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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y 08. 2025

14. 박물관 클라스, 웅진 온라인 카지노 게임 63년, 온라인 카지노 게임(公州)

당일형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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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당 중의 명당, 영산(靈山) 계룡산


계룡산(鷄龍山)은 충청남도 온라인 카지노 게임, 계룡, 논산시와 대전광역시에 걸쳐 있는 산이다. 산의 이름은 주봉인 천황봉에서 연천봉·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벼슬을 쓴 용의 모양과 닮았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한다. 이 계룡산은 예로부터 풍수지리학적으로도 4대 명산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흔히 이이야 하기를 “계룡산에 도 닦으러 간다”는 말이 있듯이 계룡산은 영험하고 좋은 기운이 가득한 산으로 알려져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계룡산을 토함산, 지리산, 태백산과 함께 오악 중의 하나로 꼽으면서 계룡산은 하늘을 향하는 용의 모양이고 하늘의 이치를 가진 신비의 땅으로 언젠가는 이곳이 수도가 되어 천하 36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시대가 도래한다고 묘사하고 있다.


또한 신라말기 도선대사는 그의 저서 도선비기에서 개성은 5백 년 도읍지이고 한양은 4백 년 도읍지이며 계룡산의 신도안은 8백 년의 도읍지라고 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였던 예언서인 정감록에는 정도령이 나타나서 8백 년 동안 계룡을 도읍을 삼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계룡산은 조선 초기 도읍 선정에도 크게 작용하였다. 태조가 처음 도읍지로 낙점했던 돗은 계룡산 자락인데 이는 권문세족들이 밀집한 고려의 도읍지 개성을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새로운 도읍지에서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를 원했다. 그 결과 계룡산이 길지라는 결론을 내리고 궁궐 축조 공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개국공신 정도전과 경기도 관찰사 하륜의 반대로 공사를 중단하게 되고, 이후 새로운 도읍지 선정을 무학대사에게 맡겨 선택한 곳이 한양이었다. 무학대사의 선정에 의해 한양 인왕산 아래 궁궐을 짓게 되는데 당시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는 정도전은 사사건건 무학대사의 진언에 제동을 걸고 나섰는데 그도 그럴 것이 무학대사는 당시 불교를 대표하는 인물로 왕사였으며 정도전은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펴고자 하였기 때문에 무학대사의 참견은 걸림돌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정도전의 저서 중 불씨잡변(佛氏雜辨)이 있는데 이는 당시 유학자들이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 중에서도 가장 비판의 수위가 높은 책이다. 제목 자체도 그대로 해석하면 '부처씨의 주장에 대한 여러 변박'이다.


무학대사는 풍수지리적인 면을 들어 궁궐의 방향에 대하여 태조에게 진언하기를 "인왕산을 한양의 진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정도전이 바로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전하, 그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동쪽을 향하고서 정무를 보는 일은 안 됩니다. 남쪽으로 향해야지요."라고 말했다. 당시 실세였던 정도전이 그렇게 말하자 무학대사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무학은 당시 혼잣말로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200년이 지나 반드시 화가 있을 것온라인 카지노 게임'라고 예언했다. 무학대사의 예언대로 경복궁은 1553년(명종), 1592년(임진왜란)에 잇따라 화마에 불타고 말았다. 그러다가 300여 년이 지나서야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중건되어 현재의 경복궁의 모습을 찾게 된다.


이처럼 계룡산은 천년 넘게 지내온 세월 동안 도읍지 후보 1, 2위를 다투는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계룡산에는 많은 사찰들이 생겨났는데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사찰이 동학사, 갑사, 신원사인데 이 세 사찰을 가리켜 계룡산 3대 사찰이라고 부른다. 이번 여행은 계룡이라는 천하제일 명당이 품고 있는 이야기와 문화재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계룡산 최고의 명당, 신원사

신원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 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이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의자왕 11년(651년) 고구려의 승려였던 보덕화상이 창건하였는데 고구려 승려가 온라인 카지노 게임지역에 와서 사찰을 창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

당시 고구려 보장왕 집권 시기 실권자인 연개소문은 643년 3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나라에는 유교와 불교는 번성하나 도교가 없다."


