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ffee
모닝커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오전 8시 40분쯤 출근하여 책상에 앉아 메일 확인 및 잡다한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잠시 인터넷 뉴스 중 관심 있는 기사들을 훑어보고, 여기저기 사이트 몇 군데를 돌아보고 나니 10시. 이제사무실 중간에 위치한 휴게실로 향할 시간이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공짜로 원두를 갈아 뜨거운 커피를 내려주는 고마운 커피머신이 있기 때문이다. 난 매일 그 고마운 커피머신을 이용하여 오전에 한잔, 점심식사 후 오후에 한잔 이렇게 하루 두 잔의 커피를 즐기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의 루틴을 위해 텀블러를 들고는 터벅터벅 휴게실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조용하고 건조하기만 한복도를 따라 사무석 몇 개를 지나니 곧 휴게실 문 앞, 난 그 앞에 서서 자동문 센서를 향해 손을 한번 휘졌는다.
'키가 작은 것도 아닌데 꼭 인사를 해야 문을 열어준 단 말이야.'
문 위에 달린 센서는 인사를 받자 붉은빛을 깜박이며 나에게 윙크하더니 이내 슬라이딩 도어를 한쪽으로 스르륵하고 열어 준다.
‘땡큐~’ 나는 속으로 자동문에게 감사인사를 전한다.
문이 열리자 내가 서있는 곳은 휴게실 안쪽과 복도 바깥쪽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서로 뒤엉키고 충돌하며 흡사 회오리바람이 난무하는 전쟁터와 같이 변한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휴게실 안 쪽에 가득하던 진하고 후끈한 커피의 향이 승리하여 내 코끝으로파고든다.난그 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눈을 살짝 감고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커피의향기는곧코에 있는 모든 후각세포를 가득 채운 후두 개의 폐를 지나 금세 머릿속에 위치한 뇌세포까지 도착한다. 그리고 뇌에 도착한커피의향은 즉각적으로 무한복제가 일어나는 듯,실시간으로 온몸 구석구석까지 빠르게 퍼져나갔다. 내 육신은, 두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와 몸은 거기에 반응하여 안정감(?)과도 같은 감각으로 채워진다.
'음. 커피의 효과는 이 향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나는 휴게실 안으로 들어가 텀블러를 흐르는 물에 대충 헹구고는 커피를 뽑기 위해 머신 앞에 섰다. 아메리카노 원샷과 투샷을 고민하며텀블러를 머신 위에 올려놓은 후 슬쩍 눈길을 돌리니 옆에 있는 정수기 앞에는 3년 전 내가 팀 스텝 일을 하던 첫 해, 처음으로 우리 팀으로 배치되었던 그리고 내가 직접 이곳으로 인솔해 왔던 첫 번째 신입사원 효진 님이 서 있다.
신입사원
신입 사원들이 모여있던 건물 6층 대회의실에서 우리 팀 인원으로 호명된 효진 님과 함께24층으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난 참으로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파트가 확정되어 앉을자리가 정해진 것도 아니고 개인 PC도 지급받지 않은 상태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라 해야 할지가 우선 첫 번째로 드는 고민이었다. 다른 팀처럼 여러 명의 신입사원이 한 번에 왔다면 층에 있는 빈 회의실을 하나 예약하고는 그곳에 밀어 넣은 뒤 우선 서로 알아가고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라고 하면 될 것인데 딸랑 한 명이니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다. 24층에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문이열릴 때까지 특별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하는 수 없이일단신입사원과 함께 내 자리까지 걷는다. 걸으면서 지나는 자리들을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파트를 간단하게 소개해주지만 나나 그녀나 이 상황이 뻘쭘하긴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 자리에 도착하여우선 근처에서 일하고 있는 행정 사원과먼저인사시키고는 행정 사원과 내 책상 사이에 짐으로 꽉 차 있던 빈 사무석을 대충 정리하고 회의실에서 의자를 구해다가 자리에앉혔다.
PC를 열어 팀장님 일정을 확인하니 가장 빠른 면담 가능 시간이 2시간 후. 신입이 2시간 동안 옆에 가만히 앉아 오가는 팀원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는 것도 낯설고 어색할 것이라 생각이 들어 무엇을 해주면 좋을지 빠르게 머리를 굴렸으나역시뾰족한 방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확인하니 역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난감한 듯이 슬쩍 웃는다.
