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행복의 조건
새벽에 주식 창 보느라, 잠을 못 잔다는 지인이 고민상담을 해 꼭 이 글을 쓰고 싶었다. 카지노 게임, 그의 인생을 단 1%라도 구원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오늘은 글 안 쓰고 더 자려했는데 이렇게 쓴다.
‘월천’이라는 말이 고유명사가 된 세상이다. 인터넷,
SNS, 온갖 커뮤니티에 들어가 봐도 월천이상 번다고 조롱 섞인 자랑을 하는 글을 심심찮게 본다. 꼭 그까진 아니더라도, 누구는 어느 회사에서 얼마를 버니, 이번에 주식으로 얼마를 벌었니, 서울에 아파트 등기를 쳤니, 끊임없이 내가 잘 살고 있는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가늠하고, 재고, 스스로를 평가하면서 잠식당하는 이들과 우린 살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잠식당했을지 모른다. 어디서 의도치 않게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고 있을지도.
자, 그러면 우리는 보통 생각한다. 그걸 듣는 상대방이만약 발화자보다 잘나지 못했다면 본인의 인생을 자책카지노 게임 검열하면서 어떻게 이 친구를 따라잡을까, 어떻게 하면 나도 이 친구처럼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를 고민할 것이라고. 혹은 발화자보다 조금 더 잘났다면 아니, 잘난 게 돈이 많은 건 아니니 조금 더 돈을 많이 번다고 해보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차이를 더 벌릴까, 내사업을 키워나갈까, 진급을 빨리 할까를 고민한다고 생각한다. 가족이 아니고서야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 진심 어린 축하를 해주는 사람은 단언컨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가족도 질투한다. 명절에 가서 부모님께 나 한 달에 얼마 번다고 자신있게 얘기해 봐라. 그다음 명절부터는 장담컨대 용돈 두 배 이상으로 줘야 된다. 그게 아니라면 효도가 아니라고 생각하신다. 서운함은 그렇게 배가 된다. 그래서 가족에게도 내 수입을 알리지 않는 것이 화목한 관계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뒤돌아서면 욕하는 사회생활에서 이렇게 본인 자랑을 하면서 본인의 위치를 늘 확인카지노 게임자 하는 사람들은 그 욕을 먹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본인을 어필카지노 게임 싶은 것이다. 인간은 유대관계를 맺으며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기에 내가 100억이 있어도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거든. 인정의 욕구가 불충분되기 때문에 어쨌거나 '내가 이렇게 성공했어'를 누군가가 인정카지노 게임 우러러봐줘야만 심적으로 충만해진다.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근데 아니었다. 울산에 있는 내 친구는 한 달에 백만원남짓을 번다. 30대가 넘도록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왜 아직 취업을 못했는지, 프리터족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얘기하면 끝도 없으니 지금의 현재상황만 얘기하자면 어쨌든 그렇다. 근데 만나면 내가 식사비나 술값을 맨날 내질 않는다. 그 친구가 낼 때도 많다. 그 백만 원을 벌어서 사고 싶은 옷 사고, 여행도 다니고, 적금도 들고할 것 다한다. 처음에 그를 만날 때면 속으로 늘 생각했던 것이 백만 원으로 어떻게 살 수 있는가 걱정뿐이었다. 연애도 하고, 정상적인 의식주를 영위하면서 자아실현을 위한 준비도 해야 할 텐데, 막역한 사이이기에 걱정이 앞섰다. 왜냐고? 이 사회에서는 특히 한국에서 돈이 없는 상태에서 30대를 산다는 것은 무시당하는 정도가 아니라 공포 그 자체거든. 자격증을 따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고, 학원을 다니는 데에도 돈이 필요하고, 면접을 보는데도 정장을 사야 하니 돈이 필요하고,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샤워, 쉼, 술, 핸드폰 전화 하루 24시간에 돈이 필요 없는 건 사실상 찾기 힘들어서다. 근데 친구의 마인드는 달랐다. 오늘 알바를 갈 수 있는 것 자체에 감사해하고, 그 돈을 아끼고 아껴 적금도 들고 있다. 하루하루를 스트레스 없이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산다. 단톡방에는 늘 과일을 먹는 본인 사진을 공유한다거나, 강아지 산책하는 사진, 블로그에 올린 본인 착샷으로 (옷을 좋아한다) 옷도 공짜로 협찬받으면서 그렇게 참 재밌게 산다. 물론 물어보진 않았지만 내가 오백만 원을 벌든, 천만 원을 벌든, 전혀 부러운 기색 하나 없다. 지금 본인이 행복하기 때문에 누가 얼마나 잘 나가든, 그 자체로 축하해 주고 감사한 것 아니겠나 인생 자체가. 지금 생각해 보니 술도 그가 살 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100만 원 번다고 그를 안타까워하고 걱정했던 나 스스로가 참 일천하고 보잘것없다. 누가 진짜 이 세상을 더 값지고 넓게 보고 있는걸까. 이것만 봐도 답은 나온다.
현대인은 사소카지노 게임 형편없고 작은 것들에 꽤나 무심하다. 근데 그 형편없는 것조차 가지지 못한 사람이 이 세상엔 널리고 널렸다. 근데 우리는 그들이 설령 곁에 있어도 영영 알지 못한다. 언제까지? 당연하다고 생각한 걸 잃어보기 전까지. 그게 가족의 사랑이든, 내 건강이든, 내 꿈이든. 무엇이든 잃어봐야 깨닫는다. 그래서 내가 지금 잃기 전에도 미리 알라고 말하는거다.
그 작은 것들과 오늘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기쁨, 내가 일자리가 있어 출근할 수 있다는 기쁨, 과일 먹는 사진을 나눌 편안한 친구가 있다는 기쁨, 따뜻한 날씨에 기뻐할 수 있는 풍부한 감성을 가진 기쁨, 우린 지금 사회에 찌들어 이를 잊고 산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나. 내가 오늘 아침 눈 뜨는게 당연한가? 아니다. 진짜 아니다. 새벽 출근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돼지처럼 하늘 한번 쳐다볼 시간이 없고, 땅 보면서 근심 섞인 회색잿빛의 얼굴을 모두가 하고 있다. 행복이 결여된 사회안에 적당한 이 위치에 스스로 만족한다고, 다행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렇게 꾹꾹 억지로 본심을 눌러 담는다. 구겨지고 망가져도 마음한켠에 안 보이게 꾹꾹 쑤셔넣는다.
욕망이 탐욕이 되면 그 끝은 파멸이고, 불행만 엄습한다. 사회적 성공이나 부는 그냥 가면, 즉 껍데기일 뿐, 알맹이는 다 썩어 어디 보여주기도 민망해서 우리는 그런 회색 가면을 쓰며 산다. 왜 나답게 그냥 눈치 안 보고 살아야 되는지 깨닫는 4월이다. 뭐에 내 행복은 반응하는가. 퇴근 후 작은 1500원짜리 맥주 한잔, 치킨 한 마리? 공부하다 친구와 웃으며 통화하는 30분? 등산하고 난 뒤 개운함? 연인과의 소소한 데이트? 가족과 한자리에서 함께 나누는 대화? 사소한 행복이라 부르는 이게 진짜 인생의 참 행복인거다. 크기가 아니라 빈도를 늘려야 한다. 이 사소하다고 말하는 것의 빈도를. 그게 내가 오늘을 살아갈 이유가 된다. 업으로 치자면 부업이 아니고 이게 사실 본업이다.
행복하자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