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다행인 것들
하루하루 무사히 살아내다 보니
오빠가 긴 여행을 떠난지 한달이 되었다.
처음에는 아팠던 카지노 쿠폰가 그립다가
요즘에는 아프기 전의 오빠도 보고싶다.
흘러가는 하루 속에 사는 것이 아직 너무 힘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만한 점을 계속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 생각을 잊지 않고 힘들 때 한번 더 보기 위해
또 나와 같은 아픔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
기록해본다.
우리는 사랑을 한방에 압축적으로 한거다.
일반 부부들도 바쁜 현생을 살다보면 사실은 붙어 있을 시간이 많이 없을텐데 우리는 몰아서 붙어있었다.
24시간 붙어있던 6개월뿐만 아니라 오빠가 투병하는 5년간 우리는 서로 많은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다.
평일에는 업무때문에 어쩔 수 없더라도 주말에는 정말대부분의 시간을 함께했다.
그리고 2023년 4월, 재발 판정을 받고 나서는 주말에도 친구/가족과는 시간을 거의 보내지 않고 서로에게 올인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어찌보면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다.
요즘에는 이 엄청난 사랑을 했다는 사실이 고맙고 다행이다.
모든 선택에 우리의 마음을 1순위로 고려할 수 있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해 절약하는 사람들이었다.
그게 처음에는 너무 속상했다.
카지노 쿠폰가 좀 더 펑펑 쓰고 갔다면 덜 속상했을텐데
작년에 오빠가 혼자 여행을 떠났을 때도
비행기값을 아끼겠다고 공항 노숙을 하며 경유를 하고
호텔값을 아끼겠다고 작은 게스트룸에서 잤던 카지노 쿠폰
너무 마음이 찢어졌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우리의 생활 습관 덕에 긴 투병 기간 내내 경제적인 걱정이 없었다.
그저 우리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둘다 휴직했음에도 그동안의 고생과 노력이 모여
값비싼 방문 재활도 매일 받았었고 먹고 싶은게 있으면 시켜먹고
앉기 힘들어하는 오빠를 위해 병원 외래를 갈 때도 사설 구급차를 타고 다녔다.
치료 받는 시간 동안 돈을 아껴야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오빠만 생각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한번은 내가 제니쿠키가 먹고 싶은데 돈도 안버는데 3만원짜리 쿠키를 먹는게 맞나
고민했었는데 오빠한테 크게 혼이 났다.
얼른 주문하지 않고 뭐하냐고
정말 웃기게도 그 순간에 오빠가 엄청 멋있고 든든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계획했던 빠른 은퇴 후 시골살기, 세계일주는 하지 못했지만
투병기간 우리에게는 그런 소소한 사치와 행복이 있었다.
오빠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었다.
내가 조금 힘들더라도 오빠가 원하는건 다 해주었다.
처음에는 오빠가 이렇게 빨리갈줄 알았으면 재활병원에 가지말고 집에 편히 있게 할걸 후회도 했지만
그랬다면 오빤 내가 오빨 포기한줄 오해했을 수도 있다.
카지노 쿠폰가 재활병원에 가고 싶다고 했을 때, 기쁘게 동의했기에 카지노 쿠폰도 나와 오빠가 바라보는 곳이 같다고 생각하고 더 노력했을 것이다.
재수술 이후 오빠의 몸이 급격히 안좋아지며 나는 오빠랑 무리해서라도 여행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카지노 쿠폰는 몸이 너무 힘들어서 그냥 쉬고 싶어했다.
그때 내 마음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나는 여행을 안가도 괜찮지만 혹시라도 카지노 쿠폰가 급격히 안좋아질까봐 하루라도 괜찮을 때좋은 곳에 가서 쉬는 것도 좋겠다고 했었는데 카지노 쿠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고 싶다고 했었다.
오빠와 솔직하게 대화를 하고 오빠 의견을 들었기 때문에 아쉽고 속상한 마음이 덜하다.
환자와대화를 자주 하고 정말 원하는 바를 파악해서 그대로 해주는게 나중에 마음의 짐이덜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안쓰고 오빠만 생각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는 편인데 카지노 쿠폰는 내가 오빠보다 다른 사람을 더 신경쓰는걸 불편해했다.
그래서 나는 오빠만 생각하기로 하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무시하기로 했다.
대학병원에 외래를 갈 때도 오빠가 휠체어 말고 침대에 눕고 싶다고 해서 침대를 끌고 병원을 누볐다.
