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생명이 귀하다지만, 정작 동물은 이해하지 못할 말 때문에 사과하는 것이 우스워 보인다. 대체 누구를 위한 사과일까. 이번 사과는 카지노 게임 추천가 즐기는 고깃집에 들이닥쳐서 '육식은 살인'이라고 외치는 운동가들을 연상시키는데, 카지노 게임 추천대통령을 자처하는 후보가 그런 모습을 자초할 필요가 있을까. 동물은 투표권도 없는데 말이다.
동물권은 논란 많은 주제다. 권리란 타인 또는 사회에 무언가를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법적인 자격이다. 재산권은 타인에게 내 재산에 손대지 말 것을 요구할 자격이고, 사회권은 사회에 위험 분담과 최소한의 생존수단을 요구할 자격이다. 당사자가 직접 요구하지 않더라도, 사회는 그 권리를 실현해야 한다. 그런데 동물권은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할 자격인가.
만약 동물권이 가혹하게 대우하지 말 것을 요구할 자격이라면, 동물도 동물을 고통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육식동물에게는 죽음이다. 그 질서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사법 비용이기도 하다. 게다가 동물권은 다문화주의와도 충돌한다. 개를 잡아먹고 소를 도축하는 문화를 동물권과 함께 존중할 방법은 없다. 하지만 진보주의자는 다문화주의를 포기한 적이 없다. 진보좌파는 둘 중 무엇을 우선시할 것인가.
동물권 지지자는 지적 장애인을 근거로 동원한다. '지적 장애인은 스스로 권리를 요구하거나 실현할 수 없다.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존엄한 생명이기 때문에 권리를 갖고, 사회는 그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그렇다면 동물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런 식이다. 이런 논리의 문제는 인간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완전히 외면해서 지적 자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산과 언덕의 경계는 매우 모호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둘을 직관적으로, 또는 통념에 따라 구분하며 산다. 그 경계는 이성적으로 명확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언덕과 산은 엄연히 다른 말로 통한다. 이런 구분은 인간이 사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 구분하지 않으면 정확하게 지칭할 수 없으니까.
인간과 동물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이성적으로 파고들면 둘 사이의 경계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마치 점 하나를 응시하다 보면 그 점이 흐려지는 것처럼. 하지만 사람은 직관적으로 둘을 구분한다. 그리고 그런 직관이 모든 추론의 출발선이다. 이성적으로 명확하고 뚜렷한 것만 전제로 삼아야 한다면, 사람은 아무것도 추론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모든 추론은 직관처럼 증명 못 할 무언가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차별주의던 종평등주의던, 최종적으로는 증명하지 못할 영역인 것은 마찬가지다. 어느 한 쪽이 특별히 더 논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직관과 감성을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그런 이성의 한계가 문제 되지 않는다. 사람은 오류와 모순을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동물이니, 논리적으로 완벽하지 않다는 비판은 모두에게 무의미하다. 직관적 판단을 무시하고 이성적 분석만 찾는 것은 이성의 자멸이다.
현대 사회정의 운동가들은 연역법으로만 사고한다. '생명은 존엄하다. 동물도 인간과 같은 생명이니까 똑같이 존엄하다. 똑같이 존엄하다면 권리도 같아야 한다.' 이런 식이다. 그래서 이상한 결론을 사회정의로 포장할 때가 많다.
동물복지는 공중위생 면에서 필요할지 모르지만 동물권은 차원이 다르다. 동물에 법적 지위를 부여한다는 개념은 충분히 논의되지도 않았고, 동물과 인간이 함께 합의할 수도 없는 영역이다. 솔직히 말해서, 동물권은 아직 고학력자들의 스도쿠 같은 주제다. 스팸을 반찬 삼아서 한 끼를 먹는 카지노 게임 추천에게는 무관한 주제다. 그런 주제를 카지노 게임 추천의 대표가 주장하는 것은 우스워 보인다.
진보좌파는 호기롭게 조기 대선에 도전했지만, 아무래도 선거자금도 돌려받지 못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