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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르mihr Apr 26. 2025

검정 카지노 쿠폰 세 개

꿈의 해석 - 다섯 번째 장 : 꿈-재료와 꿈-출처



꽃이 만발했던 눈부신 어느 봄날. 뭐가 그리 고단했는지, 소파 위에서 까무룩 낮잠에 빠진 나는 가위에 눌리며 꿈 하나를 꾸었다.


<누군가 현관문을 계속 두드린다. 쾅쾅쾅 쾅쾅쾅. 너무 시끄럽다. 꿈속의 나는 현관문 안쪽에 서서, 누구세요? 묻는다. 에미야 나다. 엥? 우리 어머님 목소리와는 완전 다른데. 어떤 노인네인지 집을 착각하셨군. 그러는 사이, 문 아래 틈새로 뭔가 쑥 넘어온다. 선물? 검정색 핸드백이다. 그런데 그 옆으로 그런 비슷한 카지노 쿠폰이 두 개나 더 놓여 있다. (카지노 쿠폰들이 예뻐 보이진 않는다) 꿈속의 내가 추측하기를, 이 분이 나 없을 때 벌써 두 번이나 더 여기로 (잘못) 왔었구먼. 당신이 찾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나는 당신 며느리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문을 열려는데, 문이 잘 열리지 않아서 애를 먹는다.


*


프로이트는 꿈-재료를 최근의 '사소한' 체험들에서 찾아낸다. 나도 따라서, 꿈의 출처를 찾기 위해 최근의 사건들을 되짚어본다.


@ 시어머니- 낮잠 자던 바로 그날 오전에, 나는 시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했다. 말 수 적은 시아버지와 적적하게 지내시리라는 염려에, 나는 주기적으로 어머님께 전화를 드린다. 이제쯤 전화드릴 때가 되었다 싶었는데, 시부모님이 꽃놀이 가셨다는 걸 (가족톡방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다. 염려할 만큼 적적하게 지내시는 건 아니라는 안도감과 함께, 시어머니는 (아들이나 손주 걱정을 할 뿐) 실상 며느리가 어찌 지내는가 하는 걱정 따윈 아마 전혀 안 하실 텐데, 나는 왜 쓸데없이 시어머니 걱정한다며 착한 '척'을 하고 있나. 나도 꽃구경이나 한 껏 하면서 자신이나 잘 돌보자,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리에 떠올랐다.


@ 세 개의, 검정, 카지노 쿠폰- 프로이트는 꿈에 보이는 가방을 주로, (성적 대상으로서의) '여성'으로 해석한다. 어떤 '남성'의 꿈에 나타난 검은 가방 두 개를, 그가 최근에 만났던 두 명의 흑인 여성으로 해석하는 식이다. 물론 내 주변에도 세 명의 여성이 있기는 하다. 같은 집에 친정엄마와 딸 둘이 함께 살고 있으니, 나는 세 개의 가방 - 3명의 여성을 늘 마주하는 셈이다. 또,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시누이도 셋이니, 그쪽도 세 개의 가방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중 아무도 '검지' 않다! 프로이트식의, 성적 해석이 이 꿈에는 좀 안 맞는 것 같다.


*


꿈을 꾸기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들고 나온 손카지노 쿠폰을 보고 특이하다고 말했다. 카지노 쿠폰의 입구가 세 군데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꿈속 카지노 쿠폰과 3이라는 숫자가 뭔가 통하는 것 같기도 한다. 그러나 그 카지노 쿠폰은 검은색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실제로, 내겐 검정색 카지노 쿠폰이 세 개 있다.


아주 커다란 검정 카지노 쿠폰 하나. 아이들이 아주 어릴 적, 나는 튼튼한 나일론 소재의 이 카지노 쿠폰에 기저귀와 여벌 옷들까지 싹 다 담아 다녔다. 또 하나의 검정 카지노 쿠폰은, 요즘 주로 도서관에 갈 때 들고 다니는 검정 백팩. 글쓰기를 위한 노트북과 함께, 오다가다 장 본 물건-주로 식료품-을 함께 넣어 다닌다. 마지막은 작은 핸드백인데, 학부모 모임에 들고 갈만한 게 없어서, 급하게 '당X마켓'에서 아주 싼 값에 구했다.


그러나 실상 세 카지노 쿠폰 모두, 내 마음엔 쏙 들지 않는다. 처음 것은 크기도 너무 큰 데다 움직일 때마다 나는 나일론 마찰 소리가 듣기 싫다. 백팩은 겉에 주머니가 없는 것도 그렇고, 매고 다니다가 장 본 것을 넣을 때 특히 (내 뒤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때는 더욱더) 시간이 걸리고 불편하다. 마지막으로 핸드백은, 끈 길이도 어정쩡하고 자석으로 된 덮게가 한 번에 잘 여며지지를 않는다.


셋 다 나 자신의 선택으로 산 것들이지만, 그럼에도 마음에 딱 들진 않는다. 나는 카지노 쿠폰에 대해, 실상 일종의 패티시즘이라 할 만하다. 카지노 쿠폰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꾸 카지노 쿠폰을 기웃거린다. 내가 다른 카지노 쿠폰에 자꾸 눈을 돌리는 이유는, 지금 가진 카지노 쿠폰들이 전부, 항상, 어느 구석인가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


프로이트는 꿈이 최근의 사소한 경험에서 받은 인상에서 비롯되지만, 그와 결합된 심리적 사건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고 말한다.


"꿈이 시시한 재료에 심리적 활동을 낭비한다는 주장도 반박해야 한다. 사실은 그 반대이다. 낮에 우리의 주의를 요구하는 것이 꿈-사고도 지배한다. 우리는 낮에 생각하는 계기가 된 재료를 위해 꿈꾸는 노력을 기울인다."


어느 순간 내게 잠시 떠올랐던 '카지노 쿠폰'이나 '시어머니'가 그냥 꿈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 스쳐간 재료들은 내 무의식 속 변함없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무언가를 건드린 것이고, 꿈은 그에 대해 사유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이다.


*


이 꿈을 꾸고 그에 대해 해석을 시도한 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나는 어느 좁은 카지노 쿠폰 매장 사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뱅뱅 돌면서 이 카지노 쿠폰 저 카지노 쿠폰을 탐색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가진 모든 카지노 쿠폰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에 대한 깨달음이 왔다.


프로이트의 말처럼 가방은 여성일 수도 있고, 융의 의견대로 여성성을 상징하는 원형일 수도 있다. 그 밖에 또 다른 무엇이든 간에, 나는 그동안 하나의 가방에게, 너무 많은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핸드백은 책 넣으라고 만든 물건이 아니고, 노트북용 백팩은 장 볼 때 쓰는 가방이 아니다. 큰 가방이라고 물건을 이것저것 담으면, 모양이 예쁘게 잡히지 않고 가방 속도 뒤죽박죽이 된다. 꿈속 가방이 모두 '검은' 것은, 아마 나 자신의 무리한 요구 탓이 아니겠는가.


내가 직접 (만능의) 카지노 쿠폰을 만들지 못할 바에는, 이미 있는 카지노 쿠폰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그에 걸맞는 사용처를 찾아주어야 되는 거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문득, 정말 신기하게도, 내 마음에 쏙 드는, 아주 '밝은' 빛의 카지노 쿠폰 하나가 내 눈앞에 뾰로롱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 카지노 쿠폰을 소중히 집어 들고 집에 가져와 보니, 이미 집에 있던 모든 카지노 쿠폰들도 죄다 소중해지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나는 카지노 쿠폰 가게 앞을, 무심히 지나쳐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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