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에드워드 윌슨, 한강, 아리스티데스
1.
얼마 전 연금개혁을 보며 조금은 씁쓸해졌다.
'옳은 선택을 하면서 소수가 되기 vs. 틀린 선택을 하면서 다수에 남기.'
이 둘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는 뭘까를 생각한다.
한 가지 관점은 '카지노 가입 쿠폰'이다. 카지노 가입 쿠폰은 위험 및 안전과 결부돼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가치판단과 그것의 토대가 되는 가치관을 대쪽같이 주장하는 것은 이제 위험한 일이 되어버렸다. 그보다는, 내가 속한 집단에서 배제되거나 미움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더 앞서기 때문에 집단에 동조하는 것이 비교적안전한 일이 된다. 정치 생명을 길게 가져가려면 개개인의 소신 발언은 고이 넣어두고 당론을 따라야 한달까. 다수가 곧 정의가 되기 쉬운 다수결의 사회에 정말 옳고 그름을 논하기가 점점 어려워진 건 아닐는지.다수결은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 아니라 충분조건인데. 더구나 민주주의는 목적 그 자체가 아니라, 집단의 카지노 가입 쿠폰을 가능케 하는 '옳은' 의사결정을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인데.
안전해 보인다는 의미에서 집단에 동조함으로써 나름대로 카지노 가입 쿠폰 가능성을 높이려는 이 대응책은 자못 자연스러워 보인다. 문제는 이 카지노 가입 쿠폰이 사실 집단 전체의 카지노 가입 쿠폰이 아니라 집단 내 특정 개체/소집단의 카지노 가입 쿠폰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2.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으로 유명한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 존재의 의미에서 개체 단위와 집단 단위의 자연 선택(진화)를 구분해서 설명하면서, 다수준 선택으로 진화해온 우리 인간을 조명한다.
"집단 내에서는 이기적인 개인이 이타적인 개인을 이기지만, 이타주의자들의 집단은 이기적인 개인들의 집단을 이긴다. (중략) 개체 선택은 죄악을 부추긴 반면, 집단 선택은 미덕을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금개혁이나 교육정책을 보면, 586으로 대표되는 현 기성세대가 미래 세대나 전체 집단의 생존을 진정 고려하고 있는가 싶다. 우리나라 자체의 생존률을 높이는 선택보다는 자기네의 생존률만을 높이려는 것 같다. 이기적인 개인이 이타적인 개인을 이기는 것은 막을 수가 없다. 대국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영웅은 위기의 시대에 나타나서 집단 다수가 꺼려하거나 때론 반발에 부딪히는 일들, 가령 도전이나 희생 따위의 영웅적 행위를 하고 죽어 유전자는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지지만(이타적 개인의 패배), 영웅이 행했던 미덕은 그가 속한 집단의 가치가 되어 집단의 생존률을 높여준다(이타적 집단의 승리). 이타적인 미덕은 집단 간 경쟁에서 승리하게 하고 마침내 그 개체는 영웅의 칭호를 얻게 된다.
영웅은 소수이고, 위기의 시대를 살며, 위험을 감수한다.
범부는 다수이고, 평화의 시대를 살며, 안전을 추구한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영웅인가 범부인가.
3.
'삶은 곧 고통이다.' 라는 명제에 대체로 동의하는 편이지만, 부모가 되기로 선택한 순간부터는 조금 더 신중해진다. 자식을 낳기로 결정할 때, 고통을 주기 위해 삶을 주었던 것은 아닐테니. 그런 점에서 부모됨의 여러 원칙 중 하나는 '삶에 대한 긍정'이라고 생각한다.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어도 그래도 살만한 가치를 찾는 것,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부모가 되고 가정을 만들면서부터는 더 이상 내 삶도 이기적인 개인으로만 머물지 않고 이타적인 집단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 세대만 생각하지 않고 미래 세대도 생각하게 된다.
내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생존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범부가 될지, 영웅이 될지 아직 모른다. 안전하게 있기를 바라면서도 또 자기만의 길을 찾기를 바라는 양가적인 마음이 들겠지. 아무쪼록 "이런 세상에 왜 부모님은 나를 낳았냐"는 생각이 언젠가 들더라도 자기 삶을 긍정하고 굳세게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지금 내게 보여주는 방긋 웃음을 오래오래 간직하길. 아이에게 여름철 시원한 수박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지 않냐는 남편의 말에 끄덕인 한강 작가의 일화처럼 삶의 긍정은 아주 사소한 것들로도 가능하다.
출생률이 여전히 0.7명대다. 아이를 낳지 않는 선택이 개인 개체로서는 카지노 가입 쿠폰률을 높이는 방향일 것이다. 아무렴, 안그래도 먹고살기 바빠 죽겠는데, 이기적인 개인이 이타적인 개인을 이기는 건 막을 수가 없다. 다만 우리에게 집단의 생존을 가능케하는 미덕이 남아있을까, 영웅이 병신 취급당하지는 않을까, 우리가 영웅의 출현을 환영할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어야겠다.
(번외)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中 영웅 '아리스티데스'에 관한 일화 소개
아리스티데스는 아리스티데스가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물었으나, 투표자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면서 '난 그가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어디서든 그를 공명정대하고 정의로운사람이라고 하는 얘기를 듣는게 짜증이 났소"라는 이유를 댔다고 한다.
[내용]
페르시아 전쟁이 발발하자, 아리스티데스는 밀티아데스를 보좌하여 활약하였고, 마라톤 전투가 끝난 이후에는 아르콘으로 뽑혔다. 사람들은 아리스티데스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존경했는데,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면서도 가장 정의롭다고 하여 '왕자다운 사람', '신과 같은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런 그가 훗날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된 것은 테미스토클레스가 나쁜 소문을 민중들 사이에 퍼뜨렸기 때문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아리스티데스가 모든 사건을 다 맡아 법정이 필요없게 만들었다며 사실상 아테네의 왕이나 다름 없이 행동한다는 소문을 만들어냈다. 선동된 민중들은 결국 아리스티데스에 대한 도편 투표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도편에다가 추방할 사람의 이름을 적고 있었는데, 글자를 모르는 시골 사람 하나가 아리스티데스에게 와서 아리스티데스라는 이름을 좀 써달라며 자기의 도편을 내밀었다. 아리스티데스는 깜짝 놀라며, 그 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해를 끼쳤느냐고 물었다.그러자 그 시골 사람은, "그런 일은 없지요.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모르는걸요. 하지만 어디서나 정의의 사람이라고 떠들기 때문에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러오"하고 대답하였다.이 말을 들은 아리스티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의 이름을 도편에 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