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막 샤워를 하고 나왔다. 시끄러운 환풍기 소리를 뒤로 한채 내가 방금 빠져나온 화장실은 뜨거운 열기와 뿌연 수증기로 가득하다. 나는 몸과 마음이 한없이 개운해져 이대로라면 일순에 어디론가 훨훨 날아갈 수 도 있을 것만 같다.앞에 딸의 방문이 열려있다. 올해 12살 딸은 지난달부터 자기 방에서 자기 시작했는데 고양이 때문인지, 뭐 때문인지 매일 밤 이렇게 활짝 문을 열어 놓고 잔다. 7살 아들은 다행히도 누나 없이 혼자서 곧잘 잔다. 아마 씻고 있는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을 거다. 난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 반 고마운 마음 반으로 지금 이 순간을 맞이한다.
그래, 난 이 시간을 기다렸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이 육퇴한 밤을 말이다. 신랑은 식탁 자기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보고 있다. 보통은 웹툰을 보거나 골프게임을 하는데 오늘은 경제 관련 유튜브 강연을 보고 있는 듯했다. 나는 씻고 나온 빨래 더미를 얼른 세탁실에 가져다 놓고 신랑 맞은편 내 자리에 앉는다. 따뜻한 차 한 잔이 떠오른다. 오늘 하루도 애쓴 나를 위해 시계꽃 차를 우린다.
나는 이제 내일 일정을 짠다. 노트를 펼치고 맨 위에 날짜를 크게 쓴다. 오른편엔 작은 네모 칸을 그리고 바로 옆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적는다. 딸의 학원비 결제, 휴지 주문, 생강차 끓이기, 장 보기,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 등, 이런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집안일들이 아주 급하고 중요한 일들인 마냥 네모 칸 옆을 채우고 있다. 난 이 일들을 해치우고 나면 네모 칸 안에 체크 표시를 하고 밑줄을 쫙쫙 긋는데, 그럴 때마다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리고 왼편엔 시간순으로 할 일들을 적어 내려간다.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부터 자기 전까지 내가 놓치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을 일목요연하게 아주 구체적으로 정한다. (아마 나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나를 보고 굉장한 J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난 굉장한 P형이기에 이렇게 한다. 이렇게라도 안 하면 난 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또 깜박해서 곤란한 순간들이 자꾸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솔직히 난 J형이 되고 싶은 P형이라 말할 수 있다.)
이때 내가 가장 고민을 많이 하는 부분은 바로 내일 차려야 할 세끼 메뉴다. 우선 신랑 아침은 전날 자기 전에 준비한다. 난 쟁반에 수저, 젓가락, 밥공기, 국그릇, 반찬, 사과즙까지 놓는다. 신랑은 굳이 차릴 필요가 없다고 말하지만 난 웬만하면 신랑이 바로 밥을 뜨고 국만 데워 먹을 수 있도록 세팅해 둔다. 아침 일찍 혼자 출근하는 신랑에게 위안이 되고자 한다. 그의 사기를 올리고 건강도 챙겨 주고 싶은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난 신랑 아침 차려주는 걸 스스로 되게 으스댄다. 전업주부가 하는 일들은 죄다 온종일 해도 티가 하나도 안 나는데 이건 딱 티가 나는 일이라 신랑한테 생색내기에도 그만이다!
다음으로 아이들과 나의 아침 메뉴를 정한다. 주로 채소나 과일, 거기에 삶은 달걀이나 고구마, 감자 수프를 더한다. 집에 방학한 딸도 있으니 점심에는 딸이 좋아하는 빵이나 면, 떡에 감귤류의 과일과 우유나 주스를 마신다. 저녁에는 가족들의 만찬을 위해 내 나름 정성껏 요리한다. 특히 요즘엔 신선한 재료 위주로 많이 먹다 보니, 그만큼 장도 자주 봐야 한다. 이렇게 계획한 대로 세끼를 챙겨 먹으려면 내일도 아마 마트에 가서 장부터 봐야 할 테다. 내일은 언제 짬을 낼 수 있나 노트를 살피는데, 갑자기 신랑이 보고 있는 영상에서 어떤 목소리가 내 귓속에 훅하고 들어온다.
