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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Mer 라메르 Feb 12. 2025

사기의 시작

지켜지지 못한 약속은 사기일 뿐이다.



어느 날, 교수님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해외 대학의 카지노 게임어학과에 학과장 자리가 나왔는데 갈 생각이 있냐는 제안이었다. 가야 하는 나라가 어느 나라인지를 듣고 나는 망설이며 생각해 보겠다고 말씀드렸다. 나는 그때 한 학교를 이끄는 전임 강사로서기업체 출강도 나가면서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 대학에서 여러 사건들이 터지고 유학원 원장과 카지노 게임어교육원 원장의 횡포가 이어지고 있었지만 수업은 계속되고 있었고 나는 조금씩 다른 것에는 스위치를 끄며 나를 위한 시간을 늘려가야겠단 생각을 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일에 파묻혀서 내 청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여행도 하고 활동을 늘려갔다.

그래서 나는 바쁜 와중에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살겠다며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내 첫 해외 여행지였던 프랑스로 7년 만에 두 번째로 다시 떠났다. 기간이 길지 않았고 혼자 떠나는 여행이었기에 프랑스 남부 지역으로만 갔었다. 마르세유, 니스, 칸 등 남부를 여행하고 다시 파리에 들러 에펠탑 잔디밭에서 한가로이 앉아 테니스 경기도 보고 그렇게 돌아왔다.

또 그 후 살사 댄스 동호회에 들어가서 살사, 메렝게, 바차타, 차차 댄스를 하며 생활의 활력을 찾아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풀며 지내고 있었다. 동호회 활동은 반짝반짝 빛나던 나의 에너지를 더욱 발산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엄마의 첫 해외여행을 실현시켜 드리기 위해 우리는 같이 발리로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그해 즐기면서 사는 것처럼 그렇게 내 삶을 만들어 가며 지내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 인생에서 가장 활기찼고 빛났던 시기는 그때가 아니었나 싶다.


이때까지 나의 카지노 게임어 교육 경력은 6~7년 차였다. 그 사이 나는 여러 대학과 대학원, 기업체, 다문화센터 등에서 많은 경력을 쌓았고 특히 전임으로 일했던 그 대학에서는 2년 동안 내가 한 강의는 다른 사람들은 4~5년은 해야 하는 경력을 쌓을 정도로 쉬지 않고 그렇게 달렸다.




내게 연락을 주셨던 교수님과의 인연은 대학원에서 시작되었다. 대학원에서 교육 실습을 담당해 주셨기에 교수님으로부터 현실적인 교수법을 배웠고 조교 생활을 하면서 조언도 얻었다. 그래서 교수님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이어오고 있었는데 내가 박사 과정을 고심할 때에도 교수님은 여러 가능성을 내게 제안하시다가 '몽골'에 가서 카지노 게임어학과 학과장을 맡고 그 대학 총장님이 만드신 대학원의 박사 과정에도 진학해서 박사 학위도 받는 걸 내게 제안하셨다. 그리고 그 대학원의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는 그 대학원과 대학의 교수로서도 맡아서 활동하라 하셨다.

몽골에서 카지노 게임어교육의 전문가로서 명성을 떨쳐보라는 제안은 솔깃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나는 그때 몽골에 대해 알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카지노 게임에서도 충분히 잘 지내고 있었기에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남자친구가 이건 내게 좋은 기회라며 성장할 수 있도록 자신도 같이 돕겠다며몽골로 같이 떠나서 나를 지원하겠다는 말까지 더해주면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던 나의 고민은 '현실'이 되어 버렸다.


평소 나는 교수님을 신뢰했고 교육적으로도 조언을 많이 받으며 지내던 사이였기에 그의 제안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교수님이 내가 박사 과정에 진학하게 된 그 대학원의 카지노 게임어학과 학과장으로 계셨기 때문에 내가 그 대학원 진학을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그분은 오히려 내게 3년 안에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게 해 보자며 꿈을 불어넣으셨다.