오빠가 외식을 하고 싶다고 하면 머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환자복을 입었어도 데려갔다.
재활할 때도 오빠가 누워서 받고 싶어하면 선생님들께 부탁해서 누워서 받을 수 있게 했다.
처음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는데 오빠만 생각하다보니 나중에는 시선도 크게 신경이 안쓰였다.
여러명에게 양해를 구하며 지낸 시간들이지만 오빠의 엄지척, 쌍따봉을 보면모든피로가풀리는 기분이었고 정말행복했다.
오빠와 투병 사진을 열심히 남겼다.
둘이 찍은 셀카도 많이 남겼지만
오빠가 열심히 투병한 기록도 내 휴대폰에 많이 담겨있다.
우리둘은 기록에 진심이었다.
경과 관찰은 물론이고 회복되는 모습도 사진을 찍어 기록했다.
카지노 쿠폰가 가고 나서 엄마는 마음아프게 이런 사진들을 왜 계속 보관하냐고 했지만,
나는 우리 둘 모두 아쉬움 없이 열심히 투병했다는 증거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요즘에도 카지노 쿠폰가 떠난게 너무 마음이 아플 때면
오빠가 아팠을 때 사진을 보며, 이젠 아프지 않다고 위로를 한다.
그래... 이때 오빠 너무 힘들었잖아. 그리고 이제는 힘들지 않잖아.
우리 둘다 정말 최선 다했잖아. 이보다 더 할수는 없었을거야.
카지노 쿠폰도 나도 고생많았어.
이렇게 생각을 하려고 노력한다.
열심히 병을 공부했고 최선을 다해 간병했다.
나는 옆에서 동반자로 묵묵히 있어주기 보다는
카지노 쿠폰만의 의사이자 간호사이자 요양보호사였다.
열심히 공부했고 열심히 간호했다.
병에 대해서도 열심히 공부했고 증상에 대해 공부했다.
먼저 요청하여 처치를 받은 것이 대부분이다.
물론 주변인들의 도움도 많았다.
약대를 다니는 동생에게 약 복용에 대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고
대학병원 간호사인 친한 언니에게 욕창, 소독 등 많이 배웠다.
난 그렇게 두손을 놓고 누가 해주길 바라기 보다는
내가 그의 담당 치료사인 것처럼 증상을 열심히도 기록했다.
하루에 소변양은 얼마나 되는지 대변양은 얼마나 되는지
식사량은 얼마나 되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건지
불편한 부분이 있는지
물론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그 덕에 카지노 쿠폰는 병원가는 빈도를 줄이고
집에서 나에게 처치 받을 수 있는건 처치받았다.
호스피스에서 산소포화도가 갑자기 떨어졌을 때에도 의사선생님은 폐렴이 아니라고임종증상이라고했지만
나는 과거 폐렴 증상과 똑같다는 확신이 들어 강력하게 폐렴 항생제를 요청했고 호전되었다.
의사선생님은 내가 맞았다며 어깨를 토닥토닥 쳐주시기도 했다.
나는 그저 우기기보다 열심히 공부하고 강력히 주장하며 오빠를 조금 더 지킬 수 있었다.
마지막에는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가 터지고 그래서 이렇게 오빠를 살리려 노력하는게 맞는건지 내가 오빠를 더 힘들게 하는건 아닐지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오빠가 원했던건 오빠를 최대한 오래 살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오빠를 위해 늘 신경이 곤두서있었다.
오빠의 위생관리 측면에서도 나는 엄격했다.
기저귀를 한두번써도 된다고 했지만 난 이물질만 묻어도 기저귀를 교체했고 늘 뽀송뽀송하게 유지했다.
조금만 습한 것 같아도 열어놓고 마데카솔 가루를 뿌려줬다.
소변도 대충 닦지 않고 매번 꼼꼼히 닦았고 대변은 늘 따뜻한 물로 물티슈를 데워 살살 닦았다.
와상환자들은 수건으로 목욕을 시킨다고 했지만 깔끔했던 오빠 성격으로 너무 찝찝해할 것 같아 마지막 순간까지 물샤워를 포기하지 않았다. 목욕베드로 옮겨 샤워기로 씻겼다. 그 과정에서 오빠도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어해서 미안했었다. 대신 목욕을 하고 나면 오빠도 너무 개운해하고 꿀잠을 자서 포기할 수 없었다.
안면마비가 와서 양칫물을 뱉지 못할 때도 입안의 균이 폐로 넘어갈까봐 아기 치약을 이용해서 끝까지 청결하게 유지했다.
