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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색 유인원 시아 Apr 17. 2025

4월 4일-조지오웰 1984, 대한민국 2025






4월 4일, 기록은 왜 윤리가 되는가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가 윤석열 대통령을 파면했다. 계엄령을 준비하고, 헌법 질서를 위협한 국가원수는 8인의 재판관 전원일치라는 이례적 결정으로 자리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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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는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피청구인이 주장카지노 게임 의혹은 병력을 동원하여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고성 계엄 또는 호소형 계엄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계엄법이 정한 계엄 선포의 목적이 아닙니다.”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었으므로 이는 피청구인의 법 위반에 대한 중대성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시민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 임무수행으로 국회가 탄핵을 가결하게 했던 점은 다행이지만, 불과 7년 사이 두 번이나 대통령의 파면을 요청하게 된 현실은 결코 우연이라 할 수 없다. 이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를 운용하는 리더십의 총체적 실패이자, 견제 기능이 무력화된 권력구조, 그리고 언론과 정당, 시민사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복합적 위기의 징후다. 헌법에 의해 보장된 권한이 헌법의 정신을 침해하는 방식으로 행사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는 것은, 그 체제를 지탱하는 언어와 상상력, 그리고 공적 책임의 문화 자체가 무너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김영민 교수가 지적하듯, 한국 사회가 스스로를 이해하고 설명해 온 방식의 실패이기도 하다.


“21세기의 한국은 정치의 실패이자, 헌정의 실패이자, 법치의 실패이자, 정당의 실패이자, 선거의 실패이자, 교육의 실패이자, 언론의 실패이자, 사회의 실패에 그치지 않고, 한국을 이해해 온 방식의 실패이기도 하다. 안이한 언어와 게으른 상상력에 의존해 온 기존 이해 방식의 실패다. 이제 한국을 다시 생각할 때가 왔다. 한국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시 숙고할 때가 왔다. 한국을 이해할 언어를 새롭게 발명할 때가 왔다.” - 김영민, 『한국이란 무엇인가』


"이 상황에서 사람들이 주로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저 사람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탄핵은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헌법을 개정하는 게 좋을까, 좋지 않을까. 이런저런 질문들이 12월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제기됐다. 그것들은 필요한 질문들이긴 하지만, 모두 부분적인 질문들이다... 지금은 물러난 전 대통령인 윤석열 씨의 경우, 지지자와 아닌 이들의 판단이 다르겠지만 그만 처벌하면 한국의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참에 '한국이란 무엇인가'라는 큰 질문을 던지고 당장 대답할 수 없어도 수십 년에 걸쳐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김영민-『한국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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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1984』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선출된 권력이 민주주의의 심장을 찌른 그날은, 한국 정치사에 뼈아프게 기록될 날짜다. 그리고 기묘하게도, 조지오웰『1984』의 주인공 윈스턴이 일기를 쓴 바로 그 ‘4월 4일’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41년 후인 2025년 4월 4일

대한민국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대통령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일까?사유되지 않은 현실은 언제나 가장 예리한 문학을 닮는다. 그리고 그 문학은 우리가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1984』에서 일기를 쓴다는 것은 명백한 범죄다. 기록은 사유의 흔적이고, 사유는 통제되지 않는 것이며, 통제되지 않는 것은 체제에 위협이 된다. 기록은 자유로운 정신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증표다. 따라서 윈스턴의 일기는 단순한 개인의 감상이 아니라, 체제가 제거하고 싶어 하는 ‘존재의 잉여’이다.





[윈스턴은 과연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일기를 쓰는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위해서? 아니면 가상의 시대를 위해선가?

그의 앞에는 죽음이 아니라 무(無)가 있을 뿐이다.

일기는 재로 변할 것이고, 그 자신은 어디론가 증발되어 버릴 것이다.

사상경찰만이 그의 일기장을 없애기 전에 한번 읽어 볼 것이다.

자신의 흔적도 사라지고 종이에 끼적거린 익명의 글마저 실물로 존재할 수 없는데,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미래에 호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는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는 진실을 말카지노 게임 외로운 유령이었다.

어쨌거나 완곡하게 진실을 말카지노 게임 한, 그 발언은 계속될 수 있을 것이다.

