로 요약된다. 즉 인간의 창의성은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나온다는 지론이다. 플렉스너의 사상은 당시 고등교육환경에서 일대 혁신으로 받아들여졌으니, 뱀버거 남매의 자문역으로 적격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플렉스너는 의과대학 설립에 부정적이었다. 그도 유대인이었지만, 유대인 차별을 없애자는 뱀버거의 주장에 별로 공감하지 않았다. 대학의 학생 선발 기준은 우수성 이외에 어떤 것도 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뉴어크는 의과대학에 필수인 좋은 병원도, 연구환경도 부족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3,000만 달러의 기부금을 상의하러 온 고객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의과대학이 아닌 연구소 설립을 역제안했다. 플렉스너는 오랫동안 대학의 교육개혁을 이끌었지만, 대학만으로는 고급 지식의 생산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았다. 대학의 역할을 보완하고 또 넘어서는 연구조직이 필요했다. 학생과 수업도 없고, 오직 연구자들만 모인 학문 공동체. 이미 충분한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난제에 매진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 플렉스너는 그것을 ‘순수연구의 성역’이라 불렀다.
플렉스너의 제안은 뱀버거 남매를 단숨에 사로잡았다. 그들은 의과대학 계획을 접고 더 과감하고 새로운 형태의 조직, 고등학술 연구소 설립에 나섰다. 1930년 5월 두 사람은 5백만 달러를 기탁하여 뉴저지주에 비영리 독립기관 설립을 신청했다. 다만 연구소 입지에는 이견이 있었다. 뱀버거 남매는 사업 근거지였던 뉴어크를 원했지만, 플렉스너는 그곳에는 연구자를 유인할 요소가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실제로 뉴어크에는 대학과 도서관 대신 페인트와 니스 공장만 가득했다. 플렉스너는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다가 뉴저지주의 또 다른 도시인 프린스턴을 낙점했다. 프린스턴은 동부의 대도시이자 학문 중심지인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와 가까웠다. 그리고 세계 최고의 수학부를 갖춘 프린스턴대학도 있었다. 최고의 대학 옆에 최고의 연구소를 세운다는, 학문 세계의 가장 이상적인 목표였던 셈이다.
초대 소장을 맡은 플렉스너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요소는 제도와 문화였다. 그에 따르면 연구소는 이러해야 했다. “작고 유연해야 하며, 조용하되 수도원처럼 고립되어서는 안 되고, 누구도 아이디어를 두려워하지 않는 공간” 이를 구현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했다. 우선 연구자는 연구 이외의 모든 의무에서 면제되어야 한다. 또한 실용적 성과나 연구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지적 탐구에만 몰입해야 한다. 그래서 플렉스너는 설립 보고서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이 연구소는 학위 수여 기관이 아니다. 교육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 곳이다. 이미 충분한 수준의 학문을 이룬 이들이 그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장소다.”
그런데 이것은 주류 학계의 흐름과는 배치되었다. 당시 미국의 대학은 실용적 지식, 대규모 강의, 산학협력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플렉스너는 이러한 경향이 오히려 학문의 본질에서 멀어지는, ‘지적 긴장의 상실’이라며 우려했다. 그래서 역으로 갔다. 당장 산업에 응용할 지식보다는, 학문적 모험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방향으로. 덕분에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서는 대학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연구의 자유가 가능했다. 강의는 물론 논문 심사, 학사 운영, 시험 채점 등 잡다한 행정업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확보된 시간은 온전히 연구에만 쓰였다. 연구소는 전일제로 운영되어서 외부 강의나 겸직은 제한되었다. 연구자들은 내부 연구에만 전념해야 했다. 물론 이러한 활동은 연구소에서 지급하는 충분한 연구비로 뒷받침되었다.