그리고는 보장왕에게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에 도교를 전파해 줄 것을 요구하도록 했다. 당나라 조정은 이에 응하여 고구려에 숙달 등을 비롯한 8명의 도사를 파견하여 노자가 지었다는 『도덕경』 을 전해주도록 했다. 연개소문 역시 이에 화답하여 도사들을 절과 객관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이에 보덕화상은 도교가 불교에 맞서게 되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해 왕에게 진언하였지만 왕은 그 청을 듣지 않았다. 이에 낙심함 보덕화상은 하룻밤사이에 암자를 옮기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온라인 카지노 게임로 망명하게 된다. 고구려 내에서의 불교개혁과 계율강화를 통한 국가 부흥을 꿈꾸었던 보덕화상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땅에 신원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신원사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마곡사, 갑사, 동학사에 비해서 규모도 작고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보유하고 있는 문화유산과 그 역사 속의 모습을 보면 결코 어느 절보다도 그 존재감이 작다고 할 수 없다. 먼저 국보 제299호인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이라는 민족의 걸작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악단(보물 제1293호), 오층석탑(충남유형문화재 제31호), 대웅전(충남유형문화재 제80호) 등 의미 있고 굵직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사찰이다.

신원사는 마치 잘 가꾸어 놓은 정원같이 아담하면서 다른 절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봄에 피는 벚꽃, 철쭉, 백일홍과 가을의 화려한 단풍, 겨울의 하얀 설경으로 사계절 아름다운 절이다.


신원사를 둘러볼 때는 세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천진와불, 노사나전, 중악단이다.


신원사 천진와불은 대웅전으로 가다 보면 와불을 볼 수 있는 자리를 표시해 놓았다. 범종각 앞으로 ‘와불 접견하는 곳’이라는 표지판을 세워두어 그 자리에 서면 저 멀리 산속에 누워계신 부처님을 친견할 수 있게 해 놓았다. 그 부처님은 사계절 모두 다른 색깔로 불자들과 답사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와불을 친견하고 나면 대웅전 앞에 석가여래 진신사리탑이 안정적인 구조로 그림처럼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워진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고 진신사리 역시 미얀마, 태국에서 보내준 것을 봉안하고 있다. 탑의 위치나 크기도 그렇고 주변 건물과의 배치를 통해 신원사의 중심을 잡아주고 전체적인 안정감을 주는 탑이다.

대웅전 왼쪽으로는 비교적 최근에 지은 건물이 보이는데 바로 국보 신원사 노사나불 괘불탱을 보관하고 있는 노사나전이다. 조선 인조 22년(1644년) 제작된 노사나불 괘불은 화엄종의 주불인 비로자나불을 대신하여 노사나불이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을 그린 괘불로 조선 후기 불화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괘불을 보관하고 있는 노사나전 건물 왼편에는 혹시나 일어날 수 있는 화재에 대비해 괘불을 바로 빼낼 수 있도록 레일을 설치해 놓았는데 국보관리에 얼마나 세심하고 철저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노사나전을 나와 대웅전과 천수관음전을 지나면 중악단을 만나게 된다.

중악단은 국가에서 계룡산 산신에게 제사 지내기 위해 마련한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계룡산은 예로부터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져 왔으며 신라 때 5악의 하나로 제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3년(1394년)에 처음 제사를 지냈다고 전하며 효종 2년(1651년)에 유생들의 상소에 의해 제단이 폐지되었다. 그 후 고종 16년(1879)에 명성황후의 명으로 다시 짓고 중악단이라 하였다.


이 중악단은 왕실건물의 형태로 지어졌는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건물치고는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다. 여느 사찰의 산신각은 건물 하나로 되어 있지만 중악단은 대문을 거쳐 중문을 거쳐 들어가야만 중악단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궁궐 건축의 형식을 따랐는데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잡상이다. 이 잡상은 왕과 관련된 건물 즉 궁궐이나 왕릉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장식인데 여기 중악단에 사용된 이유는 바로 왕실 사람들이 이용한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궁궐 건물과 마찬가지로 중악단을 중심으로 담장을 둘렀다.

