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베, 최초의 민간 개인 전시회 개최
1848년 유럽은 가히 혁명의 해라고 일컬어진다. 직전 연말에 스위스 통일전쟁을 필두로, 그해1월 이탈리아 봉기, 3월 오스트리아 왕궁 습격과 독일 혁명, 영국 차티스트 운동이 발생카지노 쿠폰. 폴란드, 이탈리아, 보헤미아, 헝가리···, 많은 나라에서 반란이 일어나 어떤 것은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대개는 실패로 돌아갔다. (J. 네루의 ≪세계사 편력≫)2월 혁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프랑스에서는 2월 25일 제2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발로 인해 경쟁적으로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하지만 박리다매를 위해 노동자의 임금이 저당 잡혀 있었다.공화국정부는 지난 7월 왕정과 달리 바뀐 사회 구조를 정책에 반영카지노 쿠폰.국민의 노동권을 선언하고, 노동자의 단결권도 승인카지노 쿠폰. 하루 노동 시간을 파리는 10시간, 지방은 11시간으로 단축카지노 쿠폰. 노동 쟁의를 조정하고, 노조 결성을 도와주었다. 정치적인 자유도 확대되었다 출판의 자유, 노예제 폐지, 사형과 신체의 구속 및 체형이 폐지되었다.
그런데 평등권 강화 취지에서 실시된 보통선거가 정세를 뒤집어 놓았다. 21세 이상 모든 남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자,유권자 수가 1846년 선거 당시 24만 8천 명에서 일약 960만 명으로 늘어났다. (노명식의 ≪프랑스혁명에서 파리꼼뮨까지≫) 유권자의 대부분이 농민이었기에 파리보다는 지방의 투표 결과가 중요해졌다. 그런데 보수적인 농민들은 공화정을 곱게 보지 않았다. 4월 9일 선거 결과, 876석 중 700석 이상이 정치 신인이었으며 우익 약 150석, 좌익 약 100석을 제외한 600석 이상이 중도파에게 돌아갔다.
직선제 대통령 제도를 선택한 의회는 곧장 우측으로 질주카지노 쿠폰.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5월 15일 좌익 쿠데타가 실패카지노 쿠폰. 보수파는 임금과 복지를 비용으로만 생각카지노 쿠폰. 실업자를 위해 설치한 국영 작업장을 소동의 온상으로 취급, 폐쇄하면서 노동자를 입대 혹은 파리 시외 지방에 취업토록 카지노 쿠폰. 급기야 6월 폭동이 일어났고, 유혈전으로 발전카지노 쿠폰. 10만 명이 벌인 계급투쟁은 1만여 명이 체포되고 나서야 종료되었다.
이렇게 공화국의 성격이 퇴색할 즈음 또 다른 나폴레옹이 정치권의 중앙 무대에 등장했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1세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의 셋째 아들, 즉조카였다. 그간 과소 평가되던 루이는 추억이 되어 버린 나폴레옹 전설을 끄집어내어질서와 영광 그리고 번영을 약속하는 보나파르티슴을 창출했다. 놀랍게도 이것이 먹혀들었다. 12월 국민투표에서무려 74.3퍼센트, 543만 4,226표를 얻었다.유력한 후보 라마르틴과 카베냐크를 제치고4년 단임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 연임을 위한 헌법 개정이 좌절되자 아우스터리츠 전승과 황제 대관식 기념일이기도 한 1851년 12월 2일에 친위 쿠데타를 조직했다. 봉기를 가혹하게 진압한 후 개헌 찬반을 묻는 국민 투표를 통해 임기 10년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1852년 11월 20일 국민투표에서도 97퍼센트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어 제2 제정의 황제 카지노 쿠폰 3세로 즉위했다. 카지노 쿠폰 2세의 지위는 죽은 로마왕, 즉 카지노 쿠폰 1세와 오스트리아의 마리 루이즈 사이유일한 적자에게 양보했다.
카지노 쿠폰 집안 유전자를 익히 알고 있던 국민들은 결과를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새로운황제는 의회를 믿지 않았다.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의 의지를 직접 확인하면 그만이라고 생각카지노 쿠폰. 보통선거에 의해 구성하는 하원 의원 700여 명을 260명으로 대폭 줄였고, 회기도 1년에 석 달 이내로 제한카지노 쿠폰. 개헌권이 있는 상원은 전직 고관 중에서 황제가 임명하고, 임기는 종신이었다. 일인 독재의 권위적인 정부였고, 각종 자유가 유보되었다.
반면 사회 질서가 잡혀갔고, 기대를 넘어서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었다.알래스카와 캘리포니아에서 엄청난 금광이 발견되었고, 1860년에 영국과 자유 무역 조약에 힘입어 교역량이 세 배로 늘어났다.은행이 흡수한 저축이 경제 발전을 견인했다. 정부는 철도 업체의 융자금 이자를 지급 보장하면서 철도망은 조밀해졌고, ‘오스만 프로젝트(1853~69)’를 시행하여 파리의 면모를 일신했다. 집권 초 외교에서도 성공했다. 자신의 출현을 불안해하는 유럽을 안심시키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러시아와 대립하고 있던 영국과 함께 크림 전쟁(1853~56)에 참전하여 전승 국가가 되었다. 카지노 쿠폰 1세 이후 첫 쾌거였다.