모든게 처음이라 능숙하지 않았지만 끊임없이 오빠를 위해서 할 수 있는걸 고민했다.
조금이라도 오빠에게 좋은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다 했다.
오빠도 나를 믿고 잘 따라주었고 나도 정말 고생했고 최선을 다했다.
오빠가 크게 아프지 않다가 갔다.
호스피스에서 지낸 시간은 단 12일, 2주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일찍간 오빠가 미웠다.
우리가 제일 늦게 왔는데 제일 빨리 떠났다.
재활병원은 내 몸도 너무 힘들어서 오빠의 감정을 살필 수 없어 아쉬웠는데
호스피스에 와서는 내 몸도 회복되며 오빠의 감정을 더 살필 수 있어 좋았다.
오빠를 많이 쓰다듬어주고 손하트도 해주고 오빠를 토닥이려 많이 노력했다.
오빠가 잠을 자지 않을 때면 꼭 오빠와 눈을 맞췄다.
이별과 가까운 곳이라는 건 슬펐지만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이라 좋았다.
이런 곳에서 좀 더 지내다가 갔으면 좋았을텐데 더 늦게 갔다면 오빠가 더 아팠을 수도 있다.
오빤 크게 고통을 호소하지 않는 만큼 버텨주다 갔다.
너무 힘들다 가지 않아 다행이다.
나와 한 공간에 있을 때 여행을 떠났다.
내가 마지막으로 산소포화도를 체크한 시간은 새벽 네시 반이었다.
세시간 잠깐 잠에 들고 일곱시반에 화들짝 깨어났을 때 카지노 쿠폰는 이미 여행을 떠났었다.
처음에는 오빠가 떠날 때, 내가 오빠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 너무 속상했다.
오빠가 여행을 떠나는 순간, 오빠 눈 앞에서괜찮다고 말해주고안심하게 도와주고싶어 휴직한 것인데
열심히 돌봤지만 마지막 순간에 내가카지노 쿠폰 눈앞에없었다는 것이, 손을 못잡아 준것이 참으로 원망스러웠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잠시 식사를 하러 갔거나 외출을 했을 때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난 정말 평생 후회하며 지냈을 것 같다.
마지막에도 나를 찾다가 떠난 것이 아니라 자다가 편하게 갔다고 믿고 싶다.
오빠가 나를 찾다가 갔다면 난 정말 마음이 너무 아플 것 같다.
하지만 내가 본 카지노 쿠폰는 떠난지도 모를만큼 평소와 같은 자는 표정으로 있었기에
난 평소처럼 산소포화도를 측정하며 오빠가 떠난 걸 알았다.
자다가 편하게 갔다고 믿어도 되겠지... 이 부분은 아직도 조금 아쉽고 속상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빠를 배웅했다.
젊어서 떠났기에 더 슬픈 것이 사실이다.
좋은 시절은 못누리고 고생만 하다가 떠났다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작년에 퇴사처리를 하지 않고 한번 더 휴직처리를해준 카지노 쿠폰회사 덕에
카지노 쿠폰는 마지막까지 참 많은 분들께 배웅을 받았다.
우리 부모님은 오빠가 나이가 어려 화환의 갯수가 적을까봐 걱정했는데
오빠의 화환은 넘치고 넘쳐 둘 곳이 없었다.
큰 식장을 예약했는데도 첫날엔 남는 자리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배웅 속에 가서 허망하다는 마음이 조금 위로가 되었다.
짧지만 정말 멋진 삶을 살다 가주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가 보고 있었다면 그래도 나 잘살았구나 싶었을 장례식이라 다행이었다.
그리고 해외에 있던 아빠, 군대에 있던 막내 동생도 오빠의 입관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카지노 쿠폰가 바로 떠났다면 멀리 있던 아빠는 못왔을텐데 이틀정도 시간을 준 덕분에
아빠도 왔고 막내동생도 왔다.
아빠는 입관식때 오빠를 보고 무릎을 꿇고 한참 울었다. 이젠 아프지말고 푹 쉬라는 말도 함께.
카지노 쿠폰는 늘 우리 엄마, 아빠를 보면 죄송하다는 말을 했었다.
입관식때도 오빠가 우리를 보고 있었다면
"아버님, 죄송합니다." 라고 했을 것 같은데 이젠 죄송해하지마.
우리 엄마, 아빠에게도 오빤 사위 이상으로 아들이었어. 알지?