3. 궁궐 건축의 꽃, 잡상(어처구니)

사람을 시작으로 동물 형상의 토우를 일렬로 세워 놓은 잡상은 일종의 장식 기와로 건물의 위엄을 더하고 화재나 액을 막아 준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잡상은 아무나 지붕에나 올려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귀하신 토우들이기에 잡상은 궁궐과 궁궐에 관련 있는 건물에만 올릴 수 있으며 능도 왕과 왕비가 주무시는 곳이니 정자각에 잡상이 올라간다. 흥국사 대웅보전이나 계룡산 신원사의 중악단처럼 사찰에서도 볼 수 있지만 이는 왕실 제사 등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잡상은 송나라에서 전해졌다고 하며 임진왜란 이후 조선 궁궐 건축물에 유행했다.


잡상의 수는 항상 홀수가 되도록 하는데 짝수는 음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귀신이 범접하기가 쉬우며 쉽게 재앙이 따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황제의 궁에 11개를 올리고 세자궁은 9개 하는 식으로 지위에 따라 숫자가 정해진다. 우리나라는 경복궁 경회루에 11개로 가장 많은 잡상이 올라가 있다.

잡상의 다른 명칭은 '어처구니'인데 목수가 건물을 완성하고 마지막으로 올려놓는 어처구니를 깜빡 잊고 올려놓지 않아서 유래된 말이라 한다. 기껏 힘들게 잘 지어놓고 어처구니를 올리지 않아 미완성이 되니 작은 일을 마무리하지 않아 어이가 없다는 의미이다.

4. 갑 중의 갑, 갑사(甲寺)

갑사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 구이신왕 원년(420년)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위덕왕 3년(556년)에 혜명대사에 의해 크게 확장되었다. 그 후 신라 헌완왕 3년(859년)에 의상대사가 중수하여 화엄종 10대 사찰의 하나로 번영하였다. 갑사에는 국보 1점과 보물 5점을 포함한 각 종 문화재의 보고이며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승병들이 모여 작전을 세우기도 한 호국불교의 도량이다.


그리고 흔히들 ‘춘마곡 추갑사’라는 말로 봄철 마곡사의 아름다움과 가을철 갑사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지만 갑사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아름다운 장소이다. 주차장에서 갑사로 들어가는 숲 속길의 150년 이상 된 고목들이 사계절 모두 다른 색깔로 다른 향기로 다른 이야기로 우리를 맞아주기 때문이다.

지난번 『서산』 편, 3장에서 알아보았듯이 사찰의 구조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일주문을 지나 고즈넉한 숲길을 지나면 사천왕문이 나오고 되는데 이번 갑사 기행에서는 갑사 철당간을 제일 먼저 볼 것이기 때문에 입구에서 자연관찰로 올라갈 것이다.


사찰 답사를 하다 보면 당간지주는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 당간지주는 쉽게 말하면 깃대를 고정해 주는 역할을 하는 고정대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석재로 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당간지주 사이에서 깃대 역할을 해주는 당간은 대부분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이 없으나 철제로 만들어진 당간은 현재까지도 3개가 전해지고 있다. 그 하나가 바로 여기 갑사의 철당간이며 다른 두 곳은 청주 용두사지와 안성 칠장사이다. 갑사 철당간 앞에 서면 당시 갑사의 규모가 얼만큼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어서 절 방향으로 이동하면 온라인 카지노 게임 갑사 승탑과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다포식 건물인 대적전을 볼 수 있다. 보통 사찰의 건물 중 "적"이나 "광"이 들어가면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데 이 건물에서는 예외적으로 아미타불과 양쪽의 협시보살인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모신 것을 볼 수 있다. 갑사는 통일신라 시대 화엄종 10대 사찰 중의 하나로 크게 번성하였는데 당시 절의 중심인 대웅전이 바로 여기 대적전 자리에 있었는데 주위에 남아 있는 주춧돌이 그 옛 대웅전의 흔적이다. 갑사는 억불정책을 펼쳤던 조선시대에도 잘 유지되었지만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에게 약탈당하고 불타버렸다. 그 후 병자호란과 화재를 몇 번 겪으면서 가람배치에 변화가 생기면서 원래의 대웅전 자리에 대적전이 들어섰다고 한다.