“인류 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화폐가치의 기준이 된 것은 무엇일까요?” 무심코 난 “금이요” 하고 대답한다. 얼마 전에 나는 경제에 관한 책을 읽었다. 신랑은 돈에 관해서는 무지한 내가 맞는 대답을 하니 살짝 놀란 눈치다. “오~ 공부한 티가 나네!” 신랑은 나를 놀리듯 칭찬한다. 그리고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내가 먼저 묻는다. “시간이 갈수록 돈의 가치는 계속 떨어지는데,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해?” 신랑이 답한다. “투자해야지. 나도 몇 군데 돈을 굴리고 있어. 급할 때 써야 할 돈만 남기고 투자했지.” 나는 그가 기특하다는 듯 “우리 가장 님, 투자씩이나 하셨어요?” 한다. “다행히 네가 돈을 많이 안 쓰는 편이라 조금씩 모았지.” 한다. “음, 그래, 그건 맞는 말이지.”
사실 난 쫄보라 큰돈을 함부로 쓰지 못한다. 유행 따라 이것저것 사들이는 것도 그리 즐기는 편이 아니다. 게다가 몹시 신중하여 고민만 하다가 사지 못한 물건들도 꽤 많다. 결국, 소심하고 느린 나의 면모들이 우리 가계에 도움이 됐다는 거다. 의도한 것도 아닌데, 내가 생각하는 나의 단점이 장점으로 승화됐다고 생각하니, 난 좀 어이가 없어 "피식" 웃음이 났다.
신랑이 먼저 운을 뗀다.
“내가 요즈음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곳이 있어. 투자하고 싶은데, 투자하려면 대출을 받아야 해. 대출을 받아야 할지 말지, 그게 고민이야.”
“아! 그래? 나는 지금 당장 내일 먹을 세끼 메뉴를 한참 고민하고 있었는데, 신랑은 그게 고민이구나?”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알 수 없지만, 알 것 같은 미소를 서로에게 지어 보였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는 두 남녀가 있다. 같은 시공간 안에 여자와 남자는 그들이 선택한 역할만큼이나 서로, 다른 고민을 한다. 각자 다른 것을 고민하는 이들이 서로에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남자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경제적 책임을 느끼며 돈에 관한 고민을 하고 여자는 그 가정의 전업주부로서 살림에 책임을 느끼며 가족들의 먹거리에 관한 고민을 한다. 남자는 미래를, 여자는 오늘을 고민한다.여자의 오늘은 남자의 오래된 미래이기도 하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의 미래와 오늘을 책임지는 사이다. 각자 맡은 역할과 책임을 다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것을 서로의 눈빛을 통해알고 있다.그렇기에 이 가정이 오늘 평온하다. 지금, 두 남매는 자고 있다. ‘소녀는 포근한 이불속에서 사랑하는 고양이와 잠이 들었겠지. 더 어린 소년은 이부자리에서 뒹굴뒹굴하다 곯아떨어졌을테고.’
아이들이 잠들고 나서 겨우 찾아온 이 달콤한 휴식시간에 난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들이 무척 보고 싶어 진다. 딸의 방에 조용히 들어가 이불을 덮어주고 딸의 얼굴을 매만진다. 잠든딸의 얼굴에서아기 천사를 본다. 나를 보고 가르랑거리는 고양이도 만져 준다. 아들을 보려면 이제 그만 자러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육퇴한 이 밤은 늘 아쉽기 마련이다. 이 밤의 끝을 한없이 잡고 싶지만, 어느 정도 잡을 수도 있겠지만, 그 시간이 지금처럼 애틋할 리 없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자꾸 하품이 나고, 어떤 것에도 집중이 잘 안 되며, 내일을 활기차게 맞이할 수도 없다.
내일이 있음을 안다. 아들이 엄마를 기다리다 잠이 들었을 것을 안다. 여자는 쓰던 노트를 닫고 물을 한 잔 떠 자러 들어간다. 아들에게 간다. 남자는 아직은 아니라는 듯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켠다. 그들은 내일 이 시간에 다시 만날 것이다. 그들의 고민은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