나는 당장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없겠다 팀장님과의 면담 시간 전까지 함께 놀기로 작정하고 신입사원님을 이끌고 사내 커피숍으로 향하기로 마음먹었다.
"커피 한잔 하실래요?", "좋아요~"
나는 사내 카페 프런트 위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바라보며 선배로서 당연히 해야 할 말을 했다.
"모든지 시키셔도 됩니다."
효진 님도 "감사합니다." 하고는 으레 신입사원이면 그래야 한다는 듯이 가볍게 웃어 보였다.
나는 원체 내성적이 성격이라 처음 보는 사람과 단 둘이 있는 것을 최대한 피하는 스타일이지만, 옆에 있는 이 분과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회사 혹은 팀, 아니면 월급쟁이 회사원에 대한 첫인상일 수도 있으니, 무슨 이야기든 도움이 되고 좋은 이야기를 해주어야 할 것만 같아서다.
"이따가 팀장님 만나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느 파트에 가고 싶은지 이야기하시면 돼요. 혹시 생각해 둔 곳이 있나요?"
말을 걸면서 가만히 살피니 약간은 까무잡잡한 피부에 슬쩍 미소 지을 때 양 볼에 보조개가 생기는 얼굴에서 '개구진 성격이지 않을까?'라는 느낌이 든다. 전체적으로 옷매무새를 보면 '어디가 문제다'라고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어색함이 묻어나는 까만색 정장에 하얀 블라우스, 단정한 구두에 잘 정리된 긴 머리까지 누가 봐도 신입사원이구나라고 알아챌 수 있는 복장이다.
'내일은 편하게 입고 와도 된다고 꼭 말해줘야지.'라고 생각했다.
"어제 선배님이 오셔서 팀 소개 하실 때, 팀 업무 중에 EDA Tool활용해서 레이아웃 설계하는 부서가 있다고 들었어요. 그쪽 업무 해보고 싶어서 지원해 볼까 생각 중입니다."
그녀는 혹시나 실수하지는않을까 조심스러운 말투긴 했지만 얼굴 표정은 한결 편해진 듯하다.아마도 무미건조한 사무실보다는 훨씬 개방감이 큰 카페 분위기가 더 맘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해당 업무가 개인 커리어 측면에서 비전이 있고, 부서 사람들 분위기도 좋아서 일 배우면서 적응하면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며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들을 듣기 좋게 포장하여 이야기했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 말고 다른 무슨 말을 하겠는가? 이제 시작을 앞두고 있는 이에게..
진동벨이 울리자 우리는 기다리던 음료를 받아 들고 드나드는 사람이 적은 반대편 건물의 휴게 공간으로 이동했다. 잎이 큰 식물들로 꾸며 놓아 초록초록하여 기분도 산뜻해지고은신의 기능 또한 갖추고 있어 개인적으로 자주 이용하는 곳이다.
3.6.9
"혹시 모 궁금한 거 없어요?"
나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아메리카노를 후후 불며, 먼저 그녀에게궁금한 것이 없는지 물었다.
"혹시 밤늦게까지 그리고 주말에도 일 많이 하고 그럴까요?"
그녀는 차를 한잔 마시고는 곧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고 내게 물어왔다. 그 물음을 듣자 내가 입사하고 처음 부서 배치받았을 때 했던 똑같은 걱정이 떠올랐다. '꼭 늦게까지 남아야 하는가?'나는 그질문을 직접적으로 해본 적은 없지만, 관련해서 나중에 내게최고의멘토와도 같았던 주영 선배에게 들었던 선배 본인에 대한 평가가 하나 있다.
'나는 저 신입이 매일같이 새벽에 퇴근하길래 머리가 나쁜가 생각했다. 별로 어려운 일을 시킨 것도 아닌데.'
