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색깔과 맛이 있다
삶에는색깔과맛이 있다.우리는좋은 빛깔을 가진 사람들을 동경한다. 화려한 빛깔처럼 그의 삶 또한 달콤한 맛을 가지고 있을 것 같기에. 하지만이제 조금은 안다. 겉으로 반짝거리는 삶의 색과 삶의 맛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길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빛깔을 내는 겉모습과 달리, 그 삶이 내는 맛은 상대의 몸과 마음을 한순간에 일그러지게 하는 끔찍한 맛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름다운 색깔 속에 숨기고 있던 날카로운 비수가 우리를 순식간에 무릎 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
백화점 부도 후 공부라는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상처를 잊기 위해 어릴 적 꿈꿨던 대학 진학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씩씩하게 떠났다. 하지만 마음 안에 남아있는 상처, 불안감은 어쩌지 못한 채 그저 내 안을 맴돌았다. 누구에게라도 내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으면 마음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분노와 불안감이 시시 때때로 나를 휩싸며 정신을 혼미하게 했다.
그런 감정들이 불시에 나를 찾아올 때면 마음과 몸을 내 의지대로 주체하기 어려웠다. 불타오르는 감정이 사라지고 나면 다시 내 마음 안에 슬픔이라는 우울이 자리했다. 그렇다. 나는 웃으며 살고 싶었지만 내 마음은 많이 아픈 상태였다. 그런 마음을 어디에라도 가서 위안받고 싶었다. 그런 순간 누군가가 건넨 말 한마디는 그 무엇보다 달콤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다.
"어머, 현정이 어머니 아니세요? "
옆집에는 현정이 친구 시윤이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현정이에게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현정이에게 시윤이 이야기를 자주 듣기는 했지만, 그동안 시윤이 엄마를 마주칠 기회는 거의 없었다. 일일 시험지를 돌릴 때도, 백화점 일을 시작했을 때에도 새벽 6시에 나가 자정이 넘어야 퇴근하는 일상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카지노 쿠폰를 처음 만난 건 아이들이 학교로 떠나고 얼마 되지 않은 오전 8시쯤이었다. 그날 아침, 손에 들린 비닐봉지 안에는 분홍색 국물과 음식물 쓰레기들이 뒤섞여 있었다. 봄이 성큼 다가와 따뜻해진 기온이 이들의 악취를 더 심하게 만들었다. 안 되겠다 싶어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옆집 문도 동시에 열렸다. 엉거주춤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내게 카지노 쿠폰는 우아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시윤이 엄마라고. 카지노 쿠폰는 엄마라고 부르기에는 젊고 아름다웠다. 시윤이 엄마라는 소개를 듣기 전에는 웬 아가씨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쓰레기 버리러 가시나 봐요. 현정이 어머니 맞으시지요? 한번 뵙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네요. 호호호호.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서 차 한잔 하실래요?"
카지노 쿠폰는 내 손에 꼭 들려 있는 금방이라도 비닐을 뚫고 나와 터져 버릴 것 같은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들어 있는 투명한 비닐봉지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카지노 쿠폰에게 알겠다고 이야기하며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 찬 비닐봉지를 두 손으로 안고 계단으로 향했다.
일면식도 없었던 카지노 쿠폰와 나는 그날, 카지노 쿠폰의 집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내 삶에 대한 이야기로 꾸려졌다. 카지노 쿠폰는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적절한 공감과 함께. 카지노 쿠폰의 아름다운 얼굴과 진심을 담은 리액션은 일일 시험지를 했던 이야기, 백화점 부도가 났던 이야기, 그리고 이제는 대출을 받아 그 돈으로 대학에 가려고 공부하려는 이야기까지 모두 털어놓게 만들었다. 사실 나는 얼굴을 처음 본 카지노 쿠폰에게 내 사정을 털어놓아야 할 정도로 지쳐있었다. 그때 내 마음속은 황량하고 깊은 상처로 몸부림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를 흥미롭게 한참을 듣고 있던 카지노 쿠폰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머, 어머. 대단하시다. 그렇게 힘드셨는데 일어서신 거 보니까요. 우리 아저씨도 사업하거든요. 저도 그 마음 알지요. 저희도 그랬어요. 한 때 현정이네 엄마처럼 그런 적이 있었다고요. 다행히 지금은 잘 일어섰어요. 사업이 다 그렇지요. 호호호호호"
아저씨가 사업을 한다는 카지노 쿠폰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카지노 쿠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가구와 그림, 집 안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겉보기에도 값비싼 값을 주고 샀을 것 같은 가죽소파, 벽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는 텔레비전, 고급스러운 장식과 명화들. 집 안 여기저기 둘러보는 내 시선을 확인한 카지노 쿠폰는 내가 앉아 있는 식탁도 해외에서 몇 달을 기다려 수천만 원 주고 구입한 것이라며 웃으며 말했다.