그 무렵 대학의 교수들은 정부, 재단, 기업 등에서 주는 연구비를 확보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려면 수시로 관계자들을 만나 자기 연구가 갖는 가치를 설명하고 또 설득해야 했다. 연구비는 한정되어 있는데 받으려는 교수들은 많았으니, 경쟁이 과열되었음은 물론이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에서는 이런 과정이 필요 없었다. 플렉스너의 철학은 재정적 측면에서도 확고했다. 우수한 연구자들에게는 풍족한 급여와 금전적 자유를 보장했다. 그래야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첫 연봉 협상에서 3천 달러를 적어낸 아인슈타인에게, “그 정도로 생활이 되겠냐?”며 1만 달러를 지급한 일화는 특히 유명하다. 초기에는 뱀버거 남매의 자금으로 운영되었지만, 이후 록펠러재단, 카네기재단 등의 후원도 받게 되었다. 이런 탄탄한 재정 덕분에 안정적인 연구가 가능했다. 물론 과학에서 돈이 많다고 다 좋은 성과가 나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연구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필수 조건인 것은 확실하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독특한 운영방식은 단지 조직관리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지식은 어떻게 진보하는가?’라는 철학적 질문과 연결되어 있었다. 플렉스너는 1937년 발표한 에세이 「쓸모없는 지식의 쓸모」에서 이렇게 적었다. “가장 위대한 발견들은 당장은 쓸모없어 보이는 호기심 기반의 탐구에서 나왔다. 연구자는 쓸모를 증명하려 하지 않아야 하며, 오히려 그 쓸모를 모르는 채로 탐구에 몰입해야 한다.” 일례로 마이클 패러데이의 전자기학은 실용성과 무관한 순수 이론으로 시작되었지만, 후일 전화와 라디오를 발명했다. 그리고 고드프리 해럴드 하디의 정수론은 컴퓨터 암호기술의 기초가 되었다. 이렇듯 ‘쓸모없는 지식’이야말로 오랜 시간을 지나 가장 근본적인 쓸모를 발휘한다는 믿음이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이러한 철학에 따라 제일 먼저 구성된 조직이 수학부였다. 1933년 오스왈드 베블런이 주도하여 수학과 이론물리학의 세계적 석학들이 초빙되었다.1935년에는 인문학부와 정치경제학부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자연과학부가 개설되었다. 이렇듯 연구분야는 늘었지만, 조직은 소규모로 유지되었다. 일단 학생과 교육 업무가 없어서 행정 인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수진도 1940년대까지 10명도 되지 않았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종신교수직은 세계 최고의 권위자만 가질 수 있는 직책으로 그 수가 엄격히 제한되었다. 여기에 전 세계에서 선발된 수십 명의 방문연구원도 있었다. 이들은 국적과 소속에 상관없이 학문적 역량만으로 초청되었고, 머무는 동안 순수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받았다. 이렇게 모인 연구자들의 자율적 토론과 상호 교류를 중심으로 창의적 연구가 이루어졌다. 바로 옆의 프린스턴대학도 중요한 협력 파트너였다. 흔히 프린스턴고등연구소가 프린스턴대학의 부설 연구기관이라는 오해가 있지만, 두 기관은 예나 지금이나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1939년 연구소 본관인 펄드 홀이 완공될 때까지, 프린스턴대학 수학부에 몇 년간 세 들어 살았을 뿐이다.
요컨대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지적 실험장이라고 할 만했다. 자선과 교육이 결합한 미국 과학의 전통에, 유럽식 학문 자유의 이상이 이식된, 아주 독특한 공간이었다. 초창기 실험적으로 여겨졌던 이러한 시도는 오래지 않아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정적 계기는 역시 물리학의 교황, 아인슈타인의 합류였다.