내게는 정말 일 잘하고 물어보는 것에 대한 모든 답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았던, 하늘 같던 주영 선배의 신입사원 시절에 대한당시 파트장의 속마음이었다고 한다. 주영 선배는 신입사원으로 부서 배치를 받고 다른 부서 동기와 함께 업무 시간을 마치고 나서도 스펙과 코드를 보며 열심히, 열정적으로 공부했다고 했다. 새벽에 자취방에서까지 동기와 열띤 토론을 하며 공부했다고 하니 말 다한 수준이다. 아마도 그는 정말 그 정도로 열심히였을 것이다. 내가 느낀 주영 선배는 분명히 그랬을 사람이니까. 근데 그에 대한 부서장의 평가가 '머리가 나쁜가?'였다니.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지금도 역시 슬그머니 웃음이 새어 나오는 기억이다. 나는 그이야기를 듣고 괜히 잘 보이려고 일부러 늦게 퇴근할 필요까지는 없겠구나라고 생각했더랬다. 지나고 보니 정답은 아니었지만.어쨌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고 결국 주영 선배는 파트장의 오른팔과도 같은 믿을 만한 부서원이 되었다.
나는 그녀에게 그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야근을 나머지 공부로 생각하는 정말 똑똑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지내보니 잘하는 것보다 열심히 하는 걸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더라’라고.
그리고는 그 선배와 있었던 또 하나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신입사원시절에난 당연히 모든 것을 모르고 있었으니, 스스로 결론짓기 애매한 모든 것들에 대해 주영 선배에게 묻곤 했다. 그는 바로 내 옆자리였기에 일하다가 막히는 것이 있으면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선배님!”하고 부르는 식이였다. 그럴 때마다그는 기꺼이 고개를 돌려 내 질문을 주의 깊게 듣고는 의자를 직접 내 책상으로 끌고 와서 질문한 것에 대한 답, 그리고 내가 모르고 있다고 생각되는 업무의 흐름과 배경, 앞으로 진행해 나가야 할방향, 참고하면 좋을 자료들까지, 정말 하나를 물으면 열을 알려주는 수준으로 답해주었다. 그리고 가끔은 내 질문에 대해고민하며함께문제를해결해 나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도 난 선배로부터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문제를정확하게 혹은 새롭게 다시 정의하거나,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면 좋을지, 어떤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는지, 과거 내역들은 어떻게 해석하면 되는지에 대해. 나는 주영 선배 옆에서 그가 일하는 방식을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정말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그에게 묻고, 배워가는 것이 좋았고 당연스럽게 많이 의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3년 차가 되었을 때에도 난 여전히 일을 하다가 막히는부분이 있으면 바로주영 선배에게달려가질문을 하곤 했다.하지만 어느 날인가 선배의 대응이 많이 달라진 것을느꼈다. 하나를 물으면 하나만 대답해 주는느낌? 나는 개의치 않고 하나의 대답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물음들을 지속적으로 물었으나‘그런 건 이제 직접 알아보라’는 듯한 냉담함?을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언제나 나의 비빌 언덕이었던 든든한 선배의 변한 태도가 좀 당황스럽기도 했으나, ‘선배가 힘든 일이 있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 선배의 심드렁함은 시간이 지나도변하지 않았다. 나는 모르는 것이 생겨도 바로바로 해결해 주는 선배가 없어진 상황에서 어쩔수 없이 일을 좀 더 묵힐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처리해야 하는 일을 묵히는 동안난관련된 코드도 더 많이 살펴보고, 혼자서 다른 사람들의 리포트나 관련 스펙도 찾아보고, 또 주영 선배가 아닌 다른 선배들을 찾아다니며궁금한점을묻고 답을 얻어가면서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어진 일을해나가고있었다.
그리고그런 상황은 나에게 꽤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전에는 한번 물어보기만 하면 척척 해결되던 것들이 이제는 혼자 찾아보고, 맞춰보고, 틀리면 다시 해야 하니...그중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건 내가 생각하는 방향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리고 당연하게도 가끔씩은 그런 방향과 방식에 대한 질책도 이어지곤 했다.처음 겪게 되는 상황들그리고 전과는 다르게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일들은조금씩 나에게 어려움으로 쌓여갔고 일하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아 졌다.
