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네의 <올랭피아, <풀밭 위의 점심식사, <막시밀리안의 처형
19세기 중엽의 프랑스 사회는 경제 성장에 힘입어 번영에 대한 자신감과 함께 정치적 냉소를 특징으로 했다. 그러나 이 시기만큼 비평가, 수필가, 역사가가 많이 배출된 활기찬 시대가 없었다. (앙드레 모루아의 ≪프랑스사≫) 특히 제2 제정기의 예술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대중적인 호소력을 지닌 소설가들과 감성적인 시인들이 방대한 양의 문학 작품을 저술했다. 날카로운 위트를 구사하는 사실주의자들이 등장하여 당시의 생활을 신랄하게 기록했다. 부유한 중산계급 사람들의 눈과 귀를 위해 많은 예술 작품이 창작되었으며, 극장은 빅토리앵 사르두와 알렉상드르 뒤마 2세의 연극,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를 비롯하여 각종 음악회 오페라, 발레를 즐기려는 관객들로 가득 찼다. (페터 파이스트의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이즈음 회화는 에두아르 마네가 이끌었다. 그는 인상주의자로 자처하지 않았고, 빛의 변화에도 큰 관심이 없었다. 고전적인 구도와 엄격성을 유지했으며, 인상주의 전시회를 외면한 채 살롱에만 출품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랬음에도 그는 인상주의 선구자로 불리는 데 무리가 없었다. 화단에 만연한 허상을 벗겨버리며, 주제와 표현 기법에서 과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널리 알려진 작품은 <올랭피아였다. 중간 색채를 없애 입체감을 무너트렸고, 여성 누드의 정형화된 틀을 완전히 뒤집었다. 여신이 아니라 실재 인물이었으며, 그것도 매춘부로 등장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지만 세간의 비난을 제일 먼저 자초한 작품은 2년 전에 선보인 <풀밭 위의 점심식사였다. 원래 이름은 <목욕으로, 루브르에 있는 티치아노의 <전원 음악회 구도와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을 창조적으로 패러디카지노 게임 사이트. <전원 음악회처럼 작품 속 네 명의 시선이 모두 다른 방향으로 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후경의 배와 슈미즈 차림으로 목욕하는 여인이 비례에 맞지 않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올랭피아의 모델 빅토린 뫼랑이 이 작품에서도 벌거벗은 채 고개를 돌려 관람객을 빤히 쳐다보았다. 당돌하게.
도덕과 미적 규범, 모두 거슬렀다. 그림 속 남성처럼 검은 프록코트와 보헤미안 모자를 쓴 사내들이 불쾌감을 느꼈다. "사회에서 버림받은 천한 여인이 두 부르주아 남자 사이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벗을 대로 벗은 채 건방지게 앉아 있다", "수치를 모르는 뻔뻔한 그림"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역사적 교훈이 없고, 원근감에 깊이가 없으며, 무례한’ 그림은 관람객으로부터 훼손당할 것을 우려하여 3미터나 더 높이 달아야만 했다.
그해 3,000여 명이 출품한 살롱 출품작 5,000여 점 가운데 이 그림을 포함하여 5분지 3이 떨어졌다. 전례가 없는 낙선 비율이었다. (존 리월드, ≪인상주의의 역사≫) 마네는 고전과 근대가 공존하는 ‘우아한 연회’로 포장했기에 이렇게 커다란 스캔들에 휩싸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는 귀스타브 도레와 함께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미술 담당 장관 알렉상드르 발렙스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론과 곧 닥칠 선거를 의식한 나폴레옹 3세가 나서서 심사위원들을 나무라며 ‘낙선전’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의 관심이 증폭되면서 마네가 신세대의 우상으로 떠올랐다. 황제에 의해 '새로운 미술'이 인정받는 형국이었다.