또 그 대학원의 박사 과정은 사이버 과정으로 수업을 들을 수 있었고 카지노 게임 대학 학위가 아닌, 미국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해외에서 일하면서 박사 과정을 할 수 있다는 점은 내게 매우 큰 이점이 되기도 했다. 일을 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그 대학원에서는 조금 더 쉽고 편하게(?)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이 내게 유혹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는 우선 대학원에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총장님과 만나 여러 가지 그의 포부를 들었고 그는 내게 몽골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줄 테니 전임 교수로서, 카지노 게임어학과 학과장으로서, 그 학교를 대표할 수 있는 인재가 되기를 바라셨다. 또 내가 몽골에서 카지노 게임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기로 약속을 하시며 그것들이 모두 내게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확신을 주셨다.

그렇게 나는 평소 신뢰하던 교수님의 추천, 카지노 게임어교육계에서 꽤나 괜찮은 학교로 알려져 있는 대학교의 총장을 거쳐 '몽골'이라는 나라에서도 카지노 게임어학과가 있는 대학에서 총장을 하고 계신 분의 제안이었기에 더욱 신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미국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대학원의 총장으로 계시는 그 분과 대학원 때부터 뵈었던 교수님을 믿고급하게 몽골이라는 나라에 가서 살 준비를 하며 생전 처음 보는 '키릴 문자'를 익혀 가면서 그렇게 몽골어를 배우면서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


몽골행은 내 인생을 순식간에 바꿔 놓았다. 삶의 터전을 타국으로 옮기기 위해 나는 그동안 혼자 살던 오피스텔의 모든 짐을 컨테이너로 이삿짐을 몽골로 보냈고 내 모든 커리어를 정리하고 제2의 전성기를 몽골에서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준비했다.


급하게 준비해서 떠난 몽골은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그래도 살만했다. 해외 생활이 처음이었지만 나는 나름 잘 적응하는 편이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여름이었기 때문에 날씨도 나쁘지 않았고 울란바토르는 카지노 게임과 크게 다른 느낌이 없었다.

울란바토르는 우리나라의 1960년대와 2000년대의 모습을 모두 담고 있는 희한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부분은 정말 낙후되어 있었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적은 돈으로도 풍족하게 살 수도 있었고 은행 예금 이자가 15%가 넘을 정도로 이율이 높은 것도 꽤나 큰 매력이었다.

다만 내가 좋아하는 과일과 해산물은 먹기 힘들었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그 부분만 빼면 사람 사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졌다. 살아가면서 적응도 했던 게 나는 김치도 담가 먹고 카지노 게임에서 언니가 보내 준 택배도 받아 내가 해 먹고 싶은 카지노 게임 요리들도 해 먹으면서 큰 불편함 없이 그렇게 지낼 수 있었다.


위생적인 면이나 시설의 낙후는 깔끔 떨던 나에겐 조금 힘든 부분이긴 했다. 학교에서 처음 소개해준 집은 너무 더럽고 귀신이 나올 것처럼 무섭게 생긴 집이었는데 내 집을 구하기 전까지만 잠시 머물 곳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그 집 화장실이 너무 더러워서 나는 걸어서 10~15분쯤 거리에 있는 '라마다 호텔'까지 걸어가서 호텔 화장실을 이용해야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학교 행정 직원의 도움으로 학교에서 가깝고도 괜찮은 집을 빠르게 구할 수 있었다. 그 건물은 엘리베이터가 있는 9층짜리 건물이었는데 내가 살 집은 9층이어서 조용하고 깨끗해서 전 집에 비하면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역시 비교를 하면 감사함도 커지는 법인 것 같다. 그전에 너무 안 좋은 집을 경험하고 나서인지 그 집은 천국처럼 보였다. 집 가격도 중심가에 비해서 저렴했고 정남향 집이어서 햇빛도 잘 들어오는 집이라 내 마음에 들었다.