대적전을 뒤로하고 대웅전 쪽으로 가다 보면 자그마한 탑을 만날 수 있는데 갑사의 창건 혹은 중창과 관련된 설화를 지니고 있는 공우탑(功牛塔)이다. 은혜 갚은 소라는 이름으로 공우탑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정유재란 때 조선을 침입한 왜구들은 많은 절에 불을 지르고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노략질해 갔다. 왜구의 불길은 계룡산의 천년고찰 갑사에까지 이어졌는데 당시 천 여 칸의 화엄대찰이 일시에 잿더미가 되었다. 왜란이 모두 평정된 후 뿔뿔이 흩어졌던 스님들은 폐허가 된 절을 찾아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여보게, 학인들이 이렇게 찾아드니 아무래도 중창불사를 해야 할 것 같네."

"시중 살림도 살림이지만 마을 신도들도 난리에 시달려 모두 생활이 어려운데 가능할까요?"

왜란을 피해 피난을 가지 않고 절을 지킨 인호, 경순, 성안, 병윤 네 스님은 갑사를 다시 중창하여 지난날처럼 스님들이 공부할 수 있는 도량을 이루기로 결심하고 탁발을 나섰다. 어느 날 해질 무렵 동쪽으로 길을 떠난 인호스님은 어디선가 절박한 듯 울어대는 소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스님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는데 고삐가 소나무에 칭칭 감긴 어미소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고 옆에는 송아리 한 마리가 어미소의 아픔을 안타까워하는 듯음메~”거리며 소나무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스님은 소의 고삐를 잘라서 소를 구해주었다.

"자 이제 시원하지? 어서 가서 마음 놓고 풀을 뜯어먹어라."

법당이 완성되는 데는 쉽지가 않았다. 법당을 완성하려면 돈이 더 필요한데 계획한 공사금이 예산보다 훨씬 부족했다. 스님들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인호스님은 소 한 마리가 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인부들이 못 들어오게 막았으나 소는 막무가내로 들어와 인호스님 앞에 멈추었다.

"스님,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스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이렇게 왔습니다.법당 건립 불사를 제가 도와드릴 것입니다."

인호스님은 꿈에서 깨어 문 밖에 나가보니 꿈에 본 소가 기다렸다는 듯이 문 밖에 서 있었다. 소는 스님을 바라보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는 3일 후 서까래, 기와등을 한 마차씩 싣고 왔다. 소의 도움으로 대웅전 불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마지막 법당 마루 공사를 앞두고 스님들은 또 걱정이 생겼다.

"마루는 단단한 향나무가 좋은데"

"향나무 구하기도 어렵거니와 번번이 소에게 신세를 질 수 없으니 이번에는 우리들이 직접 구하러 가보세'

예로부터 울릉도 향나무와 백두산 향나무가 유명하다는 말을 들은 스님들은 백두산과 울릉도로 떠났다. 그러나 향나무를 구하긴 했으나 운반할 일이 걱정이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미풍이 불더니 그 바람을 타고 온 듯 갑자기 소가 나타났다. 소는 그 무거운 나무를 지고도 끄떡없이 훌쩍 가버렸다. 무쇠 같던 소도 여러 차례 백두산과 울릉도를 오가니 지졌는지 입가에 흰 거움이 일기 시작했다. 스님들이 먹이를 주었으나 소는 먹지도 않고 쉴 새 없이 울릉도 향나무를 계룡산 불사의 현장까지 계속해서 운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필요한 만큼의 향나무가 완성되자 법당 마루가 완공되었다. 그러나 향나무 운반을 마친 우 지쳐 쓰러진 소는 도통 일어나지를 못하였다. 법당의 불사가 모두 완성되는 날 스님들은 고마움을 표시하러 소에게 갔으나 소는 큰 눈을 껌벅이며 스님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스르르 눈을 감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스님들은 고마움과 미안함에 눈물을 흘리며 소의 무덤을 잘 만들어준 수 극락왕생을 빌었다.


"아무래도 소는 우리 절과 전생부터 깊은 인연이 있었던 것 같네, 그 소가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법당을 세울 수 있었겠는가? 후세에까지 소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탑을 세워주세."