그러던어느 가을날신입사원 때와는 다른 시간들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나는 파트장이랑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 면담 자리에서그는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3년 차, 6년 차, 9년 차쯤에 한 번씩 힘든 시기를 겪게 된다. 회사 출근하기가 싫고, 일은 쳐다보기도 싫은 그런 시기가. 실제로 해당 연차에 그만두는 경우가 더러 있다'라고.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다니다 보면 괜찮아지니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지나가는 일이다 생각하라는 말까지들을 수 있었다. 그말을 들었을 때회사는그냥항상 출근하기 싫은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연차가어느 정도차니그때 파트장이 이야기한3, 6, 9년 차 슬럼프의 의미를알 수 있게되었다.
3년 차쯤 되면 이제 웬만한 일은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누군가 시키는 대로, 알려주는 대로 따라가는 수동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본인이 어느 정도 책임감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일을 해야 하는 시기. 신입 사원 시절 어떤 실수든 괜찮다 말해주던 이들이 없어지며 혼자서 일 인분 정도는 해내야 하는 시기가 되는 것이다. 이때 회사에서, 주변에서 업무에 대해 요구하는 책임감의 크기가 달라지므로 그것이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하지만 당연히 감당해 내야 하는 역할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일 인분정도를큰 문제없이처리하게되면서 다시 그럭저럭 다닐 만 해지게 된다.
그러다가 6년 차쯤 되면 나는 전과 다름없이 충분히 일 인분 정도를 해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또 다른 분위기 때문에다시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번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혼자 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시기인 것이다. 이제 밑에 후배님들도 있으니 내가 하는 일에 더해서 후배님들의 일도 잘 돌아가도록 어느 정도 신경 써주기를 요구받는다. 내가 책임지고 있는 일뿐만 아니라 좀 더 넓은 영역에 대해서도 책임감을 가지도록 말이다. 그리고 그런 책임감의 확장은 역시 개인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오게 된다. 하지만 이것 역시 감당해 내야 하는 역할이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다시 그럭저럭 후배들까지챙기며 다닐 만 해지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9년 차. 내가 맡은 업무, 후배들이 맡은 업무들도 어느 정도 챙기면서 일하고 있는데 거기에 더 큰 책임감이 얹어진다. 프로젝트가 될 수도 있고, 작은 파트의 리더 자리가 될 수도 있다. 이건 단순히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업무만을 챙기는 것과는 또 다르다. 회사라는 거대한 존재는 수많은 업무와 조직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연결 관계에서 하나의 프로젝트 혹은 조직을 맡아서 전체 회사가 돌아가는 시스템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운영하는 것은 또 다른 종류의책임감을 요구한다. 그리고 역시나 책임감의 확장은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하지만이번에도하루하루 회사에서 요구하는 업무를 처리하다 보면 그런 역량이 자라나게 되고 또 그럭저럭맡은 바역할을 해내게 된다.
이것이 내가 깨닫게 된3, 6, 9년 차에 겪는 슬럼프이자 허들이다. 이 허들들은보통딱히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잘 버티기만 하면 무난하게 넘게 된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회사에서사원들을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소수지만커진 책임감혹은 관련된스트레스로낙마하는 사람도가끔있다. 낙마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것 같다. 위대한 탈출이거나더높은 곳으로의 도약일 수도있으니...
어쨌든 내가 들었던 그리고 겪었던 3, 6, 9년 차 슬럼프 이야기 그리고 개인적으로 정의한 슬럼프를 겪는 이유들에 대해효진 님에게 쭉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고 혹시그런 종류의 슬럼프가 오더라도 너무 스트레스받지 말고, ‘아 그 시기가 왔구나’ 생각하고그냥 나랑 커피나 한잔하자고 연락하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다니다 보면 괜찮아진다는,내가 들었던 똑같은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고 있었다. 회사는 효진 님을 그런 사람으로 성장시킬 테니말이다. 주영 선배나 다른 이들이 나에게 그러했듯이...