정치·경제적으로 안정이 찾아오면서 예술이 꽃피기 시작했다. 19세기 예술가들은 주로 부르주아 계급에서 배출되었다. 이들이 만들어 낸 책과 그림의 고객 역시 대부분 부르주아였다. 그들은 이제 자신만의 예술을 갖게 되었다. (제이미 캄플린의 ≪예술가는 왜 책을 사랑하는가?≫) 프랑스 부르주아에는 귀족의 진입이 제한적이었다. 영국과 달리 귀족들이 ‘싸우는 자’의 역할 만을 고집한 채 경제 활동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차제 대혁명 이후 왕실과 귀족이 몰락하면서 제3 계급의 부르주아가 확장했다. 다양한 성장 배경을 지닌 이들이 기대하는 회화는 웅장한 서사의 역사화나 종교화뿐만이 아니었다. 하대 받던 풍속화(장르화), 풍경화, 정물화가 대접받기 시작했다. 또한회화가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장식적인 기능을 벗어나면서 화가들의 실험적인 도전이 아연 활기를 띠었다.
이 무렵 부상한 인물이 ‘최초의 모더니즘 운동’ 사실주의의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였다. ‘오늘’에 집중했던 그는 천사를 그리라는 주문에 “먼저 천사를 데려오라”라고 했던 인물이었다.그는 정제되고, 객관적이며, 현실적인 표현 방식을 택했다. 17세기 네덜란드 미술에서 사용되던 질감이 높고 검은색을 많이 쓰는 채색 방식과 유사했다. 앵그르의 이상적인 누드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펑퍼짐한 엉덩이에 주름살 잡힌 불룩한 배를 가진 중년 여성의 벌거벗은 뒷모습을 선보였다.<목욕하는 사람을 본 사람들은 경악했다. 카지노 쿠폰 3세가 ‘여체에 대한 모독’이라며 말채찍으로 캔버스를 후려쳤고, 왕후는 여인의 등이 ‘말 엉덩이 같다’고 비유하여 더 유명해졌다. 관능에도 솔직했던 화가는 반박했다.
“내 고향 오르낭의 여인들은 이렇게 생겼다.”
하지만 마땅한 교훈도 없고, 그렇다고 아우라가 있는 것도 아닌 평범함은 여전히 천박한 것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아니, 위험천만하게 여겨졌으며 정직함 그 자체가 혁명이 되던 시대였다.쿠르베는 부농의 아들이었음에도 예술가에게는 이웃의 고단한 삶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할 사회적 책임이 있다고 믿었다. <돌 깨는 사람들과 같은 시기에 완성한 <오르낭의 매장은 눈여겨볼 사람 없는 소시민의 죽음을 모티브로 삼았다.
고향 마을, 화가의 먼 친척 장례식에 친지와 이웃 50명 남짓이 모였다. 개도 보인다. 몇몇을 제외하곤 목사의 기도에 귀 기울이지 않는 이 무심한 의식을 가로 6.6m 대형 캔버스에 담았다. 당시에는 역사적인 인물에게나 어울릴 크기였다. 그림이 전시되자 관람객은 당황카지노 쿠폰. 살롱전의 고상한 관객에게 죽음이란 회피하고 싶은 두려움이었을지 모른다. 실제 한 비평가는 "오르낭에 묻힐까 봐 겁먹게 한다"라고 평카지노 쿠폰. 하지만 쿠르베는 죽음이 일상적인 통과의례라는 사실을 환기시켰다.
1855년, 카지노 쿠폰 3세가 정권 홍보를 위해 국제박람회를 유치했다. 500만 명이 관람했고, 그들은 프랑스의 산업 발전에 탄복했다. 이때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컸던 국제 미술전이 개최되었다. 28개국의 예술가들이 출품했다. 지난 20년간 살롱전을 외면했던 앵그르가 별관에서 40점이 넘는 유화와 소묘를 전시했고, 그의 적수 들라크루아는 35점의 유화로 중앙 홀을 차지했다. 미술사적으로는 '세계 최초의 개인전'이 열리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정부가 대외적 위상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과 <화가의 작업실 전시를 거부했다. 그는 분노했다. 박람회장이 마주 보이는 몽테뉴 거리 건너편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리얼리즘’이라는 간판을 걸고, 거절당한 작품을 포함 43점을 전시했다. 입장료를 박람회와 동일하게 1프랑을 받았으나 관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회화는 대중을 향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자유의지를 획득했다.
<화가의 작업실에서 쿠르베가 고향 풍경을 그리고 있다. 왼쪽에는 다음 세대를 이을 소년이 그림을 보고, 오른쪽에는 누드의 뮤즈를 배치했다. 자신도 모르게 동원된 작가의 주변 사람들은 책을 보거나 서로 껴안으며 그림에 집중하지 않는다. 비사실적이다. 그림의 부제 ‘현실적인 우의(寓意)-나의 7년 동안의 예술적 생산의 일면을 결정하는 내 아틀리에의 내부’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사실주의 회화라는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그림은 좌우 두 그룹으로 나뉜다. 오른쪽 '생명을 먹고사는 사람들'에는 비평가 샹플뢰리, 미술 애호가 부부, 시인이자 비평가 보들레르, 혁명가 프루동, 시인 뵈송, 수집가 브뤼아스 등 모두 쿠르베의 대의에 공감하는 사람들이다. 왼쪽 '죽음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무덤 파는 인부, 창녀, 어릿광대, 농민, 실업자 등 사회 밑바닥을 형성하는 무산계급이다. 여기에 카지노 쿠폰 3세가 포함되었다. 개와 함께 무릎 사이에 총을 든 밀렵꾼으로 등장했는데, 쿠르베는 그의 시선을 아래로 떨구게 했다. 이 작품의 전시 거부 이유가 짐작되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