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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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나루 #10에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3월의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두고 있다. 낮 햇살은 제법 온기가 넉넉했다. 하지만 밤의 추위도 매서웠다. 이것은 다가올 듯 말 듯한강은숙의 변덕스러운 마음 같았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환절기의 날씨란 여자의 망설임과 다를게 뭐가 있을까.
그럼에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얼굴엔 새 봄빛에 대한 기대감이 성질 급한 쑥의 새싹처럼 돋아난다. 얼굴엔 화기가 돌고 이마엔 맑은 빛이 오르고 눈에는 총기가 들었다. 아니다, 알고 보니 사람들 모습이 아니다. 강은숙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또 김길환의 마음이었다. 그도 강은숙과 똑같았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을 그렇게 만들었다. 세상이 예뻐지기 시작한다. 동글동글 뽀죽뾰죽 보드라운 버들강아지를 닮은 목련의 생명들이 벌써 파란 하늘에서 모둠 지어 솟아나 있다. 너무 이뻐서 안타까운 어린 조카의 꼬물거리는 하얀 손가락처럼 세상은 점점 환해졌다.
새나루 마을 단지에서 강은숙이 출발했다. 토요일 오후가 제법 지난 무렵이었다.잘 보면 연하늘 빛이 도는 자신의 진갈색 PEUGEUT 508 세단을 타고 그녀는자신의 본향집으로 향한다.
푸조는 투명한 바닷물 속을 비올라 선율처럼 가르며 날씬하게 나아가는 은색의 물고기 같았다.
달리면서 바라보는 들판이다. 하늘아래 끝없이 펼쳐진 평야에 비단 카펫의 지르놓음과같은 고속도로에는 그 가생이부터 저 멀리 들판 끝자락까지 해뜨기 전 새벽 미명같은 봄기운이 가득했다. 그리고 고속도로의 모습이 사라지는 지평선의 끝부분에는 아지랑이가 피어있다. 가보면 뭔가 신비한 것이 있을 것 같은 아스라한 그곳을 보며 강은숙은 생각했다.
'우리 인생은 아지랑이와 같은게 아닐까...
저 멀리 무엇이 있는지 비로소 도착해 봐야 아는 허상일까?'
'거기에 도착하면 여기서 상상했던 그것은 다시 저 편 멀리로 달아나버릴테고또다시다가오라는 손짓을거기서 하겠지?다시자기를 쫓아와 보라고...'
'그것을 쫓으려면 또다시 달려야 하는데, 나는 역마, 제대로 쉬지도 못하며 달리고 있는역마...힘겨운내숨소리,인생이라는 고달픔...'
'저아지랑이가진짜 좀 쉴 수 있는실체이고이제는참한 종착지가 되었으면...'
알 수 없는기대감과 두려움이 그녀의 마음을차지하려고서로밀어내는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그녀의가슴에는곧 피어날벚꽃 알맹이처럼 바람이몽우리져갔다.
봄의미명이화기를 돋우었고마음이붉어져만갔다.
그녀의 근무지인 지방과 지금 올라오고 있는 본향은 실제로 보면 먼 거리는 아니다. 길만 잘 타면 한 시간 오십 분 거리. 하지만 몇 년 전에 지방 근무지로 회사가 이전 후 그녀는 자주 올라오지 않았다. 그곳에서의 생활이 아직은 자유롭고 즐거웠다. 일 년에 집에 올라오는 것은 겨우 몇 번, 명절이나 어버이날이나 중요한 집안 행사 정도가 고작인 반대편 귀향이었다. 그런데 작년 겨울부터 달랐다. 자의든 타의든 계속 집에 올라올 일이 생긴다. 이유가자주 생기고 있다. 그래서 얼마 전 강은숙은 김길환에게 말했다. "지난 몇 년치 보다 최근에 오는 게 더 많은 것 같아요."