스님들은 절 입구에 소의 공을 칭송하는 3층탑을 세우고 『공우탑』이라고 명하였다.


공우탑을 지나 지장전과 적묵당 사이로 올라가면 대웅전이 나온다. 갑사 대웅전은 2021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인 맞배지붕의 다포식 건물이다. 건물 안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중앙에 봉안하고 우측에 아미타불, 좌측에 약사불을 봉안하여 삼세불의 봉안형식을 취하고 있다. 협시불(脇侍佛)로는 문수보살, 보현보살,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의 4대 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또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모니불과 노사나불의 삼신불이 진리를 설법하고 있는 장면을 그린 삼신불 괘불탱(국보 제298호)도 대웅전 불상 뒤편에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의 동쪽으로 이동하면 월인석보 목판을 보관하고 있는 월인석보 보장각이 있다. 월인석보 목판은 『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판각으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판목온라인 카지노 게임. 『월인석보』는 석가모니의 생애를 다룬 일종의 불경으로 세종대왕이 지은 《월인천강지곡》과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증보하여 간행한 책온라인 카지노 게임. 훈민정음 창제 이후 최초로 나온 한글 불교 경전이며 국내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이 직접 저술한 불경으로 조선 초기 불교문화의 정수로 꼽힌다.


그 편찬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 세조는 스스로 호불(好佛)의 군주라고 선언할 정도로 왕자 시절부터 불교를 크게 숭상하였다. 이 때문에 세종 28년(1446년)에 소헌왕후가 사망하자 어머니에게 정성 어린 효도를 다 하던 세조는 크게 슬퍼하며 죽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스스로 불교 서적을 공부한 후 한국어로 석보상절을 지어 바친다. 이후 세종 29년(1447년) 세종이 둘째 아들인 세조가 지은 석보상절을 읽어본 후 크게 감동하여 석보상절에 대한 찬가인 월인천강지곡을 짓는다. 이후 세조가 즉위 후 다시 월인천강지곡과 석보상절의 내용을 합한 후 증보하여 월인석보를 편찬하게 된다. 겉으로는 죽은 부모와 일찍 죽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 죽이고 왕위에 올라 사육신 등 많은 신하를 죽인 끝에 세조가 얻은 정신적인 고통, 회한과 두려움의 깊은 수렁에서 벗어나 죄를 씻고 구원을 얻기 위하여 추진된 것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대웅전의 서쪽 편에는 표충원이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 표충원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조직하여 활약한 영규대사, 서산대사, 사명대사의 열정을 모신 사당이다. 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는 평양을 찾는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고 온라인 카지노 게임 출신의 영규대사는 최초의 승병장으로 갑사에서 수백 명을 모아 참전하였다. 영규대사의 활동은 전국 각지에서 승병이 일어나는 도화선이 되었다. 영규대사는 승병 활동 중 전사하였는데 현재 대사의 묘는 계룡면에 위치하고 있다. 승려로써 생을 마감하였으니 불교의 윤회사상에 따라 묘를 만들지 않고 화장을 하여야 하는데 이렇게 묘가 만들어진 것을 보면 유교사회였던 조선에서 대사에게 장군으로써의 예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표충원에서는 조선 후기 충청 감사 이형원의 주도로 자금을 모아 순조 원년에 제사를 올리게 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철폐되었다가 고종 31년(1894년)에 복원되었다.


갑사에는 국보 1점과 보물 5점을 포함한 각 종 문화재의 보고이며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승병들이 모여 작전을 세우기도 한 호국불교의 도량이다.


8. 박물관 클라스, 국립온라인 카지노 게임박물관

대부분의 대도시가 큰 강을 끼고 성장한 역사를 가졌는데 충청남도 중동부에 위치한 온라인 카지노 게임 역시 금강을 끼고 성장한 도시다. 금강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고구려에 쫓겨 서울을 한성에서 웅진으로 천도할 때도 좋은 방어선이 되기도 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옛 지명인 웅진(雄鎭)은 순수 한글로는 곰나루로 이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연미산 큰 굴에 몸집이 커다란 암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나무하러 온 사내에게 한눈에 반한 암곰은 사내를 납치하여 굴에 가두고 함께 살았다. 어느덧 곰과 사내 사이에 두 마리 곰이 태어났고 곰은 점점 사내를 믿게 되면서 사냥을 가면서도 동굴 입구를 열어두고 나갔다. 하지만 인간세계가 그리웠던 사내는 그 틈을 타서 동굴을 탈출해 나루터로 나가 배로 강을 건넜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곰은 돌아오라 애원하며 울부짖었지만 사내는 외면하고 강 건너로 사라져 버렸다. 상심한 곰은 새끼와 함께 강물에 몸을 던졌다.