모두가 오빠를 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오빠의 법적보호자, 배우자가 되기를 잘했다.
이 내용은 나중에 다시 한 번 쓸 일이 있을 것 같지만
나는 휴직을 하며 혼인신고를 했다.
혼인신고 전, 우리 사랑의 크기와는 상관 없이 세상은 끊임 없이 법적인 보호자를 요구했다.
그 요구 앞에 서면 나는 늘 작아질 수 밖에 없었다.
세상에서 오빠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확실한데 말이다.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대리 진료, 수술 동의 등 여러 절차들을 겪으며 혼인신고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카지노 쿠폰는 나에게 흠을 주기 싫어 결혼식도 혼인신고도 하지 않았지만 막상 어쩔 수 없는 상황에 하고 나니 누구보다 좋아했다.
결혼식도 못했는데 어떻게 혼인신고를 하자고 하냐며 자기는 그런 말을 못했는데 하고 싶었다고 했다.
재활병원에 가서도 와이프라고 소개하며 좋아했던 오빠를 생각하니 귀엽고 고맙다.
오빠가 떠나고 내가 혼자 남으면 혼인신고를 후회하려나 싶었지만 그 당시에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데 장례식을 치루며 혼인신고 하길 정말 잘했다고 여러번 느꼈다.
카지노 쿠폰의 가족명단에 배우자로 이름이 올랐고 대표 상주가 되어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었다.
여자친구가 아닌 배우자여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자친구였으면 상복도 못입었을텐데 배우자로 상복도 입고, 상주가 부족한 어린 오빠를 위해 내 여동생들까지 상주가 될 수 있었고 우리 부모님도 장인, 장모로 장례식 내내 함께 할 수 있었다.
꽃도 가장 좋은 것으로, 수의도 밝은 것으로 오빠를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을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의 특권이었다.
그리고 나의 회사에서도 그동안 남자친구가 아프다는 말은 힘이 없었는데
배우자가 아프다는 말은 제도적으로도 보호가 되어 가족돌봄휴직을 쓸 수 있었다.
결혼식은 안했지만 혼인신고를 통해 휴직을 냈고
오빠의 부고를 알릴지도 고민했지만 알림으로써 마음이 아픈 것을 위로받을 수 있었다.
남자친구던 배우자이던 우리 사랑의 크기는 동일한데 서류 한장으로 달라지는 것이 많았다.
진작 혼인신고를 할걸 후회를 많이 했지만 장례식을 치루다보니 늦게라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배우자로 살고 있는데 서류 한장 때문에 애매하게 여자친구로 소개되었다면 슬펐을 것 같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무너지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는 이유를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누가 봤을 때는 그저 합리화일 수도 있지만 이 과정을 통해 어떻게든 지내고 있다.
긴 시간 우리 둘 모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후회도 많이 없다.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더 할 수 있는 힘도 없을만큼 우리 둘 모두 최선을 다했다.
그게 스스로 인정이 되다보니 그립고 슬픈 것은 당연하지만
사별자를 가장 힘들게 하는 자책과 후회가 적어서 그래도 하루하루를 지낼 수는 있는 것 같다.
어떤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나는 그렇지 못했는데 하고 아쉬워할 수도 있지만
모두 상황이 다르고 개인 마다의 환경과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셨을 것이다.
지금 누군가를 간병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힘든 시간이시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너무 부러운 시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간병, 사별중 택하라면 고민없이 간병을 택할 것이다.
나와 같은 상황에서 사별의 아픔을 겪고 계신 분들은 그래도 우리 살아가려고 함께 노력했으면 좋겠다.
힘들고 슬픈 한달이 어떻게 또 흘렀고
며칠 뒤면 내 생일이다.
12월에 호스피스에 갈 때, 그래도 내 생일까지는 함께 해주길 바랬었다. 그럴줄 알았었고.
그런데 처음 오빠가 없는 생일이다.
9번이나 카지노 쿠폰와 함께 내생일을 축하했는데,
매년 카지노 쿠폰가 해준 선물이 가득한데,
작년 생일이 생각나서 많이 슬플 것 같다.
카지노 쿠폰도 내 생일에는 나 보려 오려나?
벌써 그 날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고민이 된다.
그 곳에서 내 생일 축하해줘 카지노 쿠폰
내게 닿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
카지노 쿠폰가 축하해주고 있다고 믿을거니까!
선물은 카지노 쿠폰가 그곳에서 잘 지내기
그거면 충분해
정말 많이 사랑해 카지노 쿠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