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갈라져 빛이 카지노 게임를 뒤덮자 드러난 인간의 동물적 그림자
2023년 한국에서 개봉한 4개의 텐트폴 영화가 있었죠. 당시 그중 가장 평점이 높은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친구와 개봉일에 관람하고 왔었습니다. 몸이 안 좋아서 2달 넘게 쌀을 먹지 못해 뼈만 남아있던 시절이었네요. 당시 생각보다 완성도가 높아서 놀랐습니다. 단순한 상업영화들보다 구조가 짜임새 있었고 배우들의 연기가 주조연 모두 인상적이었죠. 보고 바로 블로그에 썼었는데요. 개봉하고 아무런 정보없이 바로 썼지만 잘썼다고 만족한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브런치에도 들고 와보게 되었네요.
그리고 연기 중에서도 특히 이병헌의 연기는 신들린 줄 알았다는 이야기 꼭 하고 싶습니다. 노래 아파트를 부르며 아파트 주민들의 앞에서 공허한 표정을 짓는 장면이나 허당스러운 인상에서 독재자에 가깝게 변해가는 화술과 광기어린 행동이 소름이 끼쳤습니다. 당시에는 로제의 아파트는 발매되지 않았고 윤수일의 아파트였었네요. 사기꾼을 전신마비에 걸린 그의 어머니 앞에서 목졸라 죽이다 아내와 딸의 전화를 받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도대체 어떻게 감정을 잡고 연기를 한 건지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이병헌 배우가 논란이 없는 편이 아님에도 영화계에서 최정상에 군림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던 영화였네요. 박서준 배우도 이태원 클라스나 쌈 마이웨이에서 보여주었던 열정 넘치는 연기와는 상반된 소심하면서도 입체적인 인물을 안정적으로 연기해냈습니다.
이 영화의 장점은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어요. 하나는 입체적인 인물들과 흥미로운 설정의 절제된 사용입니다. 적고 보니까 두 가진데요. 그냥 그대로 갈게요. 영탁은 사기를 당해 의도치 않은 살인을 저지르고 공허하고 허당스러운 모습을 보이지만 아파트의 대표로 지목되며 점차 광기와 권력욕, 집에 대한 소유욕으로 삐뚤어지는 모습을 보이는 입체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무식하지만 선동력과 행동력은 뛰어난 양면적인 인물이지요.
민성은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가정적이지만 명화와는 달리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을 죽이고 죄책감에 시달리거나 권력에 굴복하여 영탁에게 무릎을 꿇는 모습도 보입니다. 명화는 착하고 이상적인 성향과는 달리 행동력이 뛰어납니다. 이기적으로만 보였던 도균은 실은 외부인 아이들을 숨겨주는 인물이었습니다. 아파트 부녀회장 금애는 리더십있는 인물로 보였으나 실은 개인의 안위를 챙기기만 하는 이기적인 행동을 보입니다. 이러한 양면적이고 독특하면서도 있을법한 입체적인 인물의 사용은 영화의 완성도를 높여 주었지요. 또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디스토피아 영화를 연상케하는 제목과는 달리 한국영화의 부족한 예산으로 무리한 CG를 남발하기보다는 한정된 황궁 아파트라는 공간에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련하고 배우의 연기력에 기대는 선택을 내렸습니다. 제 생각에는 성공적이었네요.
