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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인영 Mar 05. 2025

르누카지노 게임, 예술에도 의리가 필요할까?

카지노 게임오귀스트 르누카지노 게임(Auguste Renoir, 1841~1919),<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1878)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은 르누아르의 화가인생에 전환점을 가져온 그림이다. 전체적으로 인상주의적 특성을 양보하고, 후원자의 요구에 맞춰 고전주의 양식으로 캔버스(154x190센티미터)를 가득 채웠다.


‘일본 살롱’이라고 불리는 작은 거실이다. 배경에는 일본 그림, 식탁에는 동양 자기와 꽃, 바닥엔 고급 양탄자가 깔렸다. 안주인 샤르팡티에 부인의 취향과 함께 부를 가늠할 수 있다. 소파에 앉은 부인이 아이들 쪽으로오른팔을 쭉 뻗었다. 사랑이다. 쌍둥이처럼 차려입은 소녀들(실제 소파에 앉은 아이는 아들이다)의 시선 그리고아이가 타고 앉았는데도 순종적으로 엎드린 반려견에게서 집안의 화목한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런데 부인이 보르트제의 긴 검정 드레스를 입었다.빛과 색채의 변화를 모두 흡수하는 무채색이다. 평소의 르누카지노 게임라면, 허용하지 않았을 색이다.개까지 검은색이라 아이들 옷의 푸른색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작가의 장기인 순발력을 상실했다. 대신 화려하면서도 품위가 넘치고 가정의 행복감이 물씬 풍긴다.


시인, 소설가이고 미학에도 일가견이 있는 마르셀 푸르스트가 '우아한 가정의 시적 정취와 우리 시대의 세련된 복장'을 예민하게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50프랑이라도 감수하며) 무엇이든 그리는 화가가 일깨워낸 사랑과 아름다움”이라고 호평했다. 르누아르는 작품값으로 감사의 깊이만큼 후한 대접이라 할 수 있는 1,000프랑을 받았다.

그림은 이듬해 살롱에서 입선했고, 그것도 한가운데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인상주의 작품을 배격해 오던 심사위원의 태도로는 뜻밖의 관대함이었다. 모델의 남편, 조르주 샤르팡티에의 사회적 위신 덕분으로 추정된다. 마네에게 혹독했던 비평가 쥘-앙투안 카스타냐리조차 ‘기민하고 유능한 붓놀림’과 ‘살아있는 듯하고 행복한 우아, 매혹적인 색채’를 높이 평가했다. 이 역시 이례적이었다.


작품을 완성한 1878년은 인상주의 네 번째 전시회가 열렸던 해다. 소속 화가 간 갈등이 극에 달해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 그리고 임신 중인 베르트 모리조 등 많은 화가가 불참했다. 에드가 드가가 ‘인상주의자’라는 말을 빼자고 주장하여 ‘사실주의, 인상주의 재야 미술가 제4회 단체전”이라는 포스터가 붙었다. 비평가 폴 아르망 실베스트르는 이렇게 규정했다.


“여러분은 인상주의자들의 장례식과 하관식에 초대받았습니다.”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은 살롱전 출품을 거부했다. 후원금을 거둬 별도의 민간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 매우 궁핍해졌고, 후원자와 화상이 파산을 걱정해야 했다. 게다가 바르비종파 등 사실주의 화가들이 연이어 사망함으로써 그들의 생전 작품들이 시중에 쏟아져 나왔다.

반면 정부(제3공화국)가 만국박람회와 함께 개최한 살롱전이 활기를 띠었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살롱전에 참여하는 화가들이 속출했다. 르누아르도 살롱전에 매력적인 여인을 그린 <핫 초콜릿 잔으로 입선했다. 하지만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과 관련하여 그는순전히 상업적인 목적으로 그렸다고 자인했다. 일과성 작품이며, 인상주의자로서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선언이었다. (대문 그림: '19세기 전체에 걸쳐 가장 아름다운 그림'으로 언급되는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1876))


르누아르는 1876년에 샤르팡티에를 만났다. 그는 르누아르에게 자기 아내와 아이들의 초상화와 벽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했다. 그중 <샤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후 샤르팡티에는 화가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건물 전시장을 빌려주고, 파스텔 전도 홍보해 주었다. 다른 후원자를 소개했는데, 그중에는 외교관인 폴 베라르도 있었다. 몇 년 동안 ‘아방가르드 예술가’라는 이미지에서 탈피하면서 르누아르는 살롱전에서 환대받았다.

화가의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시간을 노르망디 베른발 근처의 와르주몽 저택에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1881년에는 작품 수입으로 처음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었다. 알제리, 베네치아를 거쳐 로마에서 고전주의 작품, 특히 라파엘로의 프레스코화를 보고 강한 영감을 받았다. 1888년에 이르자, 고전주의를 바탕으로 색채의 리듬감을 경쾌한 장식적 효과를 만들어낸 후기 양식은 완성했다.


르누아르는 양복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3세부터 도자기 공장에서 그림 입히는 일을 해야 했다. 가난했음에도 명랑했고, 겸손했으나 엄숙한 이론에 무관심했다. 노동자의 그늘진 삶보다는 중상류층의 향락적인 소재와 여성 누드를 많이 다루었다. 한마디로 가벼웠다.

사실 그는 인상주의 이전에 드로잉을 중시하는 고전주의 회화를 즐겨 그렸다. 친구 클로드 모네가 적극적으로 함께 작업을 권유함으로써 이끌리듯 인상주의 작풍을 받아들였다. 따라서 양식 전환과 관련 르누카지노 게임 본인은 크게 개의치 않는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룹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그의 변심이 인상주의 해체에 부분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었다.


한편 궁핍했던 인상주의 화가들도 1894년 이후 그림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바꿔 말하면, 화단의 주류에 편입되었다는 의미다. 덕분에 후진들은 공동체의 유용성을 깨달았다. 그들이 의기투합하면서 표현, 상징, 입체, 야수주의 등으로 새로운 그룹을 형성했다.

그들 중에는 중도에 새로운 실험을 하며 양식을 바꾼 화가들이 부지기수였다. 야수주의는 자체가 과도기적 양식이었으며,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고집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에드가 드가 등 일부를 제외하곤 르누아르의 변신을 일러 ‘변절’이라며 크게 비난하지 않았다.


하지만 "살만 해지자, 죽는다"는 말이 있다. 쉰다섯 살 르누아르에게 화가로선 치명적인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찾아왔다. 예순여섯 살이 되자, 몸무게가 47킬로그램으로 빠졌다. 두 손에 붕대를 감지 않으면 비틀린 뼈가 살을 파고들었고, 전신이 마비되는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고통이 잠시 멈출 때 붕대 감은 손에 붓을 끼워 작업했다. 일흔여덟 살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예술의 불멸성에 대해 확신이 선 듯했다. 어느 날 르누카지노 게임는 자신의 굽은 손을 지켜보는 화상 볼라르에게 말했다.


“여보게, 그림 그리는 데 손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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