김길환은 주말 오후 도서관에서 책을 뒤척이고 있다. 오전에 강은숙과는 몇 번의 카톡이 오갔다. 그녀가 올라온다는 기별. 그래서 역마 같은 푸조를 달리는 강은숙의 마음엔 조바심이 붙었다. 오후가 늦어지고 해가 붉어질수록 도로에는 조급증이 깔렸다. 운전 중에 그녀는 실시간 중계방송하듯 김길환에게 진행상황을 계속해서 카톡으로 날려 보냈다. 내비게이션에 뜬 도로상황을 캡처해서 보내기도 했다. 길이 막히는 구간에서는 애교 섞인 짜증의 감정을 김길환에게 보냈다. 그럴수록 강은숙의 마음이 느껴지고 그럴수록 김길환의 마음은 점점 더 밝아졌다. 그의 마음에 부푸는 기쁨은 이제 막 바람을 넣기 시작한풍선처럼 봉긋하게 커져갔다. 그녀도 자신을 빨리 보고 싶어 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운전 중에도 두어 차례 통화를 했다. 이 전화를 통해 김길환이 일정을 제안했고 그 제안에 따라 강은숙은 셋째 언니와 일정을 다시 조율했다. 그렇게 해서 강은숙은 일단은 엄마의 집으로 가서 여장을 푼 후 김김환을 만나기로 했다. 그러는 도중에 갑자기 고속도로가 뚫렸나 보다. 예정보다 늦게 도착했지만 늦을것으로 예상한도착 시간보다는 빨리 도착했다.
우광아파트 정문에서 약간 비켜난 근처에서 김길환과 강은숙이 만났다. 날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그녀의 엄마집 동의 위치를 정확히 알았다면 처음 잠깐의 엇갈림은 없었을 것인데 김길환은정작차는 그쪽에 대놓고 일부러 반대편 정문 출구까지 가 있느라고,또 강은숙은 그곳을 못 찾아서헤매느라고안 그래도 지연된 시간이 지체되었다.
둘이 조우한 시간은 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오후도 아닌, 이것을 저녁이라고 불렀던가? 그들은 그때 만났다.
생에서 이른 만남은
남은 여정이 있기에 종종 중간에서 바뀌기도 하고
생에서 늦은 만남은
그 앞에 이미 다른 여러 여정의 길들을 지나왔기
때문에 그대로 종착까지 이어진다.
-운명학 인연법 中-
강은숙의오후 운전이 힘들었나보다. 갑작스러운 환절기 밤 추위도심하게 느껴지는지 어깨를 움츠리고떨고 있는듯이 보였다. 눈빛만기대심으로 반짝였다. 그녀가 입은 옷은 낮에는 때에 알맞았던 트렌치코트였지만 밤이 되니 계절을 너무 앞서간 성급한 사람의 마음을 보여주는 차림이 되어버렸다.
환절기의 변화처럼, 사람의 마음이(운이)이 변화하는 때에는 이쪽인지 저쪽인지 자기도 모르게마음이오락가락 하며 모든 것이 변덕스러워진다. 갱년기처럼 말이다. 김길환 눈에는 이런 강은숙의 모습이 귀엽게만 보였다
둘은 저녁을 예약한 식당까지 걸어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이미 무리였다. 김길환은 서둘러 그녀를 칼바람과 추위로부터 피신시켜야 했다. 화다닥 차 문을 열고 서둘러 그녀를 앉혔다. G80 내부에는 여전히 온기가 잔잔해서따뜻하고 안온했다. 그녀의 얼굴이 비로소 편안해진다. 아주 조심스럽게.. 차가 출발했다.덜컹!
그는 기와가 얹힌 건물의 식당을 생각하고 예약을 넣었다. 그리고 그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예약자의 이름을 말하자 조회를 하던 직원들이 잠시 후 갸웃갸웃하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되었나 보다. 이를 눈치 챈 김길환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밖은 이미 검은 어둠이었다.
둘은 이미 어두운 길을 걸어온 상태이다.
