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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그리 Mar 23. 2025

과연 카지노 게임 몰랐을까

영화 <카지노 게임 모른다 리뷰

고레에다의 영화답게 현대사회에 소외된 이들의 시선을 잔잔하게 담았다. 차분하게 스크린을 통해 그들의 시선을 관객들에게 관조시킨다. 현실에서 과연 있을법한 일인가 생각이 들 정도의 끔찍한 이 실화의 사건이 그만의 특유의 시선으로 관객들에게 꽤 부담되지 않게다가온다. 그리고 각자에게 생각의 여지를 준다.

이 영화는 흑백논리적 대결구도가 없다. 천사도 없고, 악당도 없다. 권선징악의 결론도출도 없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영화에서 감독의 의도는 우리에게 어떤 해결책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해결책은 영화의 제목처럼 ‘카지노 게임 모른다’. 카지노 게임 알고 싶지 않아 하는 이 불편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그만의 방식으로 ‘그저’ 사람들에게 알릴 뿐이다. 한번 더 생각하고되풀이되지 않도록. 알리는 자체가 감독에게도 큰 용기가 필요했을 터.

흑과 백이 없는 회색 잿빛의 하늘.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다. 기쁜 일도, 안 좋은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냥 보통의 나날들. 이 카지노 게임는 이 잿빛의 배경 속에서 아이들이 바라보는 시선을 그대로 카메라에 담는다. 작위적인 느낌이 들만큼 감독은 아이들의 시선에 그 어떤 방해도 하지 않는다. 그마저 그들에겐 상처일 수도 있기에. 이 독특한 전개가 공통점을 가진 외로운 현대인과 연결고리를 만든다.

원래 영화는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현실이 반영됐다고는 하나 영화는 어떻게든 허구일 뿐이다. 그냥 예술작품일 뿐이다. 하지만 이 논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영화만이 가진 카메라의 구도와 시선이다. 아이들이 순간 가지는 복잡 미묘한 감정의 공유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관객 개개인의 삶으로 투영시킬 수 있는 여지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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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좁은 집에는 네 명이 산다. 카지노 게임의 시작부터 남자아이 첫째 아키라와 엄마만 살고 있다고 누구나 받아들인다. 근데 충격적 이게도 캐리어에서 갑자기 아이 둘이 나오고, 역 앞에서 아키라가 데리러 나가 새로운 한 아이와 함께 집에 들어오면서 5인가족이 마침내 완성된다. 첫 결혼에 실패하고,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엄마는 무책임하게 여럿 남자와 관계를 가지며 4명을 낳았다. 장을 봐야 한다는 특명이 있기에 첫째를 제외한 모두는 집 밖에 나가지 못한다. 엄마는 마침내 간간히 돈을 보내다 크리스마스가 지나고 집에 오지 않는다. 새로운 남자를 찾아, 돈을 찾아 무책임하게 떠난 것이다. 간간히 아키라에게 보낸 두어 번의 돈은(5만 엔) 그녀의 일말의 죄책감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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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 명은 공원에서 씻고, 가끔은 도둑질을 하며, 집은엉망이고,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운다. 막내는 의자에서 떨어져 죽는다. 그리고 첫째는 슬픔을 억누르며 땅에 막내를 묻는다. 그렇게 어느 때와 같이 그들은 힘겨운 일상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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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베란다에서는 가끔 햇빛이 잔잔히 들어온다. 베란다는 아이들이 화분을 키우는 데 관객은 자연스레이 화분에 주목하게 된다. 아이들의 관심과 사랑으로 그 허름하고 형편없는 일회용 컵에도 새싹이 핀다. 정작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이들이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걸 식물에게 되레 주고 있다. 그때 비로소 관객은 본인이 이 안타까웅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에 무력해한다.

감독은 여기서 일말의 희망을 느끼고자 한다. 이 현대판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말자는 깨달음을 관객에게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깨달음? 유대관계를 맺고 연대하며 살아가는 이 사회에서 관심과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1987년 도쿄에서 발생한 이 실화는 이 현실의 벽 앞에 우리가 느끼는 깨달음에 더 큰 힘을 싣는다.


어떤 포스팅에서 악플이 많이 달린다. 그 게시물을 포스팅한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슬퍼한다. 누군가는 이 악플에 정신적 피해 보상을 받고자 할 것이고, 법적 대응을 하기도 한다. 자, 근데 이보다 더 무서운 건 뭘까. 무관심이다. 아무도 그에게 댓글은커녕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작성자 본인은 허무하고 공허해진다. 그게 어떤 양질의 정보라도 다시는 올리고 싶지 않아 진다. 어차피 아무도 본체만체하니까.

가수는 관객 앞에서 노래를 하고, 댄서도 관객 앞에서 춤을 춘다. 카지노 게임도 책도, 예술도 누군가가 그 작품을 보고 재해석할 때에 더 큰 존재의 의미가 있듯, 현대인이 무언가 ‘행하는’ 것에는 최소한 타인의 관심을 필요로 한다. 근데 어찌 최소한의 의식주를 영위할 수 있는 힘도 없는 이 아이들에게 이 세상은 이토록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돈 때문에 아이를 버린 엄마처럼 모두가 이상적으로 바라는 돈과 물질적인 것에 짓눌려 가장 소중한 걸 잊고 있던 이들에게 잔잔한 일침을 날리는 카지노 게임다.

관심과 사랑이 부족한 아이는 그들의 ‘환경‘에서 생각하고 배우는 것이 한정적이다. 우물 안 개구리 격. 첫째가 도둑질을 한다면 둘째, 셋째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따라 할 수밖에 없다.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스펀지처럼 받아들인다. 그것만 배웠거든. 더 나은 환경이 오리라는 일말의 희망으로 현생을 참고 버티는 이 네 명의 아이들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에겐 거대한 이 환경을 바꾸기엔 힘이 턱없이 부족하다. 지금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는 모두에게 그들의 참을성이 한계가 오지 않도록 우리는 어떤 환경을 줄 수 있는가. 더 나은 무언가를 해 줄 수 있고, 각자의 환경은 어떻게 바꿔갈 수 있나. 더 연대하고 더 부대끼면서 카지노 게임에서 의 이 잿빛을 어떻게 하얗게 만들 수 있나 고민해 볼 때가 아닐까.

누구는 돈이 없어도 행복하다. 경제적 궁핍에도 누군가는 건강한 신체와 생각을 가진다. 물질적 결핍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은 결국은 타인의 영향력. 조력자의 관심과 사랑이다. 카지노 게임의 끝을 알리는 크레딧에 우리 각자는 먹먹하고 싶은 생각에 잠긴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전부 사라지는 순간이 올 때 나는 무엇으로 이 험한 인생을 견뎌낼 수 있을까. 무엇이 날 살게 하는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터. 이 외엔 비극적인 결말 앞에 전부 허상이다. 이걸 깨닫지 못한다면 언제 어디서 또 어떤 무관심이 우리의 안온한 삶을 위협할지 모른다.


우리 잘 살자.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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