1930년대 프린스턴에는 약 5천 명이 살고 있었다. 뉴욕에는 7백만 명, 바로 옆 트렌턴도 12만 명이 살던 시절이었다. 그러니까 프린스턴은 소도시도 아닌 마을에 가까웠다. 이곳에 자리 잡은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국가의 지원을 받지도 않았고, 이론연구 중심이라 시설 규모도 작았다. 그럼에도 학문의 자유라는 이상에 매료된 전 세계의 석학들이 연구하러 왔다. 그중에서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존 폰 노이만, 줄리우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상징적이다. 세 사람은 유대인 과학자로서 나치 반대 운동의 최전선에 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 20세기 세계사와 과학사를 이 세 사람 없이 쓰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 이들이 함께 있었다는 것만으로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1933년 합류한 아인슈타인은 당대의 슈퍼스타였다. 그의 미국행이 과학계는 물론 온 세계의 톱뉴스가 되었던 이유다. 다만 프린스턴에서는 주류 물리학계와는 대립각을 세우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그는 당시 물리학을 석권한 양자역학에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1927년 제5차 솔베이 회의에서 닐스 보어를 위시한 코펜하겐 학파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고 일갈한 후, 아인슈타인에게 양자역학은 일종의 강박관념이 되었다.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계승자이자 물리학에서 ‘자연법칙의 보편성’ 계보의 정점이었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비결정론적 함의를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935년 연구소 동료인 보리스 포돌스키, 네이선 로젠과 발표한 논문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4페이지에 불과한 이 논문은 흔히 ‘EPR(세 저자명의 머리글자를 합친 것) 역설’이라고 불린다. EPR 역설은 양자역학의 이론적 결함을 논증하는 사고실험이었다. 물리학의 주류에 반기를 든 이 논문은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아인슈타인이 실수했다는 반론의 편지가 프린스턴으로 쇄도했다. 하지만 정확히 뭘 실수했는지 지적한 사람은 없었으니, 아인슈타인에게는 아무런 타격이 되지 않았다. 다만 양자 얽힘의 문제를 비판한 EPR 역설은 1960년대 벨의 부등식을 거쳐 오늘날 양자정보이론의 기초가 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즉 양자역학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되려 그것의 현대화를 촉진한, ‘EPR 역설의 역설’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을 연구했다. 이름부터 웅장하기 짝이 없는 이 이론은 지금까지 인류가 알아낸 모든 자연의 힘을 하나의 수학적 틀로 통합하려는 시도였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구성하는 여러 힘이나 입자를 일관된 원리로 이해할 수 있음을 보이고 싶었다. 물론 그에 대한 증거는 부족했다. 동시대 학자들이 양자장 이론, 핵물리학, 입자이론 등으로 분화할 때도, 아인슈타인은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말년의 그를 “시대에 뒤떨어진 거인”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학문적 자유의 원칙에 따라 어떠한 제약도 가하지 않았다. 비주류의 고독함을 감수하면서도 아인슈타인은 1955년 타계하는 순간까지 통일장 이론에 매진했다.
헝가리 출신의 존 폰 노이만은 프린스턴고등연구소를 대표한 또 한 명의 천재였다. 1930년대 중반 연구소에 합류한 그는 수학, 물리학, 경제학, 컴퓨터과학을 아우르는 다학제 연구로 명성을 날렸다. 그러니까 서양 지성사의 시조로서 ‘학문의 왕’이라 불렸던 아리스토텔레스와도 비슷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의 체계가 정립되지 않았던 고대의 인물이라지만, 지식의 전문화가 진전된 20세기에 한 명이 여러 학문을 소화하는 작업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런 이유에서 영국의 저널리스트 노먼 맥레이는 폰 노이만을 ‘20세기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불렀다.
폰 노이만의 천재적 면모를 한번 보자. 일단 수학에서는 집합론, 함수해석학, 연산자 대수 등에서 선구적 업적을 남겼다. 물리학에서는 맨해튼 계획에 참여하여 플루토늄 폭탄의 기폭장치인 폭축렌즈를 개발했다. 이론적 통찰도 뛰어나서 양자역학의 수학적 해석에도 기여했다. 특히 1932년에 발표한 『양자역학의 수학적 기초』는 에르빈 슈뢰딩거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라는 두 대가의 이론을 엄밀한 수학적 틀로 정식화한 획기적 저작이었다. 또 경제학에서는 오스카르 모르겐슈테른과 함께 게임이론의 창시자로 불린다. 1944년 발표한 『게임이론과 경제행동』은 냉전 시대의 전략이론에 도움을 주었음은 물론, 인공지능과 정보과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들이 창안한 게임이론은 현대경제학의 핵심 주제이며, 이걸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만 10명이 넘는다.