몽골 집들은 네모반듯하게 지어진 건물을 찾는 게 그때까지만 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기술이 부족한 탓인지 아파트를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았음에도 어딘가 삐뚤삐뚤하거나 틈새가 벌어져 있는 곳이 많았다. 일명 '몽골의 강남'이라 불리는 동네가 아니고서는 잘 지어진 집을 찾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다행히 내가 구한 집은 따뜻했고 몽골은 난방비와전기세가 저렴해서 집 안에서는 반팔 티를 입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시설은 괜찮았다.


지금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수도나 전기 공사를 하는 기간에는 물이 안 나오거나 정전이 되는 일이 꽤 여러 번 있어서 가끔은 엘리베이터에 갇히거나 계단으로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불편함도 있긴 했다. 가끔은 물을 데워서 씻어야 하거나 생수로 씻어야 할 때도 종종 있긴 했지만 그런 것들이 내게 크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을 정도로 나는 몽골 생활에 나름 잘 적응하며 살았던 것 같다.


집 바로 아래에는 꽤 큰 마트도 있었고 내가 살던 동네는 '코리안타운'처럼 카지노 게임 식당들이 많은 지역이어서 음식도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집 바로 아래에는 떡볶이를 파는 '김밥천국'이라는 곳도 있었다. 카지노 게임의 맛은 아니었지만 나름 카지노 게임 음식이 생각날 때는 종종 사 먹기에 좋았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유일하게 사치를 부리면서 갔던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잊힌 브랜드인 '카페베네'였다. 나는 집 앞 카페베네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디저트를 먹는 게 그때는 나름 가장 큰 사치 중의 하나였던 것 같다.

카지노 게임 식당이나 호텔 카페, 카페베네에서 마시거나 먹는 음식들이 카지노 게임 사람에게는 비싼 게 아니었지만 몽골 사람들에게는 꽤 비싼 것들이었다. 그때 당시 내가 몽골 학교로부터 받았던 월급도 카지노 게임 돈으로는 50만 원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었지만 그 가치는 몽골에서는 100만 원이상의 가치였다.

요즘 몽골에는 이마트도 생기고 편의점도 생겨서 카지노 게임과 거의 다른 것이 없는 곳이 되었다고 하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집 근처에 '버거킹'이 처음 생겨서 사람들이 줄 서서 먹는 진풍경도 볼 수 있었고 '버거킹'이나 '카페베네'가 외국인들이 애용하는 사치의 장소 같은 곳이었다.

또 북한 식당도 있었는데 평양 음식을 파는 곳에서 남자들의 감시 하에 북한 여자들이 한복을 입고 서빙을 하는 모습은 꽤 충격적이었다.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한 번도 북한 사람과 말해 본 적이 없었는데 북한 식당에서 처음 먹어본 평양 음식과 북한 사람들은 내게 꽤나 크나큰 기억으로 남아있다.




내게 몽골은 가기 전에는 꽤 두려운 나라였다. 나는 고기의 누린내를 좋아하지 않아서 고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족발, 순대는 아예 먹지도 못하고 생선과 해산물을 좋아했다. 그리고 바다를 좋아했기 때문에 여행도 무조건 바다로 떠나는 게 일상이었다. 그런 내게 바다가 없는 나라인 몽골은 사실 상상하기도 힘든 곳이었다.

또 나는 여름을 좋아하고 겨울을 싫어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겨울에는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몽골의 날씨는 내게는 최악 중의 최악인 셈이었다.


하지만 사람 사는 것은 다 거기서 거기였는지 몽골에서의 첫 2~3개월은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적응했고 나쁘지 않았다. 9월에 첫눈이 오고 우박이 내리는 모습마저 그때까지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나는 잘 지내고 있다 생각했다.




환경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을 때쯤 어느 날부턴가 그들은 내게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내게 '카지노 게임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따서 돈을 벌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월급을 주지 않기 시작했다. 카지노 게임에서 진행할 수 있는 사업을 해서 내가 직접벌라는 거였다. 그 월급이라는 것도 카지노 게임 돈으로 50만 원정도밖에 안 되는 돈이었는데 그걸로 살 수는 있었지만 카지노 게임 사람처럼은 살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돈마저 그들은 내게 두 달만 입금하고 그 후 주지 않았다.