후대의 인간에게 남겨 줄 유산은 말을 들려주는 것보다 건전한 정신을 유지하게 카지노 게임 것이리라.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 펜에 잉크를 묻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미래를 향해, 과거를 향해, 사고가 자유롭고 저마다의 개성이 서로 다를 수 있으며 혼자 고독하게 살지 않는 시대를 향해, 진실이 존재하고 일단 이루어진 것은 없어질 수 없는 시대를 향해. 획일적인 시대로부터, 고독의 시대로부터, 빅 브라더의 시대로부터, 이중사고의 시대로부터 - 축복이 있기를!]

『조지오웰 1984 본문 중』





『1984』에서 주인공 윈스턴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이 글을 누구를 위해 쓰는가?”

기록은 체제의 통제를 벗어난 정신의 증거다.

‘진실을 쓴다’는 행위가 체제를 위협카지노 게임 이유는, 그 문장이 곧 통제할 수 없는 정신의 출현이기 때문이다.




예외상태의 말 '계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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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어의 위기를 살고 있다. 언어가 공적 책임을 져야 할 자리에서 후퇴하고, 공동체의 감각을 묶어주던 말들이 해체되고 있다.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 사회에서조차,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이 다시 선을 그으며 윤리를 흔든다.


문제는 계엄이라는 말이 이미 낡은 말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 언어는 현재형이고 여전히 통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가 만들어 놓은 언어가 함께 사라지는 건 아니다.

‘비상 상황’, ‘계엄’, ‘안보’, ‘자유민주주의 수호’ '종북세력' '빨갱이'

익숙한 이 말들은 지금도 뉴스에서 반복되고 있다.

언어는 권력의 기억을 오래도록 붙잡아 놓는다.

이러한 언어는 복귀의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되기도 한다.


오늘날 계엄이 다시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그 언어를 “가능성의 언어”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다.

달라진 건 형식이지, 의도는 변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중단시킬 수 있다는 착각, 그 착각은 이번에도 반복되었다.


정치철학자 칼 슈미트는 “주권자란 예외 상태를 선언할 수 있는 자다.”라 말한다.

법이 일시 정지되고, 민주주의가 휴지기에 들어가는 순간을 만드는 사람.

한국은 그 ‘예외’를 여러 번 경험해 왔다. 탱크가 광주라는도시를 폭격하고, 계엄군이 대학을 점령한 적도 있었다. 그 권한은 과거엔 전두환의 손에 있었고, 박정희 손에 있었다.

오늘은 법을 쫌 아는 법률가의 손에 들려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투표로 선출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했다고 믿는 착각을 한다.이번 계엄은 국가 안보와 자유민주주의 수호의 질서를 내세우며 제단의 칼을 들고 돌아왔다. ‘질서’라는 말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자유를 침묵시킨다면, 우리는 어떤 언어를, 어떤 마음으로 이 사태를 기록할 것인가?


김영민 교수는『한국이란 무엇인가』에서 한국을 "가건물"에 비유한다. 빨리 지을 수도 있고, 빨리 허물 수도 있기 때문에 공들여 짓지 않는 건물. 굳이 좋은 자재를 쓰지 않아도 되고, 정성스럽게 설계하지 않아도 되는 임시의 구조물. 이 가건물은 최근 10~20년 새 세계의 주목을 받는 '신기루'처럼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묻는다. "제대로 된 건물을 지으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나?" 한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진정한 의미에서 재건하려면, 이제는 임시 건축이 아닌 정면 응시가 필요하다. 가건물 한국을 넘어서기 위한, 말의 재건이 필요한 순간이다.


민주주의는 절차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책임지는 태도, 실패를 감당카지노 게임 품격, 이 모든 것이 민주주의를 지탱카지노 게임 힘이다.





언어는 윤리다.



언어는 사유의 장소이며, 기록은 존재의 약속이다. 말은 그 자체로 행위이며, 기록은 그 행위의 흔적이다. 우리가 언어를 잃을 때, 함께 사라지는 것은 곧 세계를 감각하고 구성할 수 있는 능력이다.


『1984』에서 가장 무서운 도구는 감시카메라가 아니다.

그건 ‘뉴스피크’, 다시 말해 언어를 통제하는 기술이다.