다시 어둠 밖으로 나갈 수는 없었다.
김길환은 지금이라도 자리를 협상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눈치 빠르고 재치 있는 강은숙이 매장 내 상황과 손님들의 식사상태를 순식간에 둘러보곤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강은숙은 오류가 있었다고 말하고 직원들과 협상을 시도 중인 김길환을 잡아끌고 밖으로 나왔다. 김길환이 실수한 자신을 자책하고 있을 때 한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 예약된 진짜 식당이다.
김길환... 그는 자신이 예약을 해놓은 식당임에도 결국은 강은숙의뒤를 따라갔다. 멀리서 보니 그 김길환의 뒤를 무엇인가가 또 따라가고 있었다. 가로등 조명에 만들어진 김길환의 어리바리한 허당 뒷그림자였다.
그래 뭐든너무 순탄하기만 하면 재미가 없다. 고되고 긴 여정은 그만큼 견고해지고그 단단함을 형성시킨다.
강은숙은 연하늘색 청바지에 하얀색 얇은 니트를 입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아이보리색 코트를 걸쳐 입었다. 그녀는 크고 시원해진 눈으로 김길환을 마주하고 앉았다. 식당의 조명빛이 그녀의 숱 많은 머리가 궁금해서 만져보려고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찰진 포마드기름인 줄 알았다가 그 윤기에 미끄러져 붙어있지 못하고 이내 흘러내린다. 검은 듯 짙은 갈색으로 마블링 같은 조화를 부리며 그녀의 헤어는 풍부한 케라틴을 먹은 듯탐스럽고 풍성했다. 김길환이 생각하는 학교 선생님의 이미지 그것처럼, 긴 단발보다는 조금 더 길게, 그리고 야무지게, 정수리 아래 4cm 뒤쯤부터 그 헤어가 커다란 집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강은숙의 바르고 착한 심성처럼 단정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성장과정 약간에 지금의 직장 상황을 섞어 일상적인 이야기를 했다. 어릴 적 바로 위 셋째 언니랑 많이 싸웠다는 얘기, 광화문에 있는 회사를 다닐 때 출퇴근이 너무 힘들었지만 언니가 절대로 독립을 금지시켜서 힘들게 다니게 되었던 이야기, 그래서 지방에 내려가서는 자기의 집이 생겨서 너무너무 홀가분하고 좋았다는 이야기를 나지막한 가지에 앉은 작은 새처럼 풀어갔다. 김길환은 그녀의 말을 듣는 것이 즐거웠다. 정말 좋았다. 살면서 배움이란 끝이 없다. 김길환이 대화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첫째, 대화는 목적이 있어야 시작된다.
둘째, 대화에 목적이 있으면 끝이 금방 온다.
셋째, 결과적으로 대화에는 목적이 있으면 안 된다.
대화란 공유하는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다. 대화의 원래의 뜻이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communicare"에서 유래했다. 이는 "공유하다" 또는 "나누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두 명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서 정보, 생각, 감정 등을 주고받는 과정이다.
김길환이 강은숙에게 배운 건 대화법이었다. 그의 대화는 손봐야 할 부분이 많았다. 그는 그것을 모르고 살았다. 전에는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적어도 기억이 나는 부분부터는 이랬다. 직장에 필요한 업무상 대화법이그의 대화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했다. 업무의 특성상 짧은 제한된 시간에,상대방으로부터 최대한 빨리,필요한 정보를 구해야 했다. 상대방이 불필요한 말을 하면 할수록 골든타임이라는 아까운 시간이 가버렸다. 그래서 그는 대화의 대부분을 상대의 말을 끊거나 또는 말 중간에 치고 들어가 필요한 것만 묻고 급히 끝냈다. 그리고 그것의 습관화... 직장에서는 유능했겠지만 이것은 정확히는 대화가 아니었다. 듣는 능력이 점점 퇴화되어 갔다. 말도 점점 빨라지고 상대방이 듣기에는급박함이 느껴졌을 것이다. 게다가 그는 혼자 책을 읽는시간을 많이 갖다 보니, 그의 알량한 지식을 알아본 사람들이 그에게 도움을 구했고 그래서 주로 설명해 주고 알려주는 식으로 혼잣말 하는말패턴이 고착화되었다. 일방적인 교시에 다를 게 없었다. 이후는 뻔했다. 까마귀가 꺄르륵하는 것처럼 갑분싸가 되는 것만 같을 때가 많았다. 그런 식의 소통패턴이 오래 정착되다 보니 대화의 기본인 티키타카를 잃어버리고 강은숙과의 대화에서 큰 약점이 되어 버렸다.