곰과 나무꾼의 러브스토리처럼 온라인 카지노 게임는 예로부터 곰과 인연이 깊은 도시로 인식되어 삼국시대에는 웅진, 통일신라 시대에는 웅진주와 웅주를 거쳐 고려 태조 23년 온라인 카지노 게임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公州)는 곰과 비슷한 한자를 차용해서 쓴 것으로 당시에는 ‘곰주’라고 읽혔다고 한다. 고려 성종 2년인 983년 지방 제도 정비과정에서 광주, 충주, 청주, 양주, 승주, 전주, 나주, 진주, 상주, 황주, 해주와 함께 12목에 포함되어 번영을 이어갔다.


다시 삼국시대로 넘어가서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으로 위례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함에 따라 그 아들인 문주왕은 475년 도읍을 위례성에서 웅진으로 옮기게 된다. 그 후 63년간 웅진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두 번째 수도였다. 그 후 583년 성왕은 사비(부여)로 다시 천도하게 된다.


웅진 온라인 카지노 게임 시절의 온라인 카지노 게임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은 무령왕릉이다. 온라인 카지노 게임 25대 임금 무령왕의 무덤이다. 이 무령왕릉은 온라인 카지노 게임 무덤 중 유일하게 주인이 확인된 왕릉이자 도굴되지 않고 고스란히 발굴된 유적이다.


왕릉에서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장신구들을 비롯해 무덤의 주인과 건설 경위가 담긴 묘비석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다. 이 석판을 통해 무덤이 무령왕과 왕비의 것이라는 것과 왕과 왕비를 2년 3개월 동안 가매장한 후에 정식 왕릉으로 옮기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의 매장 풍습, 땅과 지하의 신들에게서 '토지를 사서' 무덤을 쓰는 개념 등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일반인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무령왕이 지금과 같이 유명해진 결정적인 이유가 무령왕릉이 미발굴 고분으로 온라인 카지노 게임 조성 당시 그대로 발견되었던 덕분이다. 도굴이 어려운 구조인 신라왕릉과 달리 온라인 카지노 게임 왕릉은 출입구가 따로 존재하고 돌무지에 깔려있지도 않은 굴식 돌방무덤이나 벽돌무덤 양식이었기에 온라인 카지노 게임가 멸망한 이후에는 도굴도 매우 쉬웠다. 따라서 무령왕릉처럼 도굴을 피해 거의 온전하게 남아 있는 건 매우 고마운 기적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들 가운데 12점이 국보로 지정되었는데 그 목록은 다음과 같으며 국립온라인 카지노 게임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국보 제154호 무령왕 금제 관식

국보 제155호 무령왕비 금제 관식

국보 제156호 무령왕 금귀걸이

국보 제157호 무령왕비 금귀걸이

국보 제158호 무령왕비 금목걸이

국보 제159호 무령왕 금제 뒤꽂이

국보 제160호 무령왕비 은팔찌

국보 제161호 무령왕릉 청동거울 일괄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

국보 제163호 무령왕릉 묘지석

국보 제164호 무령왕비 베개

국보 제165호 무령왕 발받침


여기에 국보 108호인 계유명삼존천불비상과 국보 247호 온라인 카지노 게임 의당 금동 보살 입상까지 대전과 충남지역에서 출토된 국보 총 18점을 보유하고 있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박물관인데 이는 국보 15점을 보유하고 있는 경주박물관보다 많은 수이다. 물론 국보의 가치를 수치로 따질 수는 없지만 천년 도읍 경주에 비해 63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의 도읍인 점을 감안하면 경주박물관에도 절대 밀리지 않는 온라인 카지노 게임박물관의 클라스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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