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를 읽고
어릴 적에 세 발 자전거 뒤에 동생을 태우고 동네를 힘차게 돌아 다녔던 기억이 있다.
슈퍼마켓을 지날 때 주인아주머니께 인사를 하면 “어이구 잘 탄다~동생 데리고 잘 돌아다니는구나~”하며 아는 척을 해 주었고, 윗집에 사는 친구 엄마를 길에서 마주칠 때는 맛있는 간식을 만들려고 하니까 와서 먹으라고도 했다. 함께 사는 고모가 나이가 찼는데도 시집을 못 가고 있다는 것은 동네 사람들이 거진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했다.
얼마 전에 카지노 게임 단지가 밀집되어 있는 지역에 사는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즘 젊은 엄마들 사이의 첫인사가 “안녕하세요 몇 단지 사세요?” 혹은 “어느 카지노 게임 사세요?”라고 한다. 단지마다 평수가 다르고 카지노 게임 브랜드가 집의 시세를 결정하는 세태이니 상대적으로 적은 평수의 오래된 카지노 게임에 살고 있던 내 후배는 자신도 모르게 잠시 위축이 되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도심지에 있는 신축 카지노 게임로, 시세 차익을 고려하여 영혼을 끌어서라도 자가를 마련하는 것이 마치 인생의 숙원, 목표인 것처럼 말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어디든 웬만한 도시에 빽빽이 들어서 있는 카지노 게임를 보면 가끔은 숨이 막히기도 하고 닭장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허공에 집을 짓고 사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마도 그래서 내가 아직 전세를 살고 있는 것인가 보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 뉴타운 지역이 있다.
20층에 달하는 카지노 게임를 짓기 위한 공사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부터 펜스를 튼튼하게 치고 어마 무시한 중장비 기계차들이 들락날락하더니 구옥들이 모두 사라져 평평하게 다져진 땅 위로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마치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듯 시야 상 어떤 방해물 없이 저 멀리 옆 동네까지 훤히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늘은 더 크고 파랗게 보였고, 더 가깝게 느껴졌다. 아이들과 함께 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공사가 끝나 엄청 높은 카지노 게임가 서게 되면 너무 답답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를 가끔 나누기도 한다.
1997년 발표된 김소진 작가의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는 주인공 민홍이 어머니 소유의 주택에 세 들어사는 세입자의 보일러 수리 요청으로 미아리 집을 방문하는 동안의 회상을 담은 소설이다. 재개발이 확정되어 이제 곧 없어질 그 집과 동네는 민홍이 어릴 때 살던 곳이었다. 지금은 결혼해서 신도시에 살고 있는 민홍은 그저 허름한 집들이 모여 있는 그 옛날 동네에서 어린 시절 있었던 시답지 않은 추억들을 떠 올리게 된다.
한 지붕에서 아홉 가구가 살던 그 시절, 낮에 먹은 김칫국물이 탈이 난 어린 민홍은 한밤중에 변소를 가던 길에 짠지 단지를 두 동강 내고 만다. 된 통 혼이 날 것이 무서웠던 어린 민홍은 그다음 날 가출을 감행하지만 매타작을 감수하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온다. 깨진 항아리는 그저 아이의 실수로 받아들여졌지만 결연함으로 가출했던 그 한나절동안 어린 민홍은 온갖 감정 속에 휩싸였었고, 성인이 된 민홍은 그 감정을 품은 어린 민홍을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서 추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홍은 볼일을 마치고 이제 자신이 살고 있는 신도시 카지노 게임로 돌아가는 길이다. 어린 민홍이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똥이 마려워진 민홍은 텅 비어 폐허가 된 어느 집으로 무작정 들어가 바지춤을 내려 용변을 보고, 그 용변이 구린내가 진동하는 깨진 항아리라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모르게 울고 싶어진다. 분명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마치 집 같이 느껴지는 이 산동네가 없어진 다는 사실이 성인이 된 민홍이를 순식간에 감상적으로 만들고 만 것이다.
세상은 세련되고 깔끔하고 화려한 모양으로 변해 가지만, 변화는 옛것이 있던 자리가 덮어지면서 만들어진다. 구옥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는 레고 같은 멋지고 튼튼한 카지노 게임가 들어서고, 저출산으로 아이들이 줄어들어 폐쇄된 어린이집이 있던 자리에는 상가 건물이 세워진다. 사람들은 새롭게 세워진 건물들 사이에서 놀라운 적응력으로 삶을 살아가겠지만 이제는 흔적도 없어져 버린 내 어린 시절 그 동네와, 건물들에 가려져 있는 하늘과 나무들을 쳐다보는 일은 온전히 나만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추억이 더 아름다워지는 것인가 보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