판사의 아들로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마네의 그림에는 특별한 메시지가 없다. 그럼, 소재와 작풍만 남는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다. 그는 원근법을 무너트리면서 회화가 평면적이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피리 부는 소년(1866)과 <발코니(1868~69)에서는 명암법을, <부채를 든 베르트 모리조(1872)에서는 색채를 실험했다. <폴리 베르제르의 바(1882)에서는 거울에 비친 종업원 수종의 뒷모습을 실제와 다른 방향에서 묘사했다. 이런 다시선(多視線)은 세잔에게 영향을 주었고, 입체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미셸 푸코는 이 작품을 “인상주의를 넘어서서 이후 20세기의 현대 회화를 가능케 했다”라고 평했다.
마네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기간 중에 개인 전시회를 열었다. 쿠르베에 이어 두 번째였다. 성공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동료 화가들의 의미 있는 움직임을 끌어냈다. 2,500프랑을 모았고, 매년 스튜디오를 임대하여 전시회를 열기로 했다. 살롱전과 별개의 민간 전시회 개최를 의미하며, 인상주의 첫 전시회의 동력으로 작용했다. 한편, 이때의 박람회에서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드 니티스가 프랑스의 선진 기술과 예술적 발전을 목도하고 파리에 둥지를 틀기로 결심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를 이끌었던 이탈리아 작가가파리를 새로운 문화 중심지로 인정했다고 볼 수 있다.
이즈음 마네가 정치적 색채를 담은 작품 한 점을 완성했다. <막시밀리안의 처형(1867~1868)이었다.1867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대공이 특별한 연고도 없는 먼 이국땅 멕시코에서 죽었다. 그곳 광산에 눈독을 들여 침공한 나폴레옹 3세의 황제 권유를 거절 못 해 자초한 일이었다. 막시밀리안은 토착민을 위한 나라를 건설코자 했다. 그러나 내전 중인 멕시코에서 그의 선의는 보수와 진보, 양쪽 세력으로부터 동시에 배척받았다. 프랑스 군이 발을 빼자, 고립된 그는 미국이 무기를 제공한 원주민 출신 후아레스의 공화파에 붙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흐르는 내 피가 이 나라의 행복으로 이어지기를!"이었다. (나카노 교코의 ≪명화로 읽는 합스부르크 역사≫)
신문 기사를 통해 비정한 사건을 접한 마네가 붓을 들었다. 구성은 고야의 <1808년 5월 3일에서 따왔다.막시밀리안에게 중앙이 높고 챙이 넓은 모자 솜브레로를 씌웠다. 그리고처형에 참여했던 멕시코 군인을 모두 프랑스 군인으로 대체했다.가장 상징적인 인물은 병사 뒤에서 삼색기 문양의 모자를 쓰고 기계적으로 총을 장전하는 하급 간부다. ‘투명한 무관심’을 보이는 그의 콧날과 수염이 나폴레옹 3세를 닮았다. 작품은 프랑스에서 전시되지 못했다. 황제가 자신에게 집중되는 대중의 시선을 두려워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어쨌든 집권 후반에 들어선 황제가 외교에서 한계성을 노출한 사건이었다.
정통성이 취약했던 제2 제정은 국민의 갈채를 의식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외교 실책을 연이어 범카지노 게임 사이트. 황제가 이상주의에 빠져 이탈리아 통일을 도왔다. 청년기에 이탈리아에서 독립당원과 함께 지냈던 그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힘을 합쳐 이탈리아 북부를점유했던 오스트리아를 몰아내려 카지노 게임 사이트. 당시 오스트리아는 비록 신성로마제국이 역사 뒤편으로사라졌어도 여전히 중부 유럽의 지배 세력이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을 이어 독일 연방 회의를 주재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여러 왕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1859년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은 마젠타와 솔페리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 승리했다. 그러나 양국은 곧바로 틈이 벌어졌다. 프랑스가 단독으로 오스트리아와 휴전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배신감을 느낀 신생 이탈리아 왕국으로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이 기회로 작용했다. 승전국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고베네토 지방(주도 베네치아)을 넘겨받았다. 그리고 1870년에 로마로 입성, 교황령을 병합함으로써 통일을 완수했다. 프랑스는 사보이와 니스를 얻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프랑스의 전통적인 외교 정책은 동부 국경의 안정을 위해서 독일을 분열시켜 그 힘을 약화,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졌을 때 나폴레옹 3세가 뒷짐을 졌다. 프랑스의 중립이 절실했던 비스마르크가 전쟁을 앞두고 황제를 찾아가서 한 설득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약간의 영토를 주겠다는 비스마르크에 속아 어떤 상황에서도 오스트리아와 동맹은 없을 것이라고약속했다. 더불어 프로이센을 믿지 못한 이탈리아를 설득하여 양국을 동맹으로 연결해 주었다. (르네 알브레히트-까리에의 ≪유럽 외교사≫) 결과적으로 그는 두 나라의 통일을 도운 셈이었다.
