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앞서 읽은 한강 작가의 이야기들이 워낙 묵직해서 <희랍어 시간에 거는 기대감이 컸다. 가라앉은 마음을 살짝 띄워주지 않을까 내심 설레기도 했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와 말을 잃은 여자라는 내용이 그리 밝지는 않겠지만, 남녀의 사랑 이야기라고 누군가 그랬으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몽글몽글한 분위기가 분명 연출될 거로 생각했다.
희랍어라는 연결고리로 만난 두 사람, 그와 무료 카지노 게임의 서사가 장을 번갈아 가며 펼쳐진다. 어떤 장은 제목이 없고 어떤 장은 제목이 있다. 그 차이를 생각하며 읽는 것도 읽는 재미를 더하는 요인이 될 수 있겠다. 1부터 21까지 넘버링되고 0으로 끝나는 구성도 흥미롭다. 무료 카지노 게임가 말을 되찾고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0’을 마지막에 붙인 게 아닐지 나름 추측도 해본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라는 보르헤스의 묘비명을 첫 문장으로 언급하며 소설은 시작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시력을 잃어가는 그는 보르헤스라는 인물을 모티브로 탄생한 듯하다. 보르헤스의 삶을 더듬어보면 그와 실명이라는 선으로 맞닿아 있다. 그것이 아버지 쪽 유전이라는 점도. 열일곱 살에 말을 잃은 적 있는‘무료 카지노 게임’가 외국어 시간에 ‘비블리오떼끄’라는 말을 발음하다 다시 말을 찾은 것도 보르헤스와 연관이 있는 듯하다. ‘비블리오떼끄’는 프랑스어로 도서관이라는 뜻이다. 보르헤스가 국립도서관장에 임명되었을 당시 그는 거의 시력을 상실한 상태였다는 점도 소설의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언어의 예민함은 소설 속 ‘그녀’에 투영된 듯하다.
“일기장 뒤에 적어가던 단어들은 스스로 꿈틀거리며 낯선 문장들을 만들었다. 꼬챙이 같은 언어들이 시시로 잠을 뚫고 들어와, 무료 카지노 게임는 한밤에도 몇 번씩 소스라치며 눈을 떴다. 잠이 부족해질수록 신경은 위태롭게 예민해졌고,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때로 달궈진 쇠처럼 명치를 눌렀다.” (17쪽)
“아무리 하찮은 문장도 무료 카지노 게임함과 불무료 카지노 게임함, 진실과 거짓, 아름다움과 추함을 얼음처럼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혀와 손에서 하얗게 뽑아져나오는 거미줄 같은 문장들이 수치스러웠다. 토하고 싶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18쪽)
“공포는 아직 희미했다. 고통은 침묵의 뱃속에서 뜨거운 회로를 드러내기 전에 망설이고 있었다. 철자와 음운, 헐거운 의미가 만나는 곳에 희열과 죄가 함께, 폭약의 심지처럼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20쪽)
소설에서 여자가 말을 잃은 사정은 구체적으로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추정할 뿐이다. 두 번째로 말을 잃은 무료 카지노 게임 남편과의 관계에서 미끄러지고 긋고 찌르는 말들로 인해 생긴 상처에서 발화한 것이 아닐지. 더불어 그녀의 혀와 펜으로 너덜너덜하게 만든 말들 때문일 수도 있다. 말의 날카로움은 잘 벼린 면도날처럼 상대를 찌르기도 하지만 나 자신을 상처 내기도 한다. 해서 때로는 침묵 속으로 침잠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더는 말로 상처받지도 상처 주고 싶지도 않다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심장과 심장을 맞댄 채, 여전히 그는 무료 카지노 게임를 모른다. 오래전 아이였을 때, 자신이 이 세계에 존재해도 되는지 알 수 없어 어스름이 내리는 마당을 내다보았던 것을 모른다. 바늘처럼 맨몸을 찌르던 말들의 갑옷을 모른다. 무료 카지노 게임의 눈에 그의 눈이 비쳐 있고, 그 비친 눈에 무료 카지노 게임의 눈이, 그 눈에 다시 그의 눈이 …… 그렇게 끝없이 비치고 있는 것을 모른다. 그것이 두려워, 이미 핏발이 맺힌 무료 카지노 게임의 입술이 굳게 악물려 있는 것을 모른다.” (204쪽)
말로 상처받아 말을 잃은 여자와 말로 상처 준 뼈아픈 경험이 있는 남자가 희랍어 수강생과 강사로 만난다.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보기 좋게 깨어진다.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는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도울 수 없을 거로 생각한 여자에게 도움을 받는다. 그는 시력을 잃은 사람과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관계는 이루어질 수 무료 카지노 게임고 여겼지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을 잃은 여자는 자신의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남자로부터 자신의 침묵을 이해받는다. 그것이 그녀가 언어를 되찾고자 하는 노력에 또 하나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현실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절대적인 아름다움만을 믿는다는 플라톤의 생각을 빌어 ‘그’는 적어도 이 세상에는, 무료 카지노 게임 것은 영원히 없다고 말한다. 새롭게 시작하는 둘의 관계도 사랑도 말도 그렇다. 어쩌면 언젠가 관계가 깨어질 수도 있고 다시 침묵의 심해에 빠져들 수도 암흑의 세계에 갇힐 수도 있다. 무료 카지노 게임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삶이 조금은 수월해지지 않을까.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강 작가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지목하며 그 선정 이유로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밝혔다. 시적 산문의 극치를 보여주는 작품이 <희랍어 시간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이 소설은 시와 철학을 넘나드는 사유가 빛난다. 오감을 총동원하여 감각하고 언어로 표현해낸 문장들은 감탄이라는 말로는 표현 불가능해서 내 남루한 언어를 한탄하게 된다. 이 책은 후루룩 훑어서는 안 된다. 핥으며 깊이깊이 음미해야 하는 책이다. 그래야만 제대로 사유의 심장을 더듬고 시적 산문의 정점에 가닿을 수 있다.
누군가 내게 한강 작가의 소설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단연 <희랍어 시간이라고 말하겠다. 그 감정을 당신도 느껴봤으면 좋겠기에 당신에게 권한다, 이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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