그런 영향이었을까... 원래 말이 적지 않은 강은숙이었는데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아니면 어느 때부턴가 흥미를 잃은 그녀였을 수도 있었다. 말의 비중이 기울게 되니 그 대화의 공간을 채우기 위해 그가 말을 더 많이 하게 되었는 지도 몰랐다. 나중에 둘의 사이가 소원해질 무렵에는 아예 묻고 답하고 식의 질의응답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그와의 대화가 전화영어 같다고 했다. 더불어 그에게 가장 아픈 대목은 그에 대한 궁금증이나 질문이 없는 그녀의 태도였다. 이것은 그가 그녀와의 관계를 내내 고민하게 한 결핍이 되었다.강은숙이 김길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아닐까 하는 식으로 생각을 몰고 가게 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언젠가 김길환이 인간의 심리의 기원에 관한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그 감상을 적은 내용이 있다.
여성에게 있어서 대화란 생존과 직결이다.
짧게 설명하자면, 현대적 관점에서는 안 맞는 논리가 되어버렸지만, '원형'에 대한 내용이다.
원시시대에 남자가 목숨을 걸고 짐승을 사냥해 왔다. 남자는 이 식량을 여자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식량을 나눔 받고 자신은 물론 아이도 양육해야 한다.
남자가 사냥을 마치고 돌아온다. 쉬고 있는 남자에게 여자가 곁에 앉아 말을 한다. 오늘 하루 자신이 어떻게 지냈고 누구 때문이 기분이 좋았고 누구 때문에 속상했다는 등지난 며칠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한다. 즉 그녀의 '일상'을 말한다.
이때 남자의 눈빛이 여자에게 향해있고,그녀의 말을 들어주고 있다면,여자는 식량을 얻을 수 있다. 남자가 여자의 말을 외면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면 그 반대이다. 여자를 향한 남자의 경청과 바라보는 눈빛은 곧 사랑이다. 여자에게 사랑이란 그래서 생존의 본질이 되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한다는 증거는 그래서 대화이고 경청이고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이다. 이러한 원형은 여전히 현대시대까지 유전이 되었다. 뮘(meme)라고 할 수 있다.
대화능력은 현대시대에도 중요한 것이다. 이것을 갖춘 남자는 비록외모나 가진 것이 부족해도 여성들에게는 인기를 끌게 된다.대화가 단절된 연인이나 부부는 끝이 난다. 대화가 잘되는 사람과는 심지어 선을 넘기도 한다.
둘은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강은숙이 그녀의 삼촌 얘기를 꺼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삼촌이라는 사람은 김길환과 가장 친한 선배인 김춘오였다. 원래 김길환과 강은숙은 같은 직장이었지만 그들의 연결고리에 김춘오가 있었다는 것은 김길환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었다. 김길환은 즉시 전화기를 꺼내어 춘오 형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둘은 정겨운 얘기를 나눴다. 김길환은 김춘오의 아내와 자녀인 영초와 영승이의 이름까지 들어가며 안부를 묻고 반가워했다. 이때 강은숙은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머리를 다시 만지고 립스틱을 정비했다. 그러면서 귀 뒤로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그 이전에도 여러 번 일어나 거울 앞에 가서 머리를 만지고 립밤을 고쳐바르고 다시 자리로돌아와 앉았다.
