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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은 May 07. 2025

4. 답사의 신, 『산사』에 가다! -선암사-

당일형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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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는 법이다. 이번에는 한국의 산지승원 산사(山寺)로 간다. 모든 소리가 숨을 죽이는 그곳에서 공백의 시간으로 들어간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선암(仙巖寺)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曹溪山) 동쪽 기슭에 위치한 사찰이며, 현재 한국불교 태고종의 유일한 수행 총림이다.


선암사 창건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는데, 신라 법흥왕 때 고구려 승려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했다는 설과, 통일신라 말에 도선대사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순조 28년(1828)의 기록인 『순천부 조계산 선암사 제6 창건기(順天府曹溪山仙巖寺第六創建記)』에는 “신라 법흥왕 때 아도화상이 일선군(현재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일대)으로부터 와서 금불상에 예를 올리고 부처님의 자취를 흠모하여 향을 피우고 간절히 기도하여 꿈에 수기(受記)를 받았다. 절을 창건하고 산 이름을 ‘청량(淸凉)’이라 하고 절의 이름을 ‘해천(海川)’이라 하였는데, 모두 꿈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앞선 숙종 30년(1704)의 기록인 『조계산 선암사 사적(曹溪山仙巖寺事蹟)』에는 “도선이 중국 유학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와 가르침을 펴다가 이곳 선암사를 큰 비보소(裨補所)로 삼았다. 우리나라 남쪽에는 3암(三巖)이 있는데, 영암군 월출산의 용암(龍巖), 광양현 백계산의 운암(雲巖), 승평부 조계산의 선암(仙巖)으로, 세 곳 모두 도선대사가 절과 탑을 건립하고 부도를 세웠다. 이곳 선암사 경내에도 철불(鐵佛) 1기, 보탑(寶塔) 2기, 부도(浮屠) 3기 등을 세웠고,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두 기록 모두 구전되어 오던 전설을 18세기 이후에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 여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오늘날 선암사에서는 두 가지 설을 절충하여 “신라 법흥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고, 통일신라말 도선대사가 중창했다.”라고 선암사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신라 법흥왕 때 혹은 통일신라말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지만 창건 당시 선암사를 소개한 기록이 전무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선암사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부도들이 선암사의 초창기 역사를 알려주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선암사의 여러 부도 중에서도 고려시대에 제작된 부도는 선조암지부도(禪助庵址浮屠), 무우전부도(無憂殿浮屠), 대각암부도(大覺庵浮屠)이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였던 세 부도가 1992년 보물로 승격되면서, 선조암지부도는 ‘선암사 북 승탑(仙巖寺北僧塔)’으로, 무우전부도는 ‘선암사 동 승탑(仙巖寺東僧塔)’으로, 대각암부도는 ‘선암사 대각암 승탑(仙巖寺大覺庵僧塔)’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고려 중기 대각국사 의천이 대각암에 머물면서 선암사를 또 한 번 중창하였다. 선암사에 남아있는 『조계산 선암사 대각국사 중창건도(曹溪山仙巖寺大覺國師重創建圖)』에 따르면 의천에 의해 중창된 선암사는 법당 13칸, 전각 12료, 방 26개, 산암 19개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의 가람으로 조성되었다.


의천의 후원하에 고려시대 선암사는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되었고, 훗날 의천을 기리는 부도가 선암사 내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선암사에는 의천과 관련된 여러 유물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중 선암사 응향각 내에 보관 중인 대각국사 가사는 선종이 의천을 위해 하사한 것이라 한다. 오늘날 선암사는 매년 가을(음력 9월 28일)에 대각국사 탄신 다례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아도화상을 창건주로, 도선을 1대 중창주로, 의천을 제2대 중창주로 추앙해오고 있다


조선 중기 선암사도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1597년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입었는데 철불 1좌, 석탑 2기, 승탑 3기, 그리고 문수전, 청측, 조계문만 남는다. 현종 1년(1660년) 경준(敬浚), 경잠(敬岑), 문정(文正) 세 승려가 대웅전을 세우는 등 8년간 크게 중창하였지만 이전의 사세를 복구하기에는 무리였다.


선암사의 중창 불사를 마무리한 이는 호암약휴(護巖若休) 스님이었다. 호암은 승선교를 비롯하여 원통전, 불조전 등을 만들었다. 그러나 영조 35년(1759년) 봄에 선암사는 또다시 화재를 만나 큰 피해를 입었다. 상월새봉(霜月璽封) 스님과 서악(西岳) 스님이 이듬해(1760년) 재건 불사를 시작 하였다. 상월새봉 스님은 중창불사뿐만 아니라 1734~35년에 두 차례 화엄대법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참가한 1287명의 명단이 선암사 해주록(海珠錄)에 전해진다. 그리고 상월 스님은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1761년 산 이름을 청량산, 사찰명을 해천사로 개칭하였다.


