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교육 사이
내가 아이들과 함께 뉴질랜드에 나와 살고 있는 동안, 우리나라에서는 ‘7세 고시’가 큰 이슈였나 보다. 한국 뉴스를 간간이 보기는 하지만 해외에 오래 나와 있으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무뎌진다. 대통령 탄핵 같은 사건도 멀찍이 보게 된다. 그래서 나는 7세 고시 열풍이 그렇게 큰 이슈인지 체감하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첫째가 11세, 둘째 셋째 쌍둥이가 8세, 넷째가 7세이다. 첫째는 7세 고시 시기를 이미 훌쩍 지나갔고 나머지 세 명은 애매하게 걸쳐져 있거나, 누군가의 시선으로는 이미 늦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교육의 첫 관문인 그 시기마다 우리 가족은 늘 외국에 있었다. 미국과 아랍에미레이트는 남편의 직업 때문에, 그리고 지금 뉴질랜드는 오로지 카지노 게임인 나의 선택에 의해 오게 된 것이었다. 아이들이 영어를 좀 더 수월하게 익히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외국에 나왔기 때문에 나 역시 ‘7세 고시’를 향해 달리는 카지노 게임들과 다른 마음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늘 수학이다. 항상 자기 상황의 반대편에 있는 것을 아쉬워하기 마련인데, 한국에 있을 땐 영어를 걱정했다. 하지만 외국에 나오면 수학이 영 불편하다. 우리 아이들은 수학 선행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몇 번의 외국살이를 마치고 한국 초등학교로 돌아올 때마다 첫째는 또래보다 국어와 수학이 눈에 띄게 떨어져 있었다. 선행은커녕 현행, 아니 후행의 느낌으로 간신히 쫓아갔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외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면 넷 다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카지노 게임, 여기 수학이 너무 쉬워.”
첫째 아이는 외국 학교의 수학이 한국보다2~3년쯤 더 낮은 수준이라고 했다. 한국 초등학교에서 1학년 때 시계 읽기를 배운다면 외국에선 그걸 3학년 때 한다는 것이다. 곱셈이나 분수, 원주율 같은 것들도 그랬다. 한국에선 현행도 간신히 따라갈까 말까 한 우리 아이들이 외국 학교에서 유일하게 받아오는 상장은 ‘Math’였다. 현지 교사들은 늘 학부모 상담에서 당신의 아이가 수학을 참 잘한다고 했다. 그러면 난 그간 영어 때문에 쪼그라들었던 어깨를 이 기회에 활짝 펴기 위해 웃으며 이렇게 답하곤 했다.
“한국인의 특징이죠.”
그러다 인도 카지노 게임 앞에선 다시 어깨가 작아졌지만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도 우리 가족은 군인인 남편 직업 특성상 학원 보기 힘든 시골 군부대에서 오래 살았고(‘격오지 근무수당’이 나오는 곳이라는 걸 몇 년을 살고서야 알았다), 그다음 근무지를 예측할 수 없는 이사가 잦았다. 첫째 아이가 5학년을 마칠 즈음에 헤아려보니 그간 여섯 군데의 초등학교를 거쳤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이 무거웠다.
게다가 우리 부부는 여행 다니는 걸 워낙 좋아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주말마다 남편의 근무지 주변 시골을 하나씩 탐방했고 급기야 카라반을 구입해 아이들과 캠핑하며 수도 없이 길 위에서 잠을 잤다. 해외에 나와도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여길 가보겠냐며 아이들과 쉴 틈 없이 여행을 다녔다. 아마 여행비를 다른 집 학원비보다 더 쓰지 않았을까?
손주들의 교육이 나보다 더 걱정인 아이들 외할머니는 전화 통화 때마다 “그만 놀러 다니고 애들 공부시켜라.” 이렇게 당부하곤 했다. 조카들의 입시를 성공적으로 치른 언니는 “너네 지금 그럴 때가 아닌데.” 이 짧은 한마디로 내 마음에 지진이 일어나게 했다. 놀라운 능력이다.
1년 뒤 다시 한국에 돌아갈 걸 생각하면, 남반구까지 쭉 내려온 이곳에서도 나는 우리나라 입시가 무섭다. 황소를 짐승 이름으로만 아는 우리 아이들이 그곳에서 수학 선행을 3년씩이나 앞서 해놓은 친구들과 같은 수능을 치를 수 있을까? 해외에서 옹알이 수준의 영어를 하는 이 애들이, 한국에 돌아가 뉴베리 수상작 원서를 읽는 친구들과 같은 리딩 레벨을 받을 수 있을까? 사실 교육만 생각하면 한국만 한 곳이 없다. 국어는 당연한 거고, 수학, 심지어 영어까지도 그렇다는 건 놀라운 진실이다.
카지노 게임로서 나는 내 아이들이 7세 고시를 놓쳐 종종 불안했고 멋진 풍경 속을 여행하는 순간조차 ‘교육’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우지 못하는 내 모습이 피곤했다. 소신이 있어 아이들에게 많은 여행의 경험을 시켜준다기보다는 소신이 없어 이것저것 다 해보는 쪽에 가까웠다.
