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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bra윤희 Jan 10. 2025

빈 카지노 게임의 유혹

소망에 관한 이야기 1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주연의 영화 <파 앤드 어웨이 – Far and Away에서, 1982년 서부 아일랜드, 지주의 딸로 태어난 니콜 키드먼이 소작농의 아들 톰 크루즈를 우연히 만나 호감을 느끼고 기회의 땅, 미국으로 둘이 함께 도망치자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 니콜 키드먼은 꼭꼭 숨겨두었던, 성경책만 한 틴케이스를 꺼내 보여준다. 거기엔 미국 이민 거주자에게 20만 평의 땅을 준다는 광고가 적힌 종이가 있었다.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탈출하고 싶었던 그녀의 거친 소망이 그 틴케이스 안에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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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이 영화를 보고 톰 크루즈, 니콜 키드먼, 아름다운 두 배우의 매력에 푹 빠졌다. 작은 키에 다부진 몸매, 손가락을 빗살처럼 벌려 쓸어내리고 싶은 부드러운 머릿결,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눈동자의 배우 톰 크루즈에 푹 빠져서 사진을 모으고 기사를 모으고, 꽤 오랫동안 그의 행보를 추적했다. 마루 인형의 현신인 듯, 하얗고 아름다운, 니콜 키드먼의 매력도 못지않았었다. (두 사람이 결혼했을 때, 진심으로 축복했을 정도로 난 그 둘을 사랑했다.)


영화 속엔 둘이 사랑을 키워나가는 장면, 사고로 인해 헤어졌다가 미국에서 다시 만나 함께 땅을 차지하는 장면 등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이 많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니콜 키드먼이 틴케이스에서 광고지를 꺼내며 톰 크루즈를 설득하는 장면을 여러 차례 돌려봤다. 그리고 그때부터 작은 카지노 게임에 다소 집착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니콜 키드먼이 들고 있던 틴케이스 같은 카지노 게임를 모으다가, 나중엔 작고 견고한 종이카지노 게임들까지 모두 버리지 못하고 모았다. 과자, 초콜릿, 색연필이 들어있던 틴케이스, 향수, 벨트, 시계, 티백이 담겨있던 종이카지노 게임. 어서 빨리 카지노 게임 속 주인공들이 사라지고 빈 카지노 게임로 남겨지길 기다린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선물을 전할 때 유용하게 쓰이지 않을까, 내 잡동사니를 정리할 때 필요하지 않을까, 뭔가.. 뭔가를 담고 싶어지지 않을까.단순히 카지노 게임가 예뻐서라기보다는, 비어버린 카지노 게임에 뭔가를 담을 날, 내 것으로 채울 날이 올 거란 상상과 기대를 하며 모았다.


뭔가 들어있는 카지노 게임를 열어보니 잡다한 것들이 담겨있다. 책 띠지, 기억나지 않는 영수증, 하늘이나 바다가 찍힌 사진, 반짝이는 것들, 예쁜 돌멩이, 조개껍질, 너무도 작은 수첩, 귀여워서 쓰지 못한 지우개, 잊고 싶지 않은 편지, 쓸모없어진 증명사진, 알 수 없는 병뚜껑까지.

상자 모으는 습관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서 가족들과 지인들도 나의 이런 수집욕을 잘 알고 있다. 물건이 담겨있던 상자가 조금 예쁘고 단단하면 모두 버리지 않고 나에게 보여준다. 사진으로도 보여주고, 직접 가져다주기도 한다.


“이 카지노 게임 엄마 가질 거야? 버릴 거야?”

“그 카지노 게임 예쁜데, 윤희 줘라. (아빠)”

“초콜릿 담겨있던 틴케이스인데 언니 생각나서 안 버리고 가지고 있었어.”


아주 가끔, 대청소하며 남겨진 카지노 게임 중 몇 개를 정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쉽게 버려지지 않는다. 왜 그렇게 작은 카지노 게임들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긴 시간 내 곁에 두려는 걸까. ‘버리는 것이 최고의 인테리어’라는 생각으로 살아오고 있지만, 어떤 미련이 있어서 작은 카지노 게임만큼은 냉큼 떠나보내지 못하는 걸까. 내가 담고 싶은 건 무엇일까. 왜 나는 카지노 게임 안에 들어있던 물건보다 그 물건이 담겨있던 작은 카지노 게임에 더 눈길이 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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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넷플릭스를 통해 <화란이란 영화를 봤다. 영화의 주인공, 18살 연규는 새아버지의 폭력과 고된 삶을 이겨내며 살아가고 있다. 그런 연규에게도 낡은 틴케이스가 있다. 화란(和蘭), 즉 네덜란드로 엄마와 떠나고 싶은 소망,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차곡차곡 모아둔 돈, 네덜란드가 담긴 사진 몇 장이 그 안에 들어있다.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연규가 시궁창 같은 삶에서 빠져나와 꿈꾸던 곳으로 떠날 수 있길 빌었지만, 연규는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하게 되고, 틴케이스는 무참히 파괴되어 바닥을 뒹굴었다. 깊은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진 연규처럼 나도 한없이 슬퍼졌다.



내가 카지노 게임에 담고 싶은 것은 나의 소망이었으려나. 내 인생을 바꿔줄 결정적인 사건, 내가 가진 가치관을 일거에 변화시킬 수 있는 특별한 사람 혹은 특별한 이야기, 내 삶에 파란을 일으켜줄 소중한 경험, 밍밍한 내 삶을 짜릿하게 만들어 줄 그 무언가. 나는 아마도 변화하고 싶고 탈출하고 싶은 소망을 키워왔던 것 같다.

중년이 된 지금도 작은 상자를 모은다. 비록 내 소망대로 사용되지 못한다 해도, 계속 모을 것 같다. 담지 못할 소망일지라도 이루지 못할 약속일지라도, 언젠가는 채워지겠지.


예쁘고 작은 상자들이 날 부른다. 포기하지 말고 계속 모아 달라고. 계속 소망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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