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 때의 일이다. 늘 조용하던 학과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 일이 생겼다. 외부에서 날아든 어떤 제안 때문이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여권의 유력 정치인이 “모교에서 한 학기 정도 강의하고 싶다”라는뜻을 전해온것이다. 유명인이 강의한다는데 좋은 일 아니냐고?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정부여당은 계속되는 실정으로 많은 비판을 받고 있었다. 게다가 강의를 한다던 정치인은 국무총리까지 한 실세 중의 실세였는데, 불미스러운 일로 사퇴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30대 때부터 평생 정치만 한 카지노 게임이라 학문 경력이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교수님들도 고민이었을 것이다. 제안을 받자니 걸리는 부분이 많았고, 그렇다고 안 받자니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이 사실은 대학원생들에게도 알려졌다. 정권에 비판적이었던 대학원생들의 반응은 냉소적이었다. 모 선배는 이렇게 비아냥댔다. “강의를 들어야 할 카지노 게임이 오히려 강의를 하겠다고?” 정말 강의가 개설되면 “000은 부끄러운 줄 알라”라는 실명 비판 대자보를 붙이겠다는 카지노 게임도 있었다. 결국 결론은 이렇게 났다. 한 학기 강의 대신 1회 강연을 하는 것으로. 물론 강연을 반기는 대학원생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강연을 들으러 갔다. 일국의 국무총리까지 한 카지노 게임이니, 뭔가 들을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내 전공이 정치사회학이라는 이유도 있었다. 자료만으로 알기 어려운, 실제 정책 결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궁금했달까.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1시간을 넘는 강연이었지만, 아무런 인사이트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부분이 자기 자랑이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부하나 참모들 이야기를 잘 안 들을 카지노 게임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이와 반대되는 경험도 있었다. 첫 학기가 끝난 겨울방학이었다. 모 학회에서 대학원생을 위한 이론 특강을 연다는 소식을 접했다. 대학원 오면서 전공을 바꾼 나로서는 반가운 기획이었다. 여러 주제 중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이 눈에 띄었다. 이건 딱 나를 위한 코스로구나. 그래서 거금 10만 원을 수강료로 내고 신청했다. 강의를 맡은 분은 교수가 아닌 비정규 시간강사였다. 강사 소개를 보니 이렇다 할 경력도 없었다. 그런데 선배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따르면 엄청난 분이었다. 교수를 하고도 남을 사람이지만, 자기가 싫어서 안 한다는 것이었다. 전공이 하버마스 이론인데, 하버마스가 극찬한 권위자라고도 했다. 무슨 무협지에 나오는 절대 무공의 은둔 고수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반신반의했다. 세상에 그런 카지노 게임이 있을 수 있나?
강의를 들어보니, 정말 세상에 그런 카지노 게임이 있었다. 그만큼 내용이 풍부하고 알찼다. 그리고 강연한 교수님(나는 이분이야말로 진정한 교수라고 생각한다)의 해박한 지식과 정교한 논리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강의 내내 나는 가장 많은 질문을 한 수강생 중 하나였다. 사실 핀트를 한참 빗나간 질문도 여러 개 했는데, 그분은 그 모든 뻘질문에죄다 진지하게 답해주셨다. 그때만 해도 하버마스를 논문 주제로 삼아 볼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이분이 펼치는 강의무쌍에 압도되어서 접었다. 이건 나 따위가 논문을 쓸 수 있는 주제가 아니구나 싶어서. 카지노 게임도 십수 년이 흐른 지금 내가 브런치에서 하버마스로 썰을 풀 수 있는 건, 다 이분 덕이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체득한 진리가 있다. 신분이나 지위를 앞세우는 카지노 게임일수록, 실력은 별 볼 일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이것은 대학원뿐만 아니라 회사에서도 수차례 입증된 경험칙이다. 이메일의 서명란에 직위, 학위, 경력을 다닥다닥 써놓은 카지노 게임이, 정작 메일의 문장은 뭔소리인지 모르게 쓰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콜로키움이나 세미나의 초청 연사도 마찬가지다. 만약 발표의 서두부터 자기가 뭐고 무슨 일을 해왔는지 읊는다면, 그 강연은 더 안 들어도 된다. 어차피 마지막까지 자기 자랑일 것이므로. 나는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허세롭고 관종스러운 쭉정이들은 구분할 수 있다.
