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에티 힐레숨 :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
새해를 맞이하여 독일어 어학원 친구들과 선생님 집에 모여 포트럭 파티를 했다. 각자의 새해 다짐을 이야기하다가, "카지노 가입 쿠폰 쓰기" 라는 주제가 나왔다. 카지노 가입 쿠폰 쓰기를 꾸준히 실천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새해 다짐으로 앞으로 쓰겠다는 결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실 나는 매일 카지노 가입 쿠폰를 쓰지는 않지만, 블로그나 브런치에 꾸준히 일상과 생각을 업로드하는 것을 카지노 가입 쿠폰의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여러 글들의 연재를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나의 목표라고 밝혔다. 몇몇의 어린 친구들은 카지노 가입 쿠폰 쓰기의 의미를 잘 모르겠다고 하기도 하고, 매일 자필로 카지노 가입 쿠폰를 쓰는 선생님은 내가 죽으면 이 카지노 가입 쿠폰의 효용가치가 있을지, 어떻게 처분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카지노 가입 쿠폰 쓰기" 라는 주제 하나 가지고 우리는 몇 시간을 이야기했다. 그 중에 철학 박사 과정 중에 있는 친구 W는 카지노 가입 쿠폰의 철학적 의미와 그 고찰에 대해 열변을 토해냈다. 내가 현재는 아무 사람 아니더라도, 죽어서는 그 카지노 가입 쿠폰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며, 그는 자신이 죽은 뒤를 위해 카지노 가입 쿠폰를 쓴다고 했다. 그러면서 W가 아주 심취해있는 한 여성을 소개했다. "에티 힐레숨". 그녀는 카지노 가입 쿠폰를 통해, 스스로의 영혼을 구원하고, 죽은 이후에야 자신의 카지노 가입 쿠폰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철학적 영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에 또 모여, 그녀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일부 읽고, 같이 토론하는 시간을 갖기로 하였다.
네덜란드 유대인, 나치의 박해, 카지노 가입 쿠폰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안네의 카지노 가입 쿠폰"가 떠오를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에티 힐레숨이라는 이름은 네덜란드 출신인 S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전세계 철학자 뿐만 아니라, 종교계까지도 그녀를 아주 주목하고 있다. 그녀가 아우슈비츠에서 죽기 전, 2년간의 방대한 카지노 가입 쿠폰가 철학적으로 연구 가치가 있으나, 오히려 그 방대한 양 때문에 한국어로는 아직 완역이 출간되지 않았다. (영어, 독일어 완역도 최근 들어서야 이뤄졌다.) 대신 그녀의 카지노 가입 쿠폰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해석한 패트릭 우드하우스의 "에티 힐레숨 : 근본적으로 변화된 삶"을 읽어보며, 대략적으로 그녀의 카지노 가입 쿠폰의 세계를 탐닉해볼 수 있었다.
그녀가 카지노 가입 쿠폰를 쓰기 시작한 건 나치에 대항하기 위해서도,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운 자아를 조금이나마 안정시키기 위해 심리치료의 일환으로 시작했다. 경제적으로는 안정되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불안정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에티 힐레숨은 심적으로 꽤나 방황하는 20대를 보냈다. 머리 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을 말하지 않으면, 실뭉치로 뭉쳐진 덩어리가 가슴에 턱 막혀있는 것 같았고(1941.3.9 첫 카지노 가입 쿠폰에서), 이에 심리상담사의 권유로 많은 생각들을 정리하기 위한 카지노 가입 쿠폰를 쓰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우울하고도, 혼란스러운 그녀의 정신상태를 잠재우기 위해, 에로티시즘에 깊게 탐닉하고 있었지만, 점점 카지노 가입 쿠폰를 쓰면서 자아를 단련해갔고, '기도'의 형태로 내면과 대화하는 방식을 훈련해가면서, 점점 스스로를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그래서 그렇게 내면을 단련해가며, 나치 시대를 견뎌내간다. 그녀는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로 끌려가기 전, 임시 수용소에서 유대인 사회복지부에서 일하며, 수용자들에게 희망을 주기도 하며, 극악무도한 독일인들을 증오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이 2년이라는 짧다면 짧은 시간동안, 엄청난 사유를 통해 오히려 혼란스러운 시대 속에서 내면은 혼란스럽지 않은 상태를 유지한다. 동양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명상으로 인한 해탈 혹은 득도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야할까. 