그러나 폰 노이만의 가장 혁신적인 업적은 컴퓨터과학의 창시였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그는 플루토늄 폭탄이라는 난제와 씨름하며 계산의 자동화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프린스턴고등연구소로 돌아와 프로그램 내장식 만능 컴퓨터 개발 프로젝트를 제안하게 된다. 그런데 이 제안은 연구소 교수회의 반발에 부딪혔다. 순수이론연구의 상아탑이었던 이 연구소에는 기계란 것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구에 쓰이는 장비(?)라고 해봐야 분필과 칠판이 고작이었다. 그나마 수학부 교수들은 컴퓨터 개발이 수학의 진보와 연관이 있음을 인정했지만, 인문학부 교수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결국 2대 소장 프랭크 에이델로트가 중재에 나섰고, 폰 노이만은 10만 달러의 연구비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이 금액은 일부에 불과했다. 육군, 해군, 원자력위원회 등 여러 정부 기구가 앞다퉈 폰 노이만을 지원했기 때문이다. 교수들과 달리 이 프로젝트의 혁신성을 알아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폰 노이만은 교수들의 반발을 피해 펄드 홀의 지하에 숨어서 컴퓨터를 조립해야 했다.
1952년 폰 노이만은 세계 최초의 저장 프로그램 방식 컴퓨터를 완성했다. 이 컴퓨터는 이후 ‘폰 노이만 구조’라 불리는 현대 디지털 컴퓨터의 기본 설계를 제시하게 된다. 성능도 어마어마했는데, 수학과 물리학의 복잡한 계산은 물론, 기상 예측과 별의 구조 규명에도 이용되었다. 이름 그대로 만능이었던 셈이다. 다만 순수학문의 천국인 프린스턴에서 이 기계는 끝내 환영받지 못했다. 대부분의 수학 교수가 “그렇게까지 많은 계산을 할 필요가 없다”라며 외면했기 때문이다. 외부에서는 돈을 내고서라도 컴퓨터를 쓰겠다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교수들은 신성한 연구소에 그런 돈벌이를 허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폰 노이만 사후에 이 컴퓨터는 철거되었고, 스미소니언연구소로 옮겨 가 일반인에게 전시되는 신세가 되었다.
폰 노이만은 동시대의 또 다른 천재였던 아인슈타인과 여러모로 비교된다. 아인슈타인이 물리학의 궁극을 탐구했다면, 폰 노이만은 여러 학문을 넘나들며 천재성을 발휘했다. 아인슈타인은 학문적 신념을 지키고자 비주류의 고독한 삶도 불사했지만, 폰 노이만은 파티를 즐기고 동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호인이었다. 하다못해 둘은 라이프 스타일도 극명히 달랐는데, 아인슈타인이 자전거로 프린스턴을 유유자적 다녔다면, 폰 노이만은 명품 정장을 즐겨 입고 페라리의 스포츠카를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오펜하이머는 1945년 맨해튼 계획을 성공시키며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모든 미국인이 그를 알았고,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이끈 천재로 존경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명성은 과학의 고위 관료로서 얻은 것이었다.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은 갈수록 희미해져 갔다. 실제로 그는 35개나 되는 정부 위원회의 위원이었지만, 1943년부터 1953년까지 별 영향력이 없는 논문 5편을 쓰는 데 그쳤다.