"4학년 이전에 여행 간 거, 기억못 해."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나는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 못 한다). 기억을 못 할까, 정말로? 그래서 아무 소용이 없는 걸까? 예전에 생후 8개월 된 첫째를 데리고 캐나다에서 한 달간 지낸 적이 있었다. 기저귀 차고 젖병 무는 시기였으니 당연히 기억을 못 한다. 하지만 아이는 자기가 캐나다라는 나라에 가 본 적이 있다는 걸 늘 인지한다. 뉴스에서 캐나다 소식이 들리거나 책에서 캐나다 풍경 사진을 보면 좀 더 유심히 들여다본다. 북미 대륙 자체를 친근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하다. 마치 언제라도 마음 내키면 갈 수 있는 곳인 것처럼.
쌍둥이와 넷째는 만 세살, 두살 때 살았던 미국 집의 구조를 얘기해 나를 놀라게 한 적도 있다. 그때 거실 벽난로에 아빠가 서툴게 나무토막을 넣다가 집에 화재경보기가 울렸던 일, 인조 나무가 아닌 실제 구상나무를 농장에서 사 와 크리스마스트리로 꾸몄던 일, 아침에 일어나면 그 트리에서 나온 진짜 나무 향이알싸하게거실을 가득 채웠던 일. 그런 것들을 형제들끼리 얘기하며 키득거린다.
때로는 어느 건물에 들어섰다가 “카지노 게임, 이거 미국 학교 다닐 때 교실 냄새가 나.” 아니면 “카지노 게임, 이 냄새 그거잖아. 우리 처음 아부다비 갔을 때 며칠 지냈던 에어비앤비. 그 방 냄새야.” 이렇게 후각으로 경험을 기억하기도 한다. 아랍 사막의 모래 촉감이 우리나라 해변의 모래 느낌과 어떻게 다른지도 기억한다. 아제르바이잔에서 먹은 양고기와 뉴질랜드에서 먹은 양고기의 향이 어떻게 다른지 또한 아이들은 맛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아부다비에서 우리 아파트에 살았던 친구들의 국적인 남아프리카공화국, 팔레스타인, 그리스, 이집트, 인도, 파키스탄을 기억한다. ’23년도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뉴스가 쏟아졌을 때 아이들은 그 지역 출신이었던 우리 아랫집 친구 하무드Hammoud의 가족과 친척을 걱정했다. 또 케냐에서 우리가 연필을 나눠줬던 마사이 족 아이들과 언젠간 서로 어른이 된 뒤 대학이나 직장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
나는 아이들이 우리 여행지의 복잡한 도시 이름과 숱한 정보들을 다 기억하길 바라진 않는다. 고대 유적지의 유물도 아이들에겐 돌덩어리일 뿐이니까. 다만 어느 지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을 때 “어? 나 거기 가봤어.” 이 말 딱 한 마디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기 머릿속의 공간이 확장되기를 희망한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더 많은 곳을 다닐수록 카지노 게임인 내가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느낀다. 세상에는 자기 삶을 꾸려가는 방식과 경우의 수가 얼마나 다양한지,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던 지구 반대편의 사람들을 직접 볼 때마다 그들의 새로운 삶의 방식에 늘 놀라곤 했다. 오랫동안 내가 알던 '좋은 인생의 경로'란 우수하게 학업을 마쳐 괜찮은 직장을 얻고 풍족한 가정을 꾸리는 것 정도였고, 나는 딱 내 상상력의 수준만큼 아이의 미래를 예측했다. 그밖의 삶은 알지 못했다.하지만 천 일 밤 동안 셰헤라자데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왕이 그 이야기자체에 매료돼 그녀를 처형하려던 마음을 바꿨듯, 나도더 넓은 다른 세상을 보며아이의 미래를 보는 시선이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얼마 전 첫째 아이가 생기가 도는 눈빛으로 “카지노 게임, 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라고 했다. 난 아이가 자기 앞에 놓인 거대한 입시의 터널을 이해하고는 있나 싶어 이 말이 좀 의아하게 들렸다. 왜냐고 물으니 첫째의 대답은 이랬다. 빨리 어른이 돼서 미니밴 뒤에 MTB 자전거를 매달고 좌석은 침대로 개조해 록키 산맥을 오랫동안 달리며 쏟아지는 별을 보고 싶다고 했다. 아이의 목표는 세밀하고 생생했다. 영화감독이 되면 자기가 어릴 때 봤던 아프리카와 뉴질랜드의 어느 풍경을 어떤 장면에 꼭 써먹을 거라고도 했다. 아이들이 이곳 뉴질랜드에 와서 서핑과 산악자전거, 그리고 2주 간의 캠퍼밴 여행을 경험한 직후였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경험’이라는 것이 복리로 축적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이를테면 C가 갑자기 B에서 나온 게 아니라, 자신도 기억 못 하는 저 너머의 A가 이룬 B에서 기인한 것 같은 느낌인 거다. 경험은 기억의 형태로 여러 층으로 겹쳐지다 어느 순간 부피를 이루고 자기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뻗어 나갈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간 수많은 선들이 언젠간 이 세상을 한 바퀴 휘감고 어른이 된 아이에게로 다시 돌아와 단단히 엮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경험은 아이 몸의 모세혈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