"음... 그럼 현정이 엄마는 그 돈 모두 보험회사에서 대출받으신 거예요? 몰랐는데 보험회사 대출도 괜찮네요. 그래도 3년 공부하시려면 돈이 꽤 들 텐데...얼마쯤... 대출받으셨어요?"
카지노 쿠폰가 가느다랗게 예쁜 눈으로 살그머니 눈웃음을 지으며 나에게 물었다.
"3천만 원이요."
그때 왜 카지노 쿠폰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패를 모두 보여 주었는지 아직도 그때의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카지노 쿠폰는 3천만 원을 대출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를 향해 알 수 없는 희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카지노 쿠폰 뒤에 서있던 하얀 안개꽃도 카지노 쿠폰와 함께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금옥 선생님, 있다가 6월 모의고사 상담 있으니 상담실로 오세요."
언어 수업을 마치고 종합반 담임 선생님 B가 나를 호명했다. 재수 종합반에서 유독 나이가 많은 나에게 그는 항상 금옥 선생님이라 불러 주었다. 공부를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현재 고3 수험생과 재수생들이 치르는 6월 모의고사라는 것을 보았었다. 이번 주는 그 모의고사에 대한 학생 상담이 이루어지는 기간이었다. 3월에 공부를 시작했으니, 3개월 공부하고 고등학교 전 범위에 해당하는 시험을 보게 된 것이다. 6월 모의고사는 내 기본 실력을 측정해 보는 시험이 되었다.
수업을 마치고 선생님 B가 있는 2층 교무실로 향했다. 이미 다른 반 아이들도 선생님들과 심각한 표정으로 상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거의 울듯한 표정을 짓는 학생도, 웃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학생도 있었다. 성적표에 적힌 숫자가 그들의 표정을 만들어 냈다. 선생님 B가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 대충 짐작은 갔지만 막상 상담을 하려니 떨리는 마음은 어찌할 수 없었다.
"금옥 선생님, 오셨어요? 어서 앉으세요."
선생님 B는 친절하게 인사하며, 내 안색을 살핀다.
"음... 모의고사를 봤는데요. 금옥 선생님도 채점해 보시고, 성적표도 받아 보셔서 아시지요. 아직은 노력해야 할 부분이 많아요. 그런데 금옥 선생님, 혹시 올해 11월에 있을 수능을 준비하고 계신가요?"
그의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생각 같아서는 올해 수능을 보고 싶었지만 현재 전국 하위 10%에 위치한 성적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네. 선생님, 사실 20년 전 공부한 내용이라 생소하기도 하고요. 방향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재수 학원에서 고등학교 3년 진도를 나가면서 다녀볼까 싶어요."
3년 동안 재수 학원을 다니면서 고등학교 전 과정을 공부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은 선생님 B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금옥 선생님, 3년이요?"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손사래를 쳤다. 그는 내 계획이 효율적이지도 않고 비용도 꽤 많이 들기 때문에 다시 생각해 볼 것을 권했다.
"금옥 선생님,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지금 다니시는 재수종합반은 3년 고등 과정이 1년으로 압축되어 있는 시스템이에요. 재수학원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금옥 선생님 실력으로는 1년으로 압축된 과정을 따라가기도 어렵고요. 거기다 한 달에 학원비가 100만 원이니, 1년이면 1200만 원이고, 3년이면 3600만 원이고요. 비용도 만만하지 않아요. 그리고 그렇게 3년 다니신다고 해도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예요. 오히려 중간에 지칠 가능성이 커 보여요. 제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요. 혹시 이런 방법은 어떨까요?"
선생님 B는 나이 든 아줌마가 와서 고등학교 수업을 듣기 시작해서였을까. 담임 선생님으로서 의무감 때문이었을까. 그는 아줌마의 꿈을 조금이라도 현실적으로 실현해 주기 위해 여러 방편을 생각해 본 듯했다. 3개월 정도 만난 선생님 B의 배려가 따뜻하게 전해져 왔다.
"금옥 선생님, 여기 재수 종합반 말고 성인들만 받는 고등학교 프로그램이 있더라고요. 그 과정은 어떠세요?3년 과정인데 고등학교 다니듯 다니는 프로그램이에요. 비용도 상당히 저렴하고요. 괜찮으시면 여기에 한번 문의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는 자신의 말을 모두 꺼낸 후, 쓰고 있던 까만색 뿔테를 고쳐 쓰며 내 표정을 살폈다.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에게 생각해 보겠다, 그리고 고맙다는 이야기만 남긴 채 상담실을 빠져나왔다.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는 시윤이 엄마를 처음 만난 날은 벚꽃이 흩날리는 3월 마지막날이었다. 그 후 평일에는 학원 수업 때문에 카지노 쿠폰를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4월부터는 학원에 더 일찍 등교했기에 카지노 쿠폰와 시간대가 맞지 않았다.