그런 오펜하이머에게 프린스턴은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되었다. 1947년 그는 3대 소장으로 임명되어 1966년까지 프린스턴고등연구소를 이끌었다. 오펜하이머는 전쟁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도 로스앨러모스연구소를 최고의 두뇌들이 자유롭게 협업하는 공동체로 만든 전력이 있었다. 이러한 과학 관리자의 리더십을 프린스턴으로 그대로 가지고 왔다. 오펜하이머는 프린스턴고등연구소를 ‘지식인의 호텔’이라고 불렀다. 그러니까 연구자들이 잡다한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학문 삼매경에만 몰입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는 소장으로서 이 비유를 그대로 실천했다. 이에 물리학자, 수학자, 인문학자들이 수평적으로 토론하고 공동연구하는 문화를 적극 장려했다.
오펜하이머가 재임한 19년 동안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양자장론과 입자물리학의 세계적 중심지로 성장했다. 뛰어난 스승이기도 했던 그는 프리먼 다이슨, 양전닝, 리정다오 같은 신성들을 발굴하고 키워냈다. 그러자 유럽에서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성공 모델을 수입하려는 움직임도 생겨났다. 플렉스너가 최초에 도입한 학문적 자유의 본산이 유럽이었음을 고려해보면, 수십 년 만에 역수출이 이루어진 셈이다. 1958년 오펜하이머는 수학자 레옹 모차네를 도와 프랑스 고등과학연구소 설립에 참여했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가 유럽의 과학자를 데려와 성장했다면, 이 연구소는 반대로 프랑스 과학자들이 미국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여기에 프린스턴고등연구소로부터 배운 운영 방식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오펜하이머는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학자로서 명예에 큰 손상을 입었다. 1954년 미국 원자력위원회가 과거의 사회주의 이력을 문제 삼아 보안 인가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정부 관련 일은 두 번 다시 맡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오펜하이머는 자신의 영예가 끝없이 추락하는 와중에도 연구소의 학문적 독립성은 지키고자 했다. 그래서 육군의 군사 프로젝트와는 거리를 두었고, 쿠르트 괴델처럼 매카시즘에 반발하는예민한 연구원들을 보호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정치적 논란에 휘말리지 않고, 학문적 명성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역사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눈에 띈다. 그것은 연구소를 대표한 석학들이 대부분 유럽 출신의 유대인 과학자였다는 점이다. 실제로 초창기부터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유럽의 전체주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지적 난민’들의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프린스턴고등연구소의 설립 자체가 유대인과 무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창립자 뱀버거 남매, 초대 소장 플렉스너가 모두 유대인이었다. 물론 같은 혈통이라는 1차원적 이유에서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다. 플렉스너는 유대인 이전에 인본주의자였고, 학자적 양심에 따라 피난에 나선 학자들의 망명을 돕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수학부 주임 교수 베블런과 함께 ‘추방된 독일 학자를 위한 긴급위원회’ 등의 활동에 깊이 개입했다.
그러다 보니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유럽 학문의 전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공간이 되었다. 아인슈타인, 폰 노이만, 오펜하이머는 물론, 괴델, 바일, 파노프스키 등 수많은 유럽 출신 석학들이 프린스턴에 모여들었다. 이들덕분에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과거 유럽의 대학들이 그랬듯 학문적 이상향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플렉스너는 이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것이야말로 문명이고 문화다. 구대륙에서 쫓겨난 위대한 사상가들이 신대륙에서 새출발하도록 허용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이 가진 진정한 힘이다.”
이로써 미국은 세계 지성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올랐다. 즉 프린스턴에 모인 학자들은 단순한 피난민이 아니라, 미국의 과학을 재설계한 주역이었다. 193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유럽에 비해 이론과학 분야에서 한참 뒤처졌다고 평가되었다. 그러나 프린스턴고등연구소를 비롯한 연구기관들의 등장은 이러한 상황을 뒤바꾸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이전이 아니라, 철학적 중심축의 변화였다. 과거 유럽의 대학이 ‘이념적 계몽’에 집중했다면, 프린스턴고등연구소는 그것을 ‘제도화된 실험’으로 전환했다. 학문 간 장벽을 허무는 연구문화, 과학자들의 자율성, 순수학문에 대한 적극적 투자 등은 모두 프린스턴고등연구소로부터 촉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기술 강국 미국은 그 결과로 출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