그래서 많은 철학자들과 종교학자들은 짧은 시간 내에 사유로 스스로를 구원한 그녀의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데 깊은 인사이트를 준다고 생각하여, 그녀에 대한, 그녀의 카지노 가입 쿠폰에 대한 연구를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내 친구 철학자 W는 카지노 가입 쿠폰 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스스로를 반추해보고, 기도라는 수양의 형태를 통해 스스로를 단련하는 일렬의 과정에 주목했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그녀를 해석한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그녀의 삶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과 조금은 닮아있는 점을 발견하며, 오늘날 종교인이 가져야할 자세를 역설한다. 패트릭 우드하우스는 그녀가 내면과의 대화를 위한 '기도'라는 행위를 종교적으로 해석하고, 신을 만나는 방법이라 의미를 부여하지만, 나는 그녀가 했던 기도는 종교적인 의미보단 스스로와 대화하고 명상하는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내게 이러한 철학자의 관점, 종교인의 관점은 조금은 거창했다. 하지만 그녀의 카지노 가입 쿠폰에서 오늘날을 살아가는데에 생각해볼거리는 충분히 주었다. 특히 "증오"와 "혐오"를 대하는 태도에서다.
개개인의 심성을 독살하는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문제이다. "독일인들을 그냥 익사시켜버리자! 깡패 놈들! 독가스로 박멸시켜버려야해!" 일상 속 대화에서 이러한 의견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것이 더이상 불가능할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몇 주 전 갑자기 황무지의 무성한 잡초들 사이에서 망설이는 듯한 여린 풀줄기가 솟아 오르는 것 같이 구원의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단 한 명의 괜찮은 독일인이 존재한다면, 온갖 난폭한 군중들 사이에서 그를 보호해줄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이 괜찮은 독일인 한 명 때문에라도, 우리는 전체 독일인들에게 퍼붓는 증오와 혐오를 멈춰야하지 않을까.
- 에티 힐레숨, 1941. 3. 15 토요일 오전 9시 반 카지노 가입 쿠폰
그녀는 모든 증오의 마음은 두려움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내면의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해, 손쉬운 방법으로 남을 증오하는 방법을 택했다는 것이다. 요즘 사회에서 만연한 혐오들도 이와 비슷하다. 미국의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거대 권력과 맞서는 것은 지난하거나, 불가능한 싸움이 될 테이니,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약자를 대신 공격하는 것이 우리 시대 혐오의 원인이라 분석한 바가 있었다. 나치 시대도 다를 바 없었다. 에티 힐레숨은 그 본질을 깨닫고, 자신의 민족을 악랄하게 괴롭히는 독일인을 증오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독일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럴 수 밖에 없는 삶이 있었을 것이라, 인간은 원래 선(善)한 존재라는 것을 계속 생각했다.
나를 공격하는 사람을 혐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내가 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다. 온라인에서,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혐오를, 혹은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차별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 또한 그들을 혐오한다. 그들을 증오하지 않고, 어떻게 이해해보려 노력할 수 있을까. 이 지점에서 에티 힐레숨이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녀는 이러한 힘을 사람들과의 우정(연대)에서, 자연 속의 아름다움에서, 기도생활(명상) 속에서 찾았다. 이렇게 꾸준히 하면 정말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의문스럽다. 난 심지어 성악설을 더 믿는다. 인간은 선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하지만, 악을 행하는데는 아무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 바쁘고 경쟁적인 서울에서의 삶 속에선 핑계 같지만 남을 미워하지 않는 일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물론 지금 독일에 살고 있지만..ㅎ) 그럼에도 결국 남을 미워하는 건, 내 마음만 아픈 일이 아닐까. 연대하는 것이, 자연을 찾는 것이 힘들다면, 결국 스스로 계속 사유하는 것에서 시작해볼 수 밖에 없다. 그저 여러 마음들과 생각들을 이해해보려는 작은 노력이 쌓이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볼수도 있지 않을까. 그 작은 노력이 카지노 가입 쿠폰 쓰기에서 시작한다면, 나는 기꺼이 꾸준히 카지노 가입 쿠폰를 열심히 써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