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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rden Dec 21. 2024

원초적 본능

글을 읽는다는 것과 당신을 알아간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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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가 영화감독이었다면, 가수였다면, 화가였다면, 상의 이름음 달라졌을지언정 그녀의 수상이 이토록 늦어졌을 것인가. 2000년 초중반의 언젠가 대학의 강의실에서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이 나오지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분도 국문학도인 이상 고민해봐야무료 카지노 게임 문제입니다."


그때도 한강 작가는 활발하게 작품활을 하고 있었고 나는 <채식주의자를 쇼킹해하면서 읽었었다. 우리나라는 이미 그때도 걸출한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는데누구도 몰랐던 거였다. 노벨문학상이라는 것도 국가의 위상에 한껏 기댄 상이구나, 라고 생각했지만 한강 작가가 이제서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유나는 그녀가 소설가여서, 가 아닐까 한다.



글은 못생겼다. 아니 글씨가 못생겼다. 활자는 힘이 없다. 빽빽한 글씨들의 무덤은 구미가 당기지 않는다. 오로지 활자사이를 관통무료 카지노 게임 흐름과 글씨들이 홍수를 이룬 가운데 일맥상통무료 카지노 게임 행간만이 글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든다. 독특한 글씨체를 사용한다고 해도 다르지는 않다. 글자의 벽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열고 기어이 거길 들어가겠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 읽는 행위에 대한 애정과 집착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글은 직관적이지 않다. 탐미적이지도 않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영화감독처럼, 화가처럼, 가수처럼, 예술가들이다. 무에서 유를 창조무료 카지노 게임 사람들을 우리가 예술가라고 부른다면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림은, 노래는 직관적이다. 그것에 대한 전문적인 식견을 갖지 못했더라도 눈과 귀와 마음이 열려있다면 누구든 자연스럽게 보고 듣고 금세 빠져들 수 있다. 글은 다르다. 전적으로 독자의 열정과 노력에 기대야무료 카지노 게임 글의 한계에 작가들의 애환이 있다. 애초부터 글의 운명이란 어쩌면 읽히기만을 기다린다든가, 읽어주기만을 바라야무료 카지노 게임 무력함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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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어딘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사는 아파트단지로 이사를 오고 보니 예쁜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설마 거기만 그럴리가, 하고 의심무료 카지노 게임 사람이 있다면 정말 여기는 그렇더라,고 대답할 수 있다. 어느 것 하나 공짜로 얻은 것 없이 노력만으로 인생의 여러 미션들을 클리어해온 내 인생의 여러 부분이 부정당무료 카지노 게임 느낌이었다. 왜냐하면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들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은집단을 형성하게 되면 여러 부분에서 평균이 만들어지면서 필연적으로 정규분포하게 되는데, 의도하지 않게 이동네로 이사를 오고 다른 부분도 아니고 외모때문에 꼬리칸으로 밀려났다는 억지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생겼다. 전까지 나를 비롯한 주변인들은 연예인이 아니니까 다들 비슷한 상식에 근거한 외모를 가지고 살아왔고 그게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 와서 보니 외모에 관한 나의 상식이 그릇된 것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예쁜 그녀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그 외모에 압도당하고 설득당하고 있지만 막을 길이 없다고 느낄 때가 있다. 홀린 듯 얼굴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느라 잇몸이 마르고 광대가 마비되는 그런 느낌, 아시는 분? 그건 이성적인 떨림과는 전혀다른 감정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예쁜 여자는 질투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엇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논리다. 대동소이한 가운데 저울질무료 카지노 게임 '비교'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예쁜 사람은 비교가 아니라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걸 실감했다. 천상계의 느낌이랄까. 그저 경이로워서 나도 모르게 바라보게 되는 이들을 길에서도 여럿 보았다.




좋아무료 카지노 게임 작가나 새로운 작가의 책을 마주할 때 나는 설레고 두근거리는 마음이었다. 글씨는 매력이 없고 못생겼지만 그 책의 정수는 글씨에 있지 않다. 책 표지는 마치 외모같지만 그 책의 고갱이는 표지에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수없는 활자들의 틈, 글씨의 벽들 사이에 숨어있는 보석같안 의미와 생각들을 찾아가는 데에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한사람의 내면을 정성들여서 자세히 살피는 것과 비슷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겉으로 드러나는 매력과 외모에서 뿜어져나오는 아우라를 외면하고 지나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인간은 원초적으로 예쁜 것, 연약한 것, 아름다운 것, 보드라운 것에 끌린다. 그런 데에 쉽게 미혹되고 그건 본능이다. 그러나 글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외모가 경쟁력이 되고 외모로 옆사람을 압살할 수 있는 이 세상에서 적어도 그 사람 고유의 마음과 내면을 볼 수 있거나,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한 사람과 마주무료 카지노 게임 일은, 그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은 그 이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일과 같다. 셀 수 없이 촘촘한 시간과 우연들, 사건과 역사가 쌓여 만들어진 한 사람이 내 앞에 있다. 그 세계로 들어가보는 일은 얼마나 멋질 것이며, 어떠한 서사와 사연이 있는지 듣고 이해하고 알아가는 일은 얼마나 가치있을 것인가. 그건 오래도록 방영되는 대하 드라마를 끝까지 보는 일이기도 하고, 장대하고 스펙터클한 대기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 얼굴로만 평가해서 가능한일이 아니다. 섣부르게 상대방을 판단하고 미혹되어서는 영영 알 수 없는 그 세계를 마치 글을 읽듯 더듬어가는 것, 나는 예쁜 여자들이 흔한 이 동네에서 꼬리칸에 타고 알아가보려 한다.


관계의 시작은 예쁜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주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관계의 지속은 서로 너를 더 들여다보고 싶고, 너의 세계가 궁금하다는 무언의 약속과도 같다. 굽이굽이 더 깊어지고 넓어진 한강 작가가 오로지 글만으로, 글의 힘으로 국 큰 성취를 이뤄낸 것처럼, 글씨는 못생겼지만 글은 위대하다. 결국 좋은 글, 멋진 글, 우수한 글은 빛을 발한다. 우리도 그럴 수 있다. 관계도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걸 믿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글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지 않을까. 내면의 것을 발견하는 데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라고 말해선 안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국 타인에게도 나의 얼굴만을 보고 많은 것을 평가하라는 여지를 주는 세상을 살게 되지 않을까. 간이 본능을 거스르는건, 삶과 생존에 유리한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라고 주문하는 것과도 같아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력하는 것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불가능한 줄 알지만 노력할 때, 우리는 좀 더 살만 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된다고 믿는다.


누군가의 외모를 폄하하는 순간, 그 자신도 더 힘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예쁜가? 그렇게 예뻐질 자신이,,, 있는걸까? 누군가의 학력을 무시하는 순간, 무시한 자의 자녀에게도 더높은 학력을 요구하는 세상이 주어진다.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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