9월 학기가 시작되면서 나는 그들의 첫 약속과는 달리 학과장 자리를 맡지 못했다. 이미 몽골인 교수가 학과장을 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그 교수는 나에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자기가 학과장인데 갑자기 카지노 게임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와서 자기 자리를 내놓으라고 하니 그 몽골 교수 입장에서는 황당했을 거다. 거기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그 대학에는 이미 세종학당도 개설되어 있었고 코이카 단원이 카지노 게임어 수업도 넘치게하고 있었다. 코이카 단원은 그때 당시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였는데 카지노 게임어 교육을 몽골에서 처음 접해 본 거였다.

세종학당도 학생 수는 많고 잘 운영되고 있는 걸로 유명했었는데 정작 카지노 게임어 수업은 개설조차 하지 않고 학생 명단, 출석 명단은 모두 학교 학과 학생들 이름으로 채워서 제대로 된 수업이 운영되지 않거나 학과 수업이 세종학당 수업으로 둔갑되어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카지노 게임어 수업을 하지도 않는카지노 게임사람들이 교수 명단에 들어가 있었고 그 수업은 몽골인 교수들이 아르바이트처럼 돈을 받고 수업을 하고 있었다. 결국 원어민인 카지노 게임인 교수들은 수업을 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카지노 게임에는 카지노 게임인이 수업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보고하고 수업료와 지원금을 챙기고 있었다.


그때까지 몽골의 실정이 그랬다. 카지노 게임어 교육 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이 그렇게 카지노 게임인이라는 이유로 그냥 카지노 게임어를 쉽게 가르치거나 명단만 올려놓고 있었다.

한글학교도, 대학의 카지노 게임어학과도, 세종학당도 카지노 게임어를 가르치고 있는 카지노 게임인들은 몽골에 기독교를 선교하러 온 분들, 카지노 게임어 교육과는 전혀 관계없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그때 카지노 게임어 교원 자격증이 있으면서 카지노 게임어교육 경력자는 나밖에 없었다.

그 대학에는 이미 카지노 게임인 교수들이 꽤 많았지만 그들은 그 전공 박사 학위가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대부분 교인들이었다. 그래서 종교가 없었던 나는 가기 전부터 그곳에서 지내려면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말도 계속 들어야만 했다.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아서였을까? 왜 교회에 다녀야 하는지 그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교회의 지원 없이는 외국에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총장님과 내게 자리를 추천해 주셨던 교수님은 내가 카지노 게임어학과 학과장 자리로 몽골에 가는 거라고 분명히 말씀했었고 나는 전임 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인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교학처장과 행정처장이 내가 박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젊다는 이유로 총장님 앞에서 내가 학과장 자리를 맡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그 두 분은 나보다 20살 이상은 많으신 분들이었고 심지어 교학처장님은 총장님과 친구 사이였다. 그 두 분의 반대로 결국 나는 부임 첫 학기부터 학과장 자리를 처음부터 할 수 없게 되었다. 카지노 게임에서 들었던 말과 몽골에 도착해서 들은 말이 그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다가 몽골인 교수와 행정처 몽골인 직원이 대놓고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는 그 영문도 모르고 '원래 그런 성격인 사람들이겠거니'하고 넘겼다. 하지만 나는 개인 사비를 써서 통역사와 함께 다녔는데 그 통역을 해 주던 몽골인으로부터 행정 직원이 대놓고 학생들 앞에서 나를 무시하고 욕을 했다는 얘기까지 듣게 되면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몽골인 교수와 몽골 직원이 내게 그랬던 이유는 카지노 게임인 처장들의 이간질 때문이었다. 그들이 나를 무시하는 말을 그들 앞에서 했었던 거다. '자격도 없는 애가 교수랍치고 와서 자기들 자리를 넘본다'는 말을 서슴없이 몽골인 직원과 교수 앞에서 하고 있으니 카지노 게임 사람에 의해 나는 몽골인들에게 이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딜 가나 외국에서는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게 '같은 카지노 게임 사람'이다. 카지노 게임 사람들끼리 시기하고 카지노 게임 사람들끼리 서로 물어뜯는다. 그 모습을 그동안 많이 봐 왔기에 그런 부분도 새로운 건 아니었다.

