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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노아 Feb 07. 2025

집 근처에서 카지노 게임 봤다고?


양평에서 시골 생활을 하고 있는 독서 모임의 리더가 오늘 아침 모임을 시작하면서 가볍게 이 말을 던졌다. 07화 드디어 카지노 게임와 독수리를 만났다!양평에서 카지노 게임 봤다는 말에 모두의 귀가 쫑긋 섰다. 아마도 밤사이 산돼지들이 지나간 발자국을 호랑이의 것으로 해석한 것 같았다. 리더는 그 발자국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 같지만, 현재 한국에서 카지노 게임 볼 수 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당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반박하지 않았다. 발자국만 봤을 뿐, 실제로 산돼지나 카지노 게임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리더의 호랑이 이야기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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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쌓인 곳에 남아 있는 동물의 발자국은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 발자국을 남긴 동물의 실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의식은 분명히 그 발자국을 만든 카지노 게임를 인식하고 있다. 그 발자국의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호랑이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호랑이의 발자국이 된다. 만약 그 발자국이 신의 흔적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신의 카지노 게임를 증명하는 것이 된다. 내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명확한 증거가 되기 때문에, 그 증거를 남긴 카지노 게임가 누구인지 내가 정하면 그것은 증거를 바탕으로 한 실체가 된다. 이것이 바로 창조가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나는 마치 눈이 쌓인 곳에서 살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눈 위에 흔적을 남기는 과정은, 실제로 그 카지노 게임를 보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가 된다. 그 창조물을 직접 보지 못하더라도, 흔적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카지노 게임하는 것처럼 믿게 된다. 이처럼 발자국에 대한 인식은 그것을 만든 카지노 게임로 승화되어 나의 의식에 각인된다. 이 생각을 확장해 보면, 나의 의식 속에는 내가 직접 본 적도, 경험한 적도 없는 많은 것들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주, 영혼, 천사, 악마, 천국, 지옥 등은 내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나의 의식 속에 실제로 카지노 게임하는 것처럼 자리 잡고 있다.




현실에 발을 딛고 생각해 보면, '창조'라는 행위는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 것 같다. 발자국을 통해 카지노 게임를 인식시키는 것처럼, 나의 오감으로 확인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면, 그것에 대한 실체의 유무와 상관없이 창조가 가능한 것 같다. 즉, 세상에는 자국이나 흔적을 남길 수 있는 눈 쌓인 공간들이 많기 때문에, 빈 공간의 눈 위에 자국이나 흔적을 남기면 보이지는 않지만 카지노 게임할 법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창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자국 하나 또는 흔적 하나로 카지노 게임를 만들어내는 것이 창조의 한 방법이 되는 셈이다.


심오한 우주를 직접 보지 못했지만, 지구, 태양, 은하를 이해하면서 그 이상의 영역을 포함하는 우주라는 카지노 게임를 인정하게 된다. 내가 상상하는 우주가 정확한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뒷받침하는 흔적들이 있기 때문에그것을 믿게 된다. 그런데 내가 인정하고 상상하는 우주는 실제 거대한 우주의 카지노 게임 중 아주 작은 한 부분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이렇게 생각을 확장해 가다 보면, 지구와 태양이라는 발자국의 증거로 내가 창조해 낸 우주라는 카지노 게임도 더 큰 무언가에 비하면 아주 작은 점과 같을 수 있고, 내가 알고 있는 우주를 포함하는 더 큰 우주에는 무수히 많은 창조물들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으로 검증이 되든 안 되든, 그 광활한 우주에 대한 나의 정의는, 독서 모임의 리더가 '양평의 눈 위에 찍힌 발자국은 호랑이의 것이다'라고 정의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퍼스낼리티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유형의 카지노 게임양식을 형성하고 자신의 의식에 창조성을 더하며,특정한 시스템 안에서 길을 개척해나가는 동안 부딪히는 현실의 장애물을 무너뜨릴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주1)




눈 위의 자국과 카지노 게임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해 보이지만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내가 보고, 만지고, 느끼고, 경험하고, 살아가고 있는 자연이라는 실체를 흔적 또는 자국이라고 한다면, 이 자연을 만든 카지노 게임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 카지노 게임를 내가 직접 본 적도, 만난 적도 없지만 흔적을 남겼기 때문에 실제로 카지노 게임한다고 믿게 된다. 이 거대한 자연은 분명히 카지노 게임하는 흔적이기 때문에, 이를 만든 카지노 게임는 예사롭지 아닐 것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나는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한다. '과학은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이다'라고 말이다.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카지노 게임하던 것을발견하거나 연결해서 논리를 일구는과정이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새로운 창조가 아니라, 이미 자연의 원리 속에 카지노 게임하던 것을 발견해 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이 자연을 이해하는 과정, 자연의 원리를 이해하는 과정으로 해석된다.


결국, 내가 살아가는, 내게 보여지는 세상은 우리 의식을 너머선 거대한 어떤 카지노 게임에 의한 창조적 산출물일 뿐이다. 다차원적인 인간 개개인의 자아가 어떤 실체를 감지하고 자신의 목적이나 가치관에 따라 정당하게 탐구하여 자신의 지각으로 변환시킨 후 새로운 카지노 게임와 교신함으로써 산출한 것들이 실체라 불리는 것이 아닐까?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새로운 것들, 원리들이 만들어졌지만, 이것들 모두가 이미 카지노 게임하던 것을 찾아내고 발견해 낸 산출물이 되는 셈이다. 나 스스로 카지노 게임하지 않던 것을 만들어내어 '창조'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결국, '창조'는 나의 관념 속에서 의미를 가지며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때 사용된다. '독서를 통해, 글쓰기를 통해 새로운, 그리고 또 다른 나를 창조한다'와 같이 관념적인 의미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내가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그 어느 것도 진정한 의미의 창조가 될 수 없다. 단지 자연의 이치를 이해하고,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자연의 현상을 드러낼 뿐이다.




흔적과 자국은 보이지 않는 카지노 게임를 창조해 내는 근거가 되고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내 관념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치 있는 작업이다. 집 뒤뜰 눈 위의 발자국을 호랑이의 것이라 하여 호랑이를 창조해 내고, 내가 속해있는 자연은 초월적인 카지노 게임의 흔적이라고 하여 초월적인 카지노 게임를 창조해 낸다.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성장하는 나를 경험하기에 새로운 나를 창조해 낸다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세상에 드러난 어떤 것도, 내가 만들어낸 어떤 것도 낡은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된 무언가라는 것이다. 눈에 똑같이 보인다고 어제의 것이 아니며 눈에 안 보인다고 낡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이 알든 알지 못하든 새날, 새시간에 새로운 삶을 살았다면 무엇이든 새로운 창조라는 의미다. 인간이 창조자라는 단순한 명제가 이렇게 귀결될 수 있는 것이다.


주1) 제인로버츠, 육체는 없지만 나는 이 책을 쓴다, 2000, 도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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