단어를 줄이고, 뜻을 왜곡해 사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곧 이데올로기의 가장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생각하지 못하면 저항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체제가 원카지노 게임 궁극의 목표다.

한마디로 찍소리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주체로 호출한다.

‘안보’, ‘질서’, ‘국민’, ‘자유민주주의 수호’ 같은 말들이 개인을 체제 속의 말 잘 듣는 ‘주체’로 만들고,

동시에 비판적 사유를 제거해 버린다.


언어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어떤 말은 권력을 정당화하고, 어떤 말은 사라지게 만든다.

어떤 말을 할 수 있고, 어떤 말은 금지되며, 어떤 말은 ‘실수’나 ‘망언’으로 처리된다.

그 기준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권력의 구조다. 구조가 언어를 만들고, 언어가 다시 구조를 강화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카지노 게임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무엇이 말해지고 무엇이 말해지지 않는가’를 따져야 한다.


어떤 말은 괜찮고, 어떤 말은 위험하다면 그 사회는 표현의 자유가 없는 것이다.

표현의 자유란 “말할 수 있다”는 권리가 아니라 "말해도 되는 구조다"

체제가 허용한 언어만 말하는 사회는 사실상 침묵의 사회다. 진실을 말하기 위해선 체제가 금지한 언어를 써야 한다. 그 언어는 고통스럽고, 위험할 수 있다. 때론 외로울 수도 있다.


언어는 또한 저항의 공간이기도 하다.

전체주의는 존재를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 말할 수 없게 만들면, 존재는 사라진다.

침묵당한 자의 말, 금지된 기억의 호명, 지워진 고통의 이름 부르기는 체제를 가로지르는 사유의 시작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사유의 언어는 윤리의 문제로 돌입한다.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는 말 걸릴 수밖에 없는 존재다.”

권력이 지우려는 것을 다시 말하고, 체제가 강요카지노 게임 침묵에 틈을 내는 작은 균열,윤리란 그 미약한 사유의 행위를 끝까지 감당하는 것이다.







기록은 윤리다.



우리는 종종 ‘표현의 자유’를 논하면서도, 그 자유가 어떤 구조 위에 얹혀 있는지를 잊는다.

언어는 늘 권력의 ‘운영체계’ 아래 있다.

‘빨갱이’라는 단어 하나가 생명을 거두고, ‘계엄’이라는 말 한 줄이 공동체의 숨을 멈추게 하듯이, 권력은 언제나 언어의 틈새에 숨는다.

말하지 않으면, 존재는 사라진다.


기록은 윤리다.

그리고 언어는, 다시 민주주의를 구성카지노 게임 일이다.

진실이 무너진 시대에 침묵하지 않겠다는 결심 하나로, 기록을 시작하는 사람들


기록은 사라진 것을 기억하게 하고, 지워진 자리를 복원하게 한다.

그것은 작은 틈이지만, 그 틈에서만 체제는 무너질 수 있다.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윈스턴의 일기는 바로 그런 예외의 세계에서 쓰였다.

우리가 지금 다시 일기를 써야 하는 이유는 예외를 기록하지 않으면, 예외는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도 예외 없는 세계가 아니며, 민주주의란 언제나 예외를 경계하는 감각 위에서만 유지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을 부르고, 감각되지 않는 것을 감각하는 문장으로 기억해야 한다.


윈스턴의 한 문장 “사고가 자유롭고, 진실이 존재카지노 게임 시대를 향해”는 지금 이 순간 나의 마음속에서 다시 불붙는 말이 된다.


전체주의 체제는 언어를 통해 타자를 지운다. 그러므로 타자의 존재를 말할 수 없게 만들고, 말이 사라진 타자의 존재를 ‘합법적으로’ 소거한다.

따라서 윤리란 단지 인간다움의 문제가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을 ‘말하게 하는 힘’을 구조적으로 어떻게 회복하느냐의 문제다.

예외 상태에서 우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언어는, 권력이 거부한 말, 잊히기를 강요받은 말, 삭제된 이름을 다시 호명하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이름 모를 ‘윈스턴’들이다.



사유의 언어는 단지 생각을 담는 도구가 아니라, 억압의 구조에 균열을 내는 가장 날카로운 형식이다. 그 언어를 선택하는 순간, 나는 단지 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를 감각하고, 감당하는 존재가 된다.

