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인이 나이 든 남자에게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러나 남자는 주춤거린다. 뒤에 남은 젊은 여인이 무릎 꿇고 두 손을 내밀며애처로운 시선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는애써외면하려고 슬그머니 그녀의 손을 뿌리치자,두 사람 사이에공간이 발생한다. 회복하기 어려운 거리감이다.
오귀스트 로댕(François-Auguste-René Rodin, 1840~1917)의 제자 카미유 클로델의 <성숙의 시대이다. 그녀 자신과 로댕 그리고 그의 동거녀 로즈 뵈레의 삼각관계를 형상화했다. 시인이자 외교관이던 그녀의 남동생 폴 클로델이 청동상을 보며 이렇게 한탄했다.
“나의 누나 카미유가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고 간청하고 있다. 그 멋지고 오만한 여인이···.”
카미유는 북프랑스 엔의 페레앙타르드누아에서 등기소장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타고난 재능을 인정해 준 알프레드 부셰(로코코 시대 프랑수아 부셰가 아니다)로부터 조각의 기초를 배웠다. 1883년, 이탈리아로 떠나게 된 알프레드의 배려로 열아홉 살 그녀는 마흔세 살 로댕의 보조 조각공이 되었다.
카미유는 아름답고 헌신적이었다. 로댕에게 사랑과 함께 독창적인 아이디어로예술적 영감을 선물했다. 로댕의 <다나이드(1889)와 <키스(1901~1904) 구석구석엔 그녀와 나누었던 격정적인 사랑의 흔적이 묻어난다.
로댕은 인체의 근육과 피부가 감정이 있다고 믿는 조각계의 거장이었다. 그는 로즈와 사이에서 아들 오귀스트를 낳고, 20여 년간 사실혼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카미유는 이 작품에서 그녀를 악마처럼 묘사했지만, 로즈 뵈레 역시 비련의 여주인공이긴 마찬가지였다.
순종적인 로즈는 남편의 여성 편력으로 고통받았다. 특히 예술적 동반자 역할까지 했던 카미유로부터 받은 상실감은 더욱 컸을 것이다. 훗날 로즈는 로댕을 만난 지 53년 만에야정식 결혼했다. 뇌졸중에서 깨어난 로댕이 뒤늦게 작심한 결혼이었다. 하지만안타깝게도 그녀는 2주 후 급성 폐렴으로 사망했다.
카미유는 당시 “로즈와 헤어지고, 자신과 결혼하겠다”는 로댕의 말을 믿고 결혼을 몰아붙였다. 로댕은 일단 그러마 했다. 하지만 차마 로즈를 버릴 수 없어 머뭇거렸고, 이후 카미유를 ‘들판에 핀 작은 꽃’처럼 무심하게 대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그녀는 작품 활동에서라도 독립하고 싶었다.
그녀의 <사쿤탈라(1888, 대문 사진)가 예술인 살롱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때부터 작업과 관련하여 두 사람 사이에 논쟁이 생기고 틈이 벌어졌다. 로댕은 그녀를 독립적인 예술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화가 치민 그녀는 아틀리에를 옮기고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세상은 여성 조각가를 가벼이 여겼다. ‘로댕 없이는 아무것도 못 하는 작가’라는 비난이 그녀를 괴롭혔다. 아이를 지운 카미유가 1893년에 로댕과 완전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갈등은 예술에 국한되었다. 개인적인 서신 교환과 간헐적인 왕래가 유지되었다. <성숙의 시대가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 로댕은 수치심을 느끼고작품 발표를 막으려 했다. 그러자 카미유는 로댕이 자신의 작품을 빼앗으러 올 것 같다는 망상에 사로잡혔다.
사실 둘 사이가 사제간이라고 하지만, 로댕이 일방적으로 그녀를 지도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해부학에 정통했고, 직접 조각하는 작업 스타일을 선호했다. 로댕이 꺼렸던 그의 대리석 작품에서 지극히 여성적인 매력이 발견되는 이유를 카미유에게서 찾기도 한다.
1899년, 살롱 전시회에 출품한 그녀의 대리석 작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카미유는 "로댕이 훔쳐 갔다"라는 음모론을 퍼뜨렸고, 두 사람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그간 로댕의 그늘에서 혜택을 받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누드모델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인체를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 로댕의 경제적 배려가 으뜸이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 지위 향상이 대체로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여성에게 자유, 특히 정신적 자유가 없는 것은 자신의 수입을 직접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통찰력 있는 지적이다. 현대 여성 미술가 중에서는 남편 스티글리츠의 명망을 극복해야 했던조지아 오키프의 처지가 카미유와 비슷했다.
이제 15년간 쳐졌던 로댕의 보호막이 걷혔다. 예술가로서 그녀의 평가는 여전히 긍정적이었다. 브뤼셀 <자유 미술전에 초대받았고, 1905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작곡가 크로드 아실 드뷔시와 사귀기도 했다. 그때의 작품이 <왈츠(1905)로, 매우 역동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충격적인 실패를 경험하자 그녀는 곧바로 좌절했다.
땔감 없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려 와인을 마셨고,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졌다. 피해망상도 눈덩이처럼 커졌다. 1913년 자신을 지지해 주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증세가 심해지면서 '편집증적 정신 착란'으로 진단받았다.
이듬해 카미유는 남프랑스 몽드베르그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남동생 폴만 열두 번 면회했다. 이후 30년간 작품 활동을 못 하고 유폐에 가까운 생활을 하다가 일흔아홉 살인 1934년에 생을 마감했다. 장례식에는 가족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그녀의 작품이 재조명받았다. 1984년에는 폴의 손녀인 전기작가 레느 마리 파리스에 의해 ≪카미유 클로델 1864~1943≫이 출간되었다.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그해 회고전이 열렸다. 1988년과 2013년에는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이 각각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로댕은 죽기 한 해 전인 1916년, 아틀리에가 국립미술관으로 바뀔 때 별도의 방 하나에 클로델의 작품을 전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정부 사정으로 여의치 못했다. 총 7,000여 점을 소장한 로댕 미술관의본관 1, 2층에는 지금 카미유의 작품 일부가 전시되고 있다.
그녀의 대중적 인기로 인해 미술관은 오히려 인파가 몰리고 생동감을 되찾았다. 이승이나 저승에서나 그녀가 로댕의 영원한 뮤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결과이다. ‘전쟁 같은 사랑’을 경험한 카미유로서는 적어도 예술가로서 지위를 되찾았다. 절반의 성공이다. 로댕이 카미유에 대해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나는 황금을 찾으려다가 그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녀가 바로 그 황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