특히 교학처장은 자신이 카지노 게임어학과 학과장 자리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카지노 게임어 쪽을 본인이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젊은 여자 애가 와서 자신의 자리를 빼앗을 거라 생각했는지, 내 앞에서 하는 말과 총장님 앞에서 하는 말이 달랐고 나를 교묘하게 몰아내고 괴롭혔다.


내게 카지노 게임에서 딸 수 있는 사업을 진행하면 자신이 다 밀어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KF 사업'으로 교수 자리를 5년 동안 유지하면서 사업할 수 있는 것을 내가 지원해서 따내기 직전, 그는 말을 바꿨다.

그래서 나는 그때 세종학당재단 파견 교원으로서도 지원을 했다. 이미 한 학교의 전임 교수였지만 그들은 내게 월급도 주지 않았고 내게 카지노 게임에서 사업을 따서 알아서 돈을 벌라고 하니 나는 내 월급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했다.


나는 이미 카지노 게임어 교육 경력이 꽤 쌓인 상태였기에 세종학당재단의 파견 교원으로서도 최고 높은 급인 '가급'으로서 지원이 가능했다. 그리고 나는 파견 교원이 되면 카지노 게임으로부터 그들이 주는 돈보다 꽤 많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주거 지원비, 항공권, 월급, 이사 지원비 등을 지원받는데 매달 받는 월급과 주거 지원비, 특수지 근무 수당은 400만 원가량이었다. 그 돈은 몽골에서는 1000만 원이상의 가치가 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지원했고 운이 좋게도 파견 교원으로서 선발이 되었다.


파견 교원이 되기 위해서는 카지노 게임에서 교육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나는 총장님의 허락 하에 세종학당 파견 교원으로서 교육을 받으러 카지노 게임에 가기로 했다. 그때는한 학기가 거의 끝날 때쯤이었는데 남은 몇 시간 수업을 코이카 단원이었던 선생에게 넘기고 나는 카지노 게임행을 택하기로 했다.어차피 다시 와야 했기에 대체 수업만 가능하다면 문제 될 게 없었다.

처음에는 내가 있는 것을 하면 지원해 주겠다며내게 카지노 게임에 가서 교육을 잘 받고 오라고 자기가 알아서 일처리를 다 하겠다고 했던 교학처장은 인심 좋은 할아버지처럼 말했다.

그래서 나는 휴가를 내고 카지노 게임에 다녀왔는데 사이 교학처장은 총장에게 '어떻게 교수가 자기 수업도 하고 마음대로 카지노 게임에 있냐'며 '자신은그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다, 나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말도 없이 무단으로 카지노 게임에 갈 수 있냐'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절대로 가만히 둬서는 안 된다며 총장님께 강하게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코이카 단원이 하기로 했던 내 수업은 그에게 하지도 못하게 막았고 그 수업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며 강하게 나를 비난했다고 한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리고내게 이메일로도 강한 어조로 무책임하다고 비난했다. 내 앞에서는 좋은 할아버지인 척하더니 거짓된 그 모습이 소름 끼치게 역겨웠다.

나는 너무 황당했었다. 서면으로 사인을 하지 않고 떠났던 게 화근이 되어 그렇게 내 발목을 잡았다.

나는 그때 급하게 카지노 게임에 다녀와야 했었기 때문에 구두로 다 이야기를 하고 갔던 거였는데 증거가 없으니 '늙은 여우'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나를 깎아내리기위해 짓을 다했다.


