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카만 맨발의 소녀
책사랑 수필 공모전에 작품을 제출하고 홈페이지를 둘러보던 중 독서감상문 공모전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응모 기간이 너무 임박한 것 같아 포기하고 홈페이지를 닫았다. 그러나 며칠 동안 독서감상문 공모전이 눈에 아른거려 다시 한번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다행히도 응모 마감은 7월이 아닌 9월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정도 기간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선정도서를 인터넷으로 구매해 읽게 되었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2022념 오웰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라 아름답고 명료하며 실리적인 소설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찬사를 받은 클레아키건의 소설이다. 그는 24년간 활동을 하면서 단 4권의 책을 냈다. 그 모든 작품들이 얇고 예리하고 우수하기에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고 평하기도 했다.
책을 받았을 때 생각했던 것보다 두께가 얇아서 좋았다. 거의 삼십 년 만에 독서감상문을 써 보는지라 두꺼운 책이라면 읽기에 거부반응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앞섰던 터였다. 이 책은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 정부의 협조하에 카톨릭 수녀원이 운영하며 불법적인 잔혹 행위를 저질렀던 ‘막달레나 세탁소’가 배경이다.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는 선택 앞에서 고뇌하는 한 남자의 내면을 치밀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도서를 읽어나가면서 끝까지 다 읽고 나면 다시 한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옮긴 이의 글도 읽어보니 두 번 읽어야 알 수 있는 것들, 아니 세 번, 네 번 읽었을 때 눈에 들어온 것들도 있었다고 한다. 때론 시였고 언어의 구조는 눈 결정처럼 섬세한 이 짧은 소설을 나는 세 번이나 읽으며 밑줄도 긋고 동그라미도 쳐가며 집중해서 읽어보았다.
주인공 빌 카지노 게임은 야적장에서 석탄, 목재를 배달하며 아내 아일린과 딸 다섯을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내이다. 그의 엄마는 열여섯 살 때 미시즈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일하던 중 임신을 하였다. 카지노 게임의 엄마가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 때 가족들은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미시즈 윌슨은 그녀를 해고하지 않고 계속 일하게 해 주었다. 카지노 게임이 자라자 자식이 없는 미시즈 윌슨은 그를 돌보아주고 글도 가르쳐 주었다. 미시즈 윌슨은 전사한 남편의 유족연금과 소와 양 몇 마리를 키워 얻는 수입으로 검소하게 살았다. 농장 일꾼인 네드도 함께 살았는데 집안에 불화가 없고 평온했다.
카지노 게임은 학교를 졸업하고 기술학교에 다니다가 석탄 야적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일머리가 있었고 사람들하고 잘 지낸다는 좋은 평판이 났다. 건실한 개신교도 특유의 습관을 들여 믿음직해서 지금의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아내 아일린과는 그레이브스 앤드 컴퍼니 사무실에서 일할 때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카지노 게임은 아일린의 반짝이는 검은 머리카락과 진한 회색 눈, 현실적이고 기민한 생각에 끌렸다.
가끔 카지노 게임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카지노 게임이 믹 시노트네 애가 땔감을 주우러 길에 나온 걸 보고 차를 태워다 주며 주머니에 있던 잔돈을 준 내용을 읽으며 마음이 여리고 감성적인 남자라는 것을 느꼈다. 그에 비해 아일린은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면을 지닌 것 같다. 눈치와 직관이 발달한 여자들이 훨씬 깊이 있고 두려운 존재라는 걸 카지노 게임은 아일린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그런 아내가 무섭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고 그녀의 기개와 시퍼런 직감을 부러워한 적도 있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카지노 게임의 마음에 백분 공감이 간다. 누구나 한 번쯤 다람쥐 쳇바퀴 돌듯하는 무미건조한 일상생활에서 회의를 느껴보았을 테니.