두번째는 상징의 적절한 사용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양한 상징과 장치들이 사용되었는데요. 읊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황도캔은 인물의 양심을 상징합니다. 민성은 처음 황도캔을 얻어 명화와 나누어 먹고 나중에는 아이에게 다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결말부 아내 박보영을 지키기 위해 황도캔으로 사람을 때려죽입니다. 영탁은 타락하고 외부인을 색출하다 자연스럽게 도균의 황도캔을 빼앗아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습니다. 인간성의 상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조명과 그림자도 중요한 상징입니다. 자의든 타의든 악행을 저질러오던 민성이 명화에게 잘못했다고 고백하고 죽는 장면에서 스테인글라스에서 빛이 내려오는 장면. 이병헌의 과거를 밝히자 얼굴로 자연스럽게 클로즈업이 들어오고 이어서 비치는 누리끼리한 조명과 춤을 추는 주민들의 그림자가 황궁 아파트 벽에 비쳐 괴물처럼 보이는 장면. 두 장면이 떠오르네요. 전자는 성경에서 구원을 떠오르게 하구요. 후자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저는 사실 꽤 많은 순간에 동물농장을 떠올리게 되었었는데요. 이 부분은 동물농장의 마지막 문단에서 인간과 돼지 나폴레옹의 그림자가 비쳐보이며 들여다보던 동물들이 더는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돼지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고 독백하는 구절이 떠오르게 했습니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요, 영탁과 나폴레옹은 주거지에 침입한 침입자를 몰아내고 리더로 자리매김했고 타락했다는 점에서 유사합니다. 심지어 나폴레옹은 초반부 경쟁자 스노볼보다 화술이 부족한 약점을 보여주는데요. 영탁도 선동력은 뛰어나지만 화술이 떨어지고요. 그의 확성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이 웃음 포인트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카지노 게임에서 부녀회장 금애는 카지노 게임 규칙을 발표하는데요. 이는 동물농장에 나왔던 규칙과 유사합니다. 영탁과 나폴레옹 두 리더들이 모두 첫번째 규칙을 어기고 있던 점까지 똑같습니다. 나폴레옹의 일꾼인 말 복서는 나폴레옹은 언제나 옳다라고 주장하다 도축장에 팔려가 죽는데요. 민성은 영탁의 오른팔로 자리매김하다 그의 몰락과 함께 칼에 찔려 과다출혈로 죽게 됩니다.
신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영탁은 혜원를 협박하기 위해 따라서 집에 들어갑니다. 이때 그는 혜원이 신발을 신고 집안을 들어간다며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죽어가다가도 집안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고 침입자들이 들어오자 유언으로 어디 시부럴 것들이 남의 집에 신발도 안 신고......라고 합니다. 정작 영탁은 사기꾼을 죽이러 집에 들어갔을때 신발을 신고 있는 장면을 보시면, 그는 그토록 황궁 아파트를 자신의 집이라며 집착하고 아끼는 모습을 보였지만서도 황궁 아파트가 자신의 집이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끝까지 아파트의 구성원이 되고 싶어 발악했습니다. 또 바로 그런 심리를 가졌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외부인을 색출했었겠죠.
각본도 우수했습니다. 영탁이 외부인이었다는 반전도, 황궁 아파트를 떠나려 발버둥친 박보영이 황궁 아파트를 떠나 새로운 아파트로 입주했다는 결말도 아이러니하고 좋았네요. 다만 황궁 아파트는 무너지지 않아 수직적인 구도이지만 결말부의 아파트는 가로로 뉘어져 수평적인 구조인 점이 희망적인 박보영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영탁이 외부인이었다는 반전을 관객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혜원을 이용해 적절히 복선을 깔아준 점도 반전을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위풍당당하게 영탁과 아파트 주민들과 아파트를 향해걸어가면서도 죄책감에 시달리던 민성이 결말에서는 피를 철철 흘리며 아파트를 떠나면서도 아내 명화의 품에 안겨 마음의 짐을 덜고 같은 외부인을 지나치는 장면도 의미심장했습니다. 여담으로 이 외부인은 아파트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괴물이라는 말을 퍼트리며 잠깐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는 정작 그가 인육을 먹고 있죠. 그외에 등장인물들이 지닌 집에 대한 막연한 욕구를 오프닝 시퀀스로 깔끔하게 설명해주는 점도 좋았네요.
같이 영화를 보러갔던 친구가 민성의 심리를 차에 물이 차오르는 상황으로 비유하며 말해주었습니다. 차에 물이 차면 처음에는 문을 열지 못하다가도 물이 턱까지 차오르면 수압으로 문을 열고 빠져 나올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뼈까지 문과생인 저와는 달리 평생을 과학을 파고들며살다 성균관대학교 반도체학과로 떠나버린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이야기같아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나라의 부름을 받아 홀로 밤을 지새고 있는 그 친구가 문득 보고 싶어지는 밤입니다. 그리고 아파트에서 빠져나가면 죽는다며 집착하며 타락하다 아파트가 무너지기 직전이 되자 양심을 되찾고 명화와 빠져나간 그의 상황을 잘 드러내주는 것도 같아 써봅니다.
각본, 연기, 영상미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수작.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다루어낸 디스토피아 영화.
엄태화 감독의 <콘크리트 유토피아였습니다.
평점 3/5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