생각한다는 건 말한다는 것이다.

말한다는 건 책임진다는 것이다.

책임진다는 건, 아무도 듣지 않아도, 아무도 함께하지 않아도, 묻는 것이다.


타자를 부른다는 건, 그 타자의 존재를 감당하겠다는 약속이며, 책임을 지겠다는 선언이다.

그래서 기록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사유의 흔적이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마지막 장벽이다.


2025년 4월 4일, 우리는 또 하나의 역사적 전환점을 통과했다.

계엄령을 시도한 대통령이 자리에서 내려왔고, 헌법이 정치보다 앞에 선 날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언어는 남아 있고, 그 언어는 언제든 다시 호출될 수 있다.


『1984』의 윈스턴처럼 “사고가 자유롭고, 진실이 존재카지노 게임 시대를 향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 카지노 게임가?”의 질문 앞에 서야 한다.



4월 4일은 '오컬트(occult)'적인 것도 '죽을 사(死)'아니다.

4월 4일, 이 날짜는 언어의 위기를 문제 삼고 질문을 기록해야 하는 날짜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우선 아래글은 김영민 교수의 『한국이란 무엇인가』의내용을 바탕으로 인용해보려 한다.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잃은 사람은 살아 있어도 과거의 '그'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가 지워진 사람이 어떻게 같은 사람이겠는가. 정치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수호할 만한 공적 가치를 잃어버린 공동체, 문명의 기록이 다 사라진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겠는가.” -김영민 『한국이란 무엇인가』


"오늘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제도 개편이 아니라 사유의 전환, 정치적 성과가 아니라 언어의 발명, 지도자의 등장보다 국가를 바라보는 시선의 재구성이다." -김영민 『한국이란 무엇인가』


"정치가가 성인이 아니라면, 견제와 균형의 제도적 틀 속에 자신을 위치시켜야 한다. 국가가 표방하는 정상성의 외부에 존재하는 이들과의 긴장 속에서 자신의 도덕성을 실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변경은 정부를 향해 확장되기보다는 정치적 소수자에게로 확장되어야 한다." -김영민 『한국이란 무엇인가』


“혼자 있음으로 말미암아 감당해야 될 불안과 공포를 대가로 하여 비로소 얻어진 권리.” 김윤식은 자유를 이렇게 규정했다. 이제 더 이상 군부독재와 같은 절대다수가 합의하는 명징한 악은 없다. 그 악에 저항하는 것만으로 자유가 되는 시대는 저물었다. 이제 너는 혼자다. 자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김영민 『한국이란 무엇인가』


"세상을 보다 견딜 만한 곳으로 만드는 일에는 이름이 필요한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과거의 이름을 재정의하는 작업들도 포함된다. 여건이 성숙해갈 때 새로운 정의를 늦지 않게 내릴 수 있는 것도 그 사회의 역량이다. 어느 정도가 되면 성숙한 거냐고? 성숙 역시 구성된 것이다." -김영민 『한국이란 무엇인가』


김영민 교수의 말에 따르면“자유든 민주주의든 그 말을 학대해 왔다. 말을 학대한다는 것은 그 말을 제 위치에 정교하게 쓰지 않는 것”이라며, “그런 면에서 자연 상태라는 것은 말을 바꾸면 언어의 위기라고도 부를 수 있다”라고 말한다.

언어를 정교하게 쓰지 않는 사회는 결국 현실도 정교하게 다룰 수 없으며, 책임의 윤리는 허공에 부유하게 된다.


기록은 단지 과거를 붙잡기 위한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미래를 다시 묻기 위한 윤리적 기초다. 우리는 어떤 언어로 이 시대를 기억할 것인가? 어떤 문장으로 이 체제를 넘어설 것인가? 그리고 어떤 윤리로 말하고, 쓰고, 존재를 불러낼 것인가?



언어의 위기 속에서, 언어의 윤리를 다시 묻는다. 기록의 사소한 행위 속에서, 우리는 그 자체로 세계를 재건하는 윤리적 출발을 준비하는 것이다.


4월 4일, 우리는 이제 묻는다.


단지 누구를 처벌해야 카지노 게임가가 아니라, “우리는 누구였고,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가?”

이제 진짜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을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윤리적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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