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엘공원의 김밥장사
지훈은 인중을 타고 들어오는 맛있는 냄새에 눈을 떴다. 어젯밤 꽤 고된 노동을 한 탓에 현수는 입술을 벌린 채 자고 있었다. 지훈은 냄새의 진원지를 알고 싶어 몸을 일으켰다. 매번 벙커침대에 달린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지만, 유럽 생활이 주는 색다른 경험의 재미가 아직 사그라들진 않았다.
지훈은 현수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창문을 열고 고개를 왼쪽으로 쭉 내밀었다. 냄새는 스테이크를 굽는 이웃사촌이 발산하는 거였다. 양파향이 진하게 담겨 코를 홀렸다.
아침부터 고기를 먹나 싶었지만 시계를 보니 오전 11시 반, 늦잠을 잔 건 지훈과 온라인 카지노 게임였다. 나뭇가지가 무성하게 얽혀있어 이웃의 얼굴을 볼 순 없었지만, 어차피 그들은 동양인이 쳐다보는 걸 반길 것 같진 않았다.
"어우, 뭐야 몇 시니? 헉, 왜 안 깨웠어. 오늘 뭐 하는 날인지 알면서"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눈 뜨자마자 타박이었다. 그랬다. 오늘은 '거사'를 치르는 날이었기에 늦잠 같은 건 자면 안 되는 게 맞았다.
바르셀로나 동거 보름여만에 둘은 일을 저지르기로 하고 전날 중국 식료품점에 가서 일회용 도시락용기와 김, 단무지, 햄, 시금치 등을 꾸역꾸역 챙겨 왔다.
김밥 장사다. 아이템은 홀로 바르셀로나에 정착하기 전부터 현수가 고민 끝에 정했다. 그는 김밥을 마는 데 필수인 김발을 한국에서 미리 가져왔다. "어디 보자, 일단 첫날이니까 10줄만 싸자. 시장 상황을 보고 전망이 좋으면 양을 늘리자, 자기야" 지훈은 장보기에 지쳐 짜증이 났지만 현수는 집에 오자마자 재료 준비를 하고 곧장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이거 꼭 해야 하니? 조금 창피한데" 지훈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에게 햄을 건네면서 속마음을 슬쩍 꺼냈다. 비닐장갑에 참기름을 바르려고 양손을 문지르던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생각해 봤어? 우리, 한국에 그대로 있었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사는 거야. 이미 잘 나가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는 거 알잖아. 여기서 시작하면 뭐라도 될 수 있어"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비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확신이 서는 것 같았다.
지훈이 동거를 결정하기 전 한국에 있을 때에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와라, 응? 여기 환경친화적인 요식업이 틈새인 거 같아. 샐러드 전용 판매점도 핵심 상권에 많이 들어서고 있어"라며 동거 마케팅을 했다.
결심을 하고 바르셀로나로 합류한 지훈이지만 막상 김밥을 팔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작아졌다.기어코 10줄 김밥을 다 싼 현수는 '거사' 당일 제품이 신선한지 체크하곤 "문제없음" 판정을 냈다.
둘은 장 볼 때 쓰는 카트에 김밥을 담고 길을 나섰다. 9월 11일, 그날은 바르셀로나가 속한 카탈루냐주의 국경일로 쉬는 날이어서 길거리는 한산했다. 문제는 그들이 정한 목적지였다.
집에서 걸어서 10여분이면 닿는 곳, 구엘공원이었다. 바르셀로나의 도시 정체성을 규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거기였다. 매년수백만명의 관광객이 몰리는 '랜드마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곳에서김밥을 팔게 될 줄 지훈은 꿈에도 상상한 적 없다. 사전답사까지 마쳤던 현수의 발걸음은 거침없었다.지훈은 터덜터덜 카트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