하지만 카지노 쿠폰는 주말마다 우리 집 벨을 부지런히 눌러댔다. 어떤 날은 맛있는 부침개를 했다고 한번 맛보라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침개를 들고 싱그럽게 웃었다. 어떤 날은 사업을 하는 남편이 미국에 다녀왔다며 고급스러운 양주 한 병을 건네기도 했다. 그렇게 카지노 쿠폰의 이유 없는 호의는 계속되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카지노 쿠폰의 웃음을 담뿍 담아. 카지노 쿠폰가 건넨 선물과 함께 내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호감과 부채가 쌓이고 있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도 어서 나가려는 어느 보통날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누가 현관문을 세게 두드렸다. 현관문을 열고
누구세요라고 말하며 얼굴을 살짝 밖으로 내밀자,
“현정이 엄마! 저예요. 시윤이 엄마예요 “
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시윤이 엄마 아침부터 무슨 일이에요?”
“현정이 아빠랑 애들은 학교 갔으니 안으로 들어와서 앉아요. 커피 드실래요?”
“네, 할 이야기가 있어서요.”
카지노 쿠폰가 무슨 일 때문에 찾아왔는지 궁금해하며 주전자에 물을 담아 가스 불에 올려놓았다. 물을 받으며 시계를 힐끔 바라보니 학원으로 출발하기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 시윤이 엄마 자! 커피 마셔요.”
시윤이 엄마는 커피를 받아 들고, 음미하면서 우아한 모습으로 한 모금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함께 커피를 마셨다.
“ 시윤이 엄마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
“ 현정이 엄마한테 부탁하나 해도 될까요?”
“뭔데요. 들어줄 수 있으면 들어드리고, 내가 들어드릴 수 없으면... 음, 음. 하하하 말해봐요”
“저 있잖아요. 미안하지만 저번에 보험회사에서 3000만 원 대출받으셨다고 하셨잖아요”
“네, 그런데요. 대출받은 게 뭐, 이상한 거 있나요?”
“아니요. 현정 엄마, 그 돈 며칠만 빌려주면 안 될까요? 제발... 요.”
시윤이 엄마가 조금 주저하는 듯한 애처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나보고 돈을 꾸어달라고 하는 거야 뭐야, 아침부터 입장 난처하게 시리.......’
갑작스러운 시윤 엄마의 부탁에 당황스러웠다.
고민하는 순간, 시윤이 엄마가 갑자기 내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았다. 가느다랗고 티 없는 카지노 쿠폰의 손이 두툼하고 거친 내 손 위에 얹어졌다.
“부탁 좀 드려요. 3일만 빌려주세요. 제발요. 현정이 엄마...”
카지노 쿠폰는 울듯한 표정으로 사정하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 아저씨 사업이 어려운 상황인데 어머니가 많이 아파 병원비가 필요하다는 것이 돈을 빌리는 이유였다. 내 마음 안에 쌓여 있던 카지노 쿠폰에 대한 부채들, 그동안 시윤이 엄마가 나에게 샹그르르 웃으며 건네주었던 부침개, 김치, 액세서리, 양주 등 소소한 선물들이 스쳐 지나갔다. 여기서 안된다고 하면 이것저것 받아먹고 입 씻는 나쁜 여자가 되는 것만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이미 나는 카지노 쿠폰가 뿌려놓은 새침한 덫에 걸려들어 있었다.
‘옆집이 우리보다 더 잘 사는데 뭐 별일 있겠어... 안된다고 하는 게 더 염치없어 보이잖아.. 어쩌지.’
그 돈만은 안된다고 말하라는 내 마음속 외침들을 허영이라는 마음이 다가와 모조리 부수어 버렸다. 지금까지 카지노 쿠폰에게 받아온 것이 있었기에 쉽게 거절해서는 안될 것만 같은 마음만 들기 시작했다. 그까짓것.
“그래요 빌려드릴게요.”
여우에게 홀린 것처럼 내 입에서는 알겠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학원 가방에서 새파란 지폐 500만 원을 꺼내 건넸을 때, 카지노 쿠폰와 내 앞에 놓인 커피 잔에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카지노 쿠폰의 입술에 닿았다 내려온 커피잔에는 새빨간 립스틱 자국이 장미 꽃잎 같이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카지노 쿠폰가 고맙다고 웃고 있었다. 마법 같은 시간이 우리를 스쳐가고 있었다. 그 마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고나 있는지, 나 역시 카지노 쿠폰를 향해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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