그러고 보니 셋은 같은 직장에 적을 두고 있는 사람들이었다.그에게는 이 사실이 의미가 있었고 새삼스러운 상황으로 생각이 되었다.
김길환과 강은숙, 둘 만의 시간을 빛내줄 주문한 음식들이 시간을 두고 계속 나왔다. 그녀는 그때마다 음식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들을 무엇에 쓰려고 그러는지는 모르지만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그녀가 공들여 찍은 음식사진은 안에 치즈가 듬뿍 들어가쪽쪽 늘어지고 겉은 바삭한 감자전인 뉴욕치즈케이크를 닮은 퓨전음식이었다. 모양도 고급지고 두툼했다. 맛은 더할 나위 없었다. 나중에 후식으로 먹은 치즈아이스크림도 별미였다.
둘은 하나를 주문해 서로같이 떠먹었다.
한 그릇에 두개의 숟가락을 담글정도로 마음을 연 강은숙에게 그는 매우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이런 것을 식구라고 하는데...' 하면서 속으로는 혼자 너스레를 떨었다.
밤이라서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대신 따뜻한 물을 얻어 그것도 함께 나누었다. 그것만으로도 따뜻한 마음이 충분하게 공유되었다.
김길환은 강은숙이 조카들을 끔찍이 챙기는 것을 잘 알기에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 그 맛있는 치즈감자전케이크(정확한 명칭은 모르겠다)를 한판 더 주문했다. 그리고 남은 두 쪽과 함께 포장해서받아들고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였고그녀의 가족들 앞에서 그녀의 면을 더욱 세워주고 싶어서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유명한 빵간식을 샀을 때도 그랬다. 강은숙은 그가 왜 그렇게 자주그런 것들을 손에 쥐어주고 올려보냈는지아직도 그의미를 모를 것이다. 그녀에게는 작은 언니네 조카들에게 가져다 줄 선물이라고만 말했다.
둘이 밤길을 다시 걸었다. 그녀는 자신이 맨 가방이 그와 사이에 놓이자 걷는 도중 슬그머니 가방의 위치를 반대로 돌렸다. 그러나 걷는 길이 바뀔수록 그런 수고가 많아지자 아예 가방을 앞으로 고정시켜 버렸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김길환은 그녀가 자신을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지는 모르겠다.
가로등 아래 어둑한 길을 걸으며 김길환이 말했다. 김길환이 이룰 목표 중 하나인 작가 소개서를 그녀가 잘 다듬어 주고 고쳐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말이었다. 김길환이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소개서가 중요했다. 그 고민은 들은 강은숙은 직접 자필로 노란 종이에 자기소개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필사하듯 적어서 수정을 해서 보내주었다. 그 고마움을 전하는 말에그녀는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걷던 길이 마침내 그녀의 엄마집 앞에서 멈췄다.김길환이 강은숙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그리고 그의 차 뒷좌석 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제법 커다란 네모난 얇은 것이 잘 포장이 되어비닐봉지에 담겨있었다.김길환은그것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그녀의 손에 쥐어 준다. 강은숙의 다른 한 손에는 그녀의 조카들을 위한, 그녀의 방문을 더욱 빛내줄 아까 포장한 음식 선물이 온기가 살아 있는 채로 들려있다.
김길환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무쌍 눈까풀을 닮은 그림이에요". 정말이었다. 그 예쁘게 포장된 것은 유화 그림이었다.그가 열흘전 오만원권여러장을 건네주고아뜰리에서 산 유화 작품이었다.
강은숙은 뛸 듯이기뻐했다.
"무엇보다도 이 그림을 보고 저를 생각해 주신 것에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레베루가 다르시네요!!!"
그것은 페레로촤클릿과 함께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그해 봄을 앞두고 밸런타인데이 선물들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뛸 듯이 기뻐했던 그 그림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작품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였다.
그녀의무쌍 눈과 귓불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