수녀원을 맡아 관리하는 선한목자수녀회는 기초교육을 제공하는 직업 여학교도 운영했다. 세탁소도 겸업했다. 세탁소는 평판이 좋아 레스토랑, 게스트하우스, 요양원, 병원, 사제들, 부유한 집에서는 전부 세탁물을 거기로 보냈다. 그곳에 관한 다른 이야기는 직업 학교에 있는 여자들은 학생이 아니라 타락한 여자들이라서 교화를 받는다는 것이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더러운 세탁물에서 얼룩을 씻어내면서 속죄하는 거라고도 했다. 또 어떤 이는 가난한 집의 결혼 안 한 여자가 아기를 낳으면 가족이 그곳에 보내 숨기고 사생아로 태어난 아기는 부유한 미국이나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낸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수녀들이 상당한 돈을 챙긴다고, 그게 수녀원 사업이라고 말했다.
카지노 게임은 그런 말을 전혀 믿고 싶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다. 어느 날 저녁 약속한 시각보다 훨씬 일찍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 불이 켜진 작은 경당으로 갔는데 그 안에서 젊은 여자와 여자아이들 여남은 명이 바닥을 걸레로 닦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 중 신발을 신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검은 양말에 끔찍한 회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엉망으로 깎여 있는 한 아이가 “우리 좀 도와주시겠어요? 강가까지만 데려다 주세요”“아니면 대문 밖으로만이라도 나가게 해 주세요”카지노 게임이 그럴 수 없다고 손사래를 치자 “아저씨 집으로 데려가 주세요. 일하다 죽을 때까지 일할게요” 얼마나 처절하게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면 카지노 게임에게 그런 부탁을 했을지 마음이 심란했다. 아마 그 아이들은 살아도 산 것 같지 않은, 차라리 물에 빠져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내뱉을 만큼 처절하고 불행한 삶이었을 것이다.
카지노 게임은 경당을 나와 트럭에 올라타 달리기 시작했으나 바닥을 기어다니며 마루에 윤을 내던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 생각났다. 문이 안쪽에서 잠겨져 있었다는 사실과 수녀원과 세인트마가릿 학교 사이에 있는 높은 담벼락 꼭대기에 깨진 유리 조각이 죽 박혀 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또 수녀가 석탄 대금을 치르러 잠깐 나오면서도 현관문을 잠그던 것도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한번 들어가면 자의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거대한 감옥 같은 곳에서 하루하루를 죽을 수 없어 억지로 사는 아이들이 안타깝고 불쌍했다.
집으로 돌아온 카지노 게임은 수녀원에서 본 것을 아일린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다가 어쩌다 말을 하게 되었다. 아일린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라며 야멸차게 말했다. 사람이 살아가려면 때론 모른 척해야 해야 할 필요성도 있고 개인의 힘으로 해결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것은 맞다. 그런 면에서 아일린의 말에 동감은 하지만 그 아이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카지노 게임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아일린과 감성적인 카지노 게임의 대화는 늘 평행이론을 달린다. 아내와의 대화에서 카지노 게임은 늘 답답함을 느낀다. 누가 맞고 틀리냐의 문제보다 언제나 자기 입장만 고수하는 아일린의 대화를 보면서 인간 관계에서 공감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설령 내 말이, 내 생각이 맞을지언정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도 좋은 대화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차가수녀원에서 만난 세라는 밤새도록 석탄광에 갇혀있던 소녀였다. 석탄이 새카맣게 낀 긴 발톱의 아이를 보고 카지노 게임의 마음 한구석에는 사제관이나 집에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니면 그냥 모른 척하고 집으로 가버리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태어난 지 14주 된 아기에게 젖을 주고 싶다는 세라를 두고 온 카지노 게임은 다시금 수녀원을 찾았다. 석탄광에는 카지노 게임이 상상했던 대로 세라가 갇혀있었다. 새카만 맨발의 세라에게 외투를 걸치게 하고 언덕을 내려가 다리를 향해 갔다. 자기보호 본능과 용기가 서로 싸우는 걸 느끼며 아이를 사제관으로 데려갈까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냐 하는 생각을 카지노 게임은 하게 되었다.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맨발인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향한다.
물론 대가를 치루게 되겠지만 이와 견줄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는 펄롱은 어떻게든 헤쳐나갈 것이다.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용기를 가지고 그가 구한 것은 비단 새카만 맨발의 소녀 세라 한 명이 아닌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자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한 줄기 희망이다. 그 사소한 일은 닥쳐올 고난까지도 감수할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