그리고 나는 그 후교수직에서 물러나 세종학당 파견 교원으로서 학교에위치를 바꿔 다시 가서 일을 시작했다.그때서야 몽골인 교수들은 나에 대한 오해를 풀었고 내가 자신들을 위협하러 존재가 아니었다사실을 깨달았는지 그때부터 우리는 친해질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물론 우여곡절이 있었다. 번은 몽골인 교수와 대판 싸우고 나는 서럽게 적이 있었다. 카지노 게임인 교학처장으로부터 들은 말들로 나를 오해했던 그들은 나에게따졌고내가 너무 억울해하니 그때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하게 된 거다. 그리고 우리는친밀해지면서 서로 몰랐던 사실들을 털어놓고 협력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교수는 나와 친하게 잘 지내고 있다.




'늙은 여우'는 내가 받는 월급이 총장보다 많다며 비꼬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게 기부를 강요하기도 했고 철저히 내가 교수가 아니라는 강조하며 자신들의 자리만 지키려 애썼다. 정말 유치하고 웃겼던 게 이메일로 내용을 주고받을 때마다 나는 교수가 아니라는 말을 계속 강조했다. 정말 웃기는 일이었다. 왜냐하면카지노 게임어학과의 주요 수업은 내가 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심지어 카지노 게임 역사, 문화, 쓰기, 고급 카지노 게임어 수업은 죄다 내가 했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몽골을 떠난 후에는 그 '늙은 여우'의 부인이 카지노 게임어 교원 자격증을 따서 몽골에 들어갔고 그들이 카지노 게임어학과를 운영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늙어서도 욕심을 못 버렸던 그들은 지금은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까? 열심히 해 보려 했던 젊은이를 괴롭혀 가며 얻은 자리가 과연 좋았을까?


그리고 더 황당했던 건내가 박사과정을 다녔던 그 대학원에서는 내가 몽골에 오면서부터 내게 그 학교를 추천했던 교수님은 갑자기 학과장 자리에서 빠졌다. 그 사실도 나는 알지 못한 채 수업을 계속 듣고 있었는데 그 대학원은 내가 4학기 수업을 들은 후, 갑자기 학교를 일방적으로 없애야 한다는 통보를 했다. 인가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태에서 학교를 운영했다가 내가 수료할 때가 되니까 문제가 되니 학교 폐쇄를 결정해 버린 거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면 학비의 일부를 돌려주고, 각서를 안 쓰면 학비를 돌려줄 수 없다며 협박 메일을 보냈다.


기가 막혔다. 나의 2년의 시간이 날아간 것이다.박사 수업을 듣는 게 아니었다면 나는 해외 생활을 결정하지 않았을 거다. 내가 수모를 받으면서 지켰던 것들이 무의미해졌다.

나는 박사 수료는커녕 학교가 사라지게 돼서학교를 다녔다는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그렇게 박사의 꿈을 날려 버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 후 박사에 대한 회의감으로 박사 과정에 대한 고민만 하다 결국 카지노 게임어 교육계에서 박사를 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다.




이게 사기가 아니고 무엇일까?


내가 왜 '몽골' 하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나라로 생각하는지이제 조금은 이해가 될까?


물론 지금 내가 늘어놓은 이 글은 내가 겪은 일중 일부 사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지금까지도 내 가슴속에는 정말 힘든 일로 남아 있다. 나는 그때부터 평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의도를 했든, 하지 않았든 그들은 내게 피해를 주었고 나에게 상처를 남겼다.

지키지 못한 약속을 남발했던 총장, 그리고 교수,

그리고 남의 일이라고 자신들만 생각하며 거짓과 위선을 서슴지 않았던 처장들......


당신들은 그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지금도 잘 살고 계시나요?

당신들이 보여 준 그 추악한 욕망들, 책임지지 못한 행동들은 '사기꾼'과 뭐가 다른가요?

당신들이 지금도 '안녕'하면, 나의지난 세월은 뭐라 해야 할까요?

당신들은 당신들의 잘못을 알기나 할까요?

내가 지난 10년 동안 힘들어야 했던 이유, 내가 좋아했던 공간과 좋아했던 사람들마저 보고 싶지 않게 만들어 준 당신들.

무심코 던진 돌멩이에 개구리 한 마리는 그렇게 치명타를 입었다는 것을 당신들은 과연 알고나 있을까요?


당신들이 지키지 못한 약속은 그저, 사기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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