‘철과 피’를 통해 강력한 군사력을 비축한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와함께 양면전을 펼쳤다. 그리고7주 만에 오스트리아에 승리하면서 중부 유럽의 맹주로 떠올랐다. 비스마르크는 목표를 달성한 이상 필요 이상으로 오스트리아를 파괴하거나 굴욕감을 주지 않는 노련함을 보였다. 한편 라인란트 및 벨기에, 특히 벨기에 할양을 기대했던 프랑스의 속셈을 노출하여 오히려 영국의 적의를 유도했다. 영국은 100년 전쟁 당시부터 벨기에 지역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민감했다. 나폴레옹 3세는 국내외 언론으로부터 모욕을 받았으며, 새로운 두 통일 국가의 위협에 직면했다.
1870년, 의외의 사건이 보불 전쟁을 촉발했다. 그해 7월 3일, 프로이센 레오폴드 공이 이사벨라 2세와 결혼, 스페인 왕으로 즉위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프로이센이 스페인으로 세력을 확장한다면, 프랑스로서는 좌우 샌드위치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다행히 레오폴드 공이 프랑스의 철회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에 만족 못 한 프랑스가 빌헬름 1세에게 “앞으로도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왕족이 스페인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려 했다. 명백한 외교상 결례였다.
전쟁을 벼르던 비스마르크가 이 상황을 이용했다. 전보문을 이중으로 만들어 양국 신문에 공표했다. 프로이센 국민에게는 프랑스 공사가 약속을 받아내려 엠스에서 휴양 중인 빌헬름 1세에게 매우 무례했다고 사실대로 전했다.반면 프랑스에는 프로이센 왕이 오히려 공사에게 외교적 모욕을 주었다고 자극했다. 쉽게 흥분하는 프랑스 측이 먼저 폭발했다. 동맹국도 없고 전쟁 준비도 충분치 않았던 차제, 의회가 7월 19일에 선전 포고했다. 황제는 15일 만에 40만 병력을 국경에 집결시킬 수 있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이었다. 실제 동원된 병력은 25만 명뿐이었다.
개전이 되자 전황은 비스마르크의 예상대로 흘렀다. 전선에서는 프랑스의 패전 소식만 들려왔다. 몰트케가 지휘하는 프로이센 군은 장비, 작전, 훈련 등모든 면에서 우월했다. 9월 2일, 벨기에 국경 근처 스당에서 프랑스군 주력부대인 맥마흔 원수 휘하 전 부대원 10만 4천 명이 포로로 잡혔다. 나폴레옹 3세는 “아군은 항복했고, 나는 포로가 됐다”는 전문을 낭독해야만 했다. 아헨에 머무는 동안 황제는 주민들로부터 “카셀(연금 장소)로 꺼져라!”는 야유를 받았다. 일찍이 없었던 굴욕스러운 참패였다. 전쟁이 시작된 지 45일 만에 제2 제정은 무너졌다. (대문 그림:빌헬름 캄페우센의 <스당 패배 후 담화 중인 나폴레옹 3세와 비스마르크(1878))
제 탓입니다. 연재가 30회로 종료되는지 몰랐습니다. 망설였어요. 전부 해체하고 2부로 다시 편집할지를 두고요. 그러다가 글을 사랑해 준 분들의 흔적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다음 2회에 걸쳐 실린글은 부득이 브런치 북으로 함께 묶지 못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