하지만내 마음속에 있는 결이 다른 생각까지는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회사가회사원들에게 조금씩 더많은 책임감을짊어지게 만들며그들을성장시킬 때,그들이어떤모습으로변하는지. 또한, 그들이눈치도 못 채는 사이에, 월급과 고과와 진급이라는 미끼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는지.회사가제공해주는 것들이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그런 미끼들로 내 삶을 갉아먹으려 하는 경우도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생각말이다. 어떤종류의성장혹은사회생활이라불리는 것들은어쩌면나의 본성이나 나다움을 잃어버리는 과정일 수도 있지 앓을까라는생각.신입사원인 그녀에게는 아직 필요치 않은 말일 것이므로 입 밖으로꺼내지는않았다.
그리고 여러 출장지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고 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팀장님이었다.
"팀장님 회의가 좀 일찍 끝났나 보네요. 올라가시죠"
효진 님과 나는 두 번째로 함께 24층으로향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처음에 내 마음을 가득 채웠던난감함은 사라진 것 같다. 그녀도 그런 어색함이 줄어들었을까?
"선배님, 재미있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효진 님이보조개를 내보이며 활짝 웃어주었다.
택시와 버스
나는 정수기 앞에 서있는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효진 님. 잘 지내고 있어요? 오늘도 버스 잘 타고 왔죠?"
그녀도 나를 발견하고는 수줍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요. 저 이제 택시 안 타고 다녀요"
두 달 전쯤 저 옆 창가에 놓인 테이블에 앉아 있는 효진 님을 봤을 때, 그녀는 홀로 머리를 쥐어짜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나는 혹시 '3년 차의 슬럼프를 겪고 있는 건가?' 생각되어 커피를 받은 후 옆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는 무슨 일 있냐고 물었다. 다행히도 그녀는 회사생활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선배님. 돈이, 도무지 돈이 모이지 않아요"
"돈이요?"
나는 예상과 다른 그녀의 답변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서 한번 빙그레 웃고는 그곳에 앉아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쭉 들어보고 나니, 요지는 어서 목돈을 마련하여 부모님 집에서 나와 독립을 하고 싶은데, 회사 다닌 지 3년이 다 됐는데도 모은 돈이 한 푼도 없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리고 홀로 머리를 쥐어짜면서까지 괴로워하고 있던 이유는 일 년 전부터 베이스 기타를 배우며 사람들과 합주도 하고, 또 여기저기 콘서트며 페스티벌이며 쫓아다니고 있는데, 'BackStage Pass만은 도저히 포기할 수 없다'가 첫 번째 이유였고, 2년 연속으로 다녀왔던 유럽 여행을 이야기하며 '여행을 다니지 않는 삶으로는 회사 생활을 견디어 낼 수가 없을 것 같다’가 두 번째 이유였다. 들어오는 돈은 정해져 있는데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살다 보니, 독립과 자취라는 본래의 목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본인이 돈을 많이 쓰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파악하였으나, 그 삶을 놓고 싶지 않아 생겨난 괴로움에 고통받고 있다고 했다.
나는 꼭 그 모습이 어린아이 같다고 느껴져 웃음이 나왔다. 너무 놀고 싶어서 필사적으로 졸음을 물리치며 정신을 붙잡아보지만, 또 동시에 너무나도 잠이 와서 두 눈이 절로 감기며 고개를 떨구는어린아이의 모습. 그리고 그 아이가 부리는 잠투정??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쭉 듣고는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겠다며, 마음을 그냥 먹으라고 말해주었다. 효진 님이 마음속으로 더 많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을 테니, 잘 들여다보고는 그냥 결심하면 될 것 같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기운 빠진 목소리로 '그래야겠죠'라고 대답했고, 우리는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좀 더 하다가 서로 웃으면서 휴게실을 나섰다.
그리고 자리에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에 대해 고민했었던 그 맘 때의 내 모습을 정리해 둔 글이 생각났다. 메모장에 적어둔 그 글을 다시 읽어보고는 '이 글을 그녀에게 공유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유하자니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으나, 한 편으로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픈 마음도 일었다. 결국 나는 조금 더 고민하다가 사내 메신저를 통해 정리해 두었던 글을 쭉 보내고는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라고 결정했던 나의 이야기라고 메신저에 적었다. 그녀는 몇 분 동안 답이 없다가 내가 공유해 준 글을 다 읽었는지 고맙다고, 신경 써줘서 좀 감동이었다며 자신도 이제 결심했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때 그녀가 전해준 결심 중 하나가 '늦잠을 자도 절대로 택시를 타지 않고 버스를 타고 출근하겠다'였다.