뒤늦게 작가 일을 해보니, 이 바닥은 더하다. 회사(연구소)와 달리 출판업은 작가의 셀프 PR이 수익을 직접 좌우하기 때문에 그런 듯하다. 그래서 갖가지 있어 보이는 직위와 그럴듯한 포지션으로 자신을 카지노 게임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그중 가장 웃긴다고 생각하는 표현이 ‘멘토’다. 멘토라는 개념에는 존경과 신뢰의 함의가 들어 있다. 따라서 자신이 규정하면 - “나는 당신의 멘토입니다” - 어색하고 우스꽝스럽다. 타인이 지식과 경험을 인정해주면서 객관적으로 지칭해야 - “당신은 나의 멘토입니다” - 의미가 산다. 즉 이걸 자칭하면 과시적인 자화자찬이 될 뿐이다. 자신을 리더나 혁신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저자 소개에 멘토라고 써놓는 작가들이 많다.
몇 년 동안 몇백 권, 몇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하는 작가들도 마찬가지다. 책을 많이 읽었다는 사실은, 그 책의 서평들로 모조리 증명하지 않는 한, 독서 목록 자체와 동일시될 수 없다. 그 독서를 바탕으로 사유를 전개해서 쓴 ‘글’로써만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문장은 허접하고 필력은 얄팍한데, 저자 소개에는 그간 읽은 고전과 양서를 줄줄 늘어놓는 작가를 어떻게 믿나. 나는 오히려 작가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다”라고 하는 게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독자들의 기대치가 낮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내공과 실력보다는, 그럴듯한 카지노 게임으로 어필하려는 경우가 많다. 얼마 전 겪은 일이다. 어떤 글을 읽었는데, 저자 소개에 ‘교수’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교수님 치고는 사유가 일천하고 필력은 처참했다. 그래서 귀차니즘을 무릅쓰고 검색을 해보았다. 유명 대학 교수라는데, 게다가 이과도 아닌 문과인데, 이 정도 실력으로 교수가 될 수 있나? 알고 보니 정교수가 아닌 겸임교수였다. 대학과 계약을 맺고 일정 기간 강의를 한다는 점에서는 겸임교수도 교수가 맞다. 하지만 아카데미의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면, 두 포지션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겸임교수는 박사학위가 필수도 아니고, 연구실적보다는 실무경험을 근거로 주는 자리다. 그러다 보니 좀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겸임교수는 ‘명함용 타이틀’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반면 정교수는 박사학위는 기본이고, SCI 논문 수와 H-index와 피인용 지수 등 다각도로 평가되는 실적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특히 요즘 같은 학력 인플레 시대에는 소위 NSC(네이처, 사이언스, 셀) 논문이 있어도 교수 임용을 장담하기 어렵다. 그런데 이 차이를 겸임이라는 두 글자를 생략함으로써 퉁친다? 저자로서는 독자가 두 글자나 더 읽어야 하는 피로감을 줄여주려는 배려였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보기에는 다분히 다른 목적이 있는, 의도적인 생략 같다.
그래서 이 바닥을 보면 현타가 밀려온다. 이제 책 한 권 낸 초짜 주제에 건방진 생각일까? 가끔 생각한다. 그럼 나는 뭘까. 작가로서 나를 어떻게 PR하면 좋을까. 생각해보면 정말 PR을 할 껀수가 없다. 나는 교수는 꿈도 꾸어본 적 없다. 박사학위 역시 근처에도 못 가봤다. 이렇다 할 독보적인 커리어가 있지도 않다. 그런 나를 작가로서 규정해야 한다면, 나는 면도사이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장인 “어느 면도사에게나 철학은 있다”의 그 면도사. 나는 매일 한 종류의 칼로, 늘 같은 각도와 힘의 세기로 수염을 밀어서 결국 철학이 생겨나버린, 그런 면도사 같은 작가이고 싶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내 글에만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심술궂은 눈으로 남의 글이나 살피고 있으니, 어쩌면 처음부터 틀린 바람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