아직 그때의 결심을 잘 지키고 있는 것 같아 '잘하고 있네요~ 파이팅!'이라고 응원해 주고는 커피 머신의 아메리카노 투샷 버튼을 눌렀다. 버튼을 누르자 '윙~'하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드드드득' 커피 원두가 부서지며 갈리는 소리가 휴게실 안에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출근하고부터는 쉬지 않고 커피를 부수고 또 갈고 있을 것이므로, 그 소리는 머신이 내지르는 비명소리 일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커피 머신이 만약 말을 할 수 있다면 오징어게임의 성기훈처럼 '얼~음!!!'이라고 외치고 싶지 않을까?하지만 머신은 말을 할 수 없으므로 비명소리를멈추고는곧 뜨거운 커피를 흘려보냈다. 그의짙은 갈색을 띤눈물이 쪼르륵 소리를 내며 텀블러에 조금씩 채워지고 있다.
그때 옆에서 티백을 우려내고 있던 효진 님이 곁으로 쓱 다가오더니비밀인 듯 조용히 내게 말을 건넸다.
"저 내일 생일이에요"
저 내일 생일이에요
"?!!"
회사에서 이토록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얼마 만에 듣는 걸까?
'저 내일 생일이에요?!!'
기시감이 드는 그 멘트를 듣고는 우선 웃음이 지어졌다. 그리고 ‘뭐지 이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잠시 얼떨떨하였으나, 금세 정신을 차리고선 일단 진심을 다해 그녀의 생일을 축하해 주었다.
"오~ 효진 님. 내일 생일이에요? 축하해요!"
후배님이 다시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네, 그냥 축하받고 싶었어요~"
나는 '내일 생일이면 친구들과 파티하나요?’라고 웃으며다시물었다. 그녀는 내일 휴가를 쓰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대답해 주었다.‘아마도 남자 친구와 근사한 데이트를 하려나 보군?’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나관련해서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근데 그 멘트. ‘저 내일 생일이에요.’ 이거 그건데...”
나는 좀 전 상황에서 느꼈던 기시감을 떠올리며 머릿속 어딘가에 박혀 있을 과거의 기억을 뒤졌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어여쁜 여인이 수줍게 남자에게 건네는 ‘저 이번에 내려요’라는 멘트였다. ‘무슨 광고였더라’. 분명 그 장면은 생생한데 어떤 광고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무어라 설명을 해야 하지? 내가 고등 학교다니던 때에 봤던광고이니 그녀는 아마도 모르고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계속 기억을 더듬고 있었다.
“그거 광고에 나오는 멘트였는데… 모였더라..?”
“저도 알아요.” 그녀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그거 따라한 거예요~”
역시 개구진 것 같았던 3년 전의 첫인상이 틀리지않았나 보다.
나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길에 가위, 바위, 보해서 진 사람이 여학생에게 '저 이번에 내려요'라고 말하는 내기를 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도 한번 져서 여학생 앞에 가서 '저 이번에 내려요'라고 말하고 버스에서 내린적이 있었는데,그때 얼굴이 완전 새 빨개져서 정말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는 "선배님이요?"라며 같이 깔깔거리며 웃어주었다.
우리는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휴게실을 나섰다. 나는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요~. 내일 춥다니까 따뜻하게 챙겨 입고 놀아요~!’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여전한 보조개와 함께 고개를 숙이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나도 자리로돌아와책상 앞에앉아아직 뜨거움을 유지하고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내마음이 조금은 말랑말랑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최근에는 정말 여러 가지 이유로 회사에서는 재미없고 칙칙한 시간만을 보내고 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에게서 '뭐지?'라는 느낌이 드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아무도 개인의 생일을 챙기지 않는 요즘 회사 분위기에서 그녀도 나에게 생일 축하를 받아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내일이 생일이라고 했으니 내일 점심먹고까먹지 말고 커피 쿠폰이라도 선물해 줘야겠다'라고마음을 먹고는다시 PC를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