정조 13년(1789년)에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 스님이 선암사 원통전에서, 해붕 스님이 대각암에서 백일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이 태어났다. 정조는 눌암에게 국일도대선사대각등계홍제존자(國一都大禪師大覺登階弘濟尊者)의 첩지와 자수가사 및 금병풍을 하사하였다. 또한 세자가 직접 쓴 ‘대복전(大福田)’ 3자를 내려주고 향폐(香幣), 다약(茶藥) 등의 진품을 하사하였다. 순조는 즉위한 후 ‘인(人)’ ‘천(天)’ 어필 2자를 하사하여 선암사 원통전에 걸었다. 순조가 세자 시절 내린 ‘대복전’ 글씨는 현판으로 제작돼 현재 원통전 입구에 걸려 있다.


현재 선암사성보박물관에는 ‘주상전하수만세(主上殿下壽萬世)’, ‘왕비전하수제년(王妃殿下壽齊年)’, ‘세자저하수천추(世子邸下壽千秋)’가 새겨진 패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 선암사가 순조 탄생 이후 왕실의 안녕을 축원하는 원당의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순조 23년(1823) 화재로 인해 대웅전을 비롯한 여러 동의 건물이 불에 타자 다음 해부터 해붕(海鵬), 눌암(訥庵), 익종(益宗) 스님 등이 6번째 중창 불사를 하여 현재의 가람 구조를 갖추게 되었고 산의 이름과 사찰의 이름을 또다시 예전의 조계산, 선암사로 개칭하였다.


2. 선암사의 국보와 보물

선암사는 수많은 국가 유산자료가 있기에 여기서는 보물 중심으로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등록된 국가유산명으로 정리)

보물

순천 선암사 동·서 삼층석탑(東·西 三層石塔)

순천 선암사 승선교(昇仙橋)

순천 선암사 삼층석탑 사리장엄구(三層石塔 舍利莊嚴具)

순천 선암사 대각국사 의천 진영(大覺國師 義天 眞影)

순천 선암사 대각암 승탑(大覺庵 僧塔)

순천 선암사 북 승탑(北 僧塔)

순천 선암사 동 승탑(東 僧塔)

순천 선암사 대웅전(大雄殿)

순천 선암사 석가모니불 괘불탱 및 부속유물 일괄(釋迦牟尼佛 掛佛幀 및 附屬遺物 一括)

순천 선암사 선각국사 도선 진영(先覺國師 道詵 眞影)

순천 선암사 서부도암 감로왕도(西浮屠庵 甘露王圖)

순천 선암사 33 조사도(三十三祖師圖)

순천 선암사 동종(2008-1)(銅鍾)

순천 선암사 동종(2008-2)(銅鍾)

순천 선암사 일주문(一柱門)


3. 한국불교 태고종(韓國佛敎 太古宗)

태고종(太古宗)은 대한민국의 불교 종단 중의 하나로, 1970년 1월 15일 승려 진종을 종정(宗正)으로 출범하였으며, 고려 말기의 고승이었던 원증국사 태고 보우를 종조(宗祖)로 하고 있다. 종파에서 근본으로 사용하는 경전은 금강반야바라밀경과 대방광불화엄경이다. 한국 불교 종단 내에서 대처승(帶妻僧)을 인정하는 종단이다. 대처를 인정하는 종단은 태고종 외에도 법연종, 미타종 등이 있다. 총본산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의 안산 자락에 위치한 봉원사이다.


한국 불교에서 가장 세력 있는 종파인 대한불교조계종이 대처승을 인정하지 않다 보니 모든 스님들의 결혼이 금지된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가 잘 아는 유명 가수 이선희 씨의 아버지도 태고종 대처승이다. 옆 나라 일본은 대처승이 흔하다. 참고로 대처승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비구승은 결혼하지 않는 남자 승려, 비구니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 승려를 말한다.


태고종이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불교계의 상황과도 관련이 있는데 당시 대부분의 한국 불교는 조선총독부의 사찰령으로 인해 피해를 입고 있었다. 사찰령은 이른바 승려들의 활동부터 주지 임명까지 전부 조선 총독이 관리하고 "기혼자"에게 절의 주지 역할을 맡기도록 했다. 이때 임명된 주지들은 전부 일본인 아니면 결혼한 대처승이었다. 또 1930년경에는 일본이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한 절인 박문사(博文寺)를 현재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건축하고 모든 불교의 총본산으로 하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광복 이후 태고종은 조계종과 극심한 갈등을 겪는데 그 일면을 살펴보면, 한국에서 보통 남성 재가 신도를 일컫는 ‘법사(法師)’의 경우 한국 불교에서는 종단에서 행하는 공식 시험을 통과해야만 법사 자격증을 얻을 수 있는데, 법사를 '승려의 한 종류'로 대우할 것인지 아니면 '일반 신도 중 다른 신도를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신도'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 조계종은 '포교사'라고 부르며 승려를 보좌하고, 다른 재가 신도들을 가르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이처럼 조계종에서는 어디까지나 '특수한 신도'로 보는 것에 반해 태고종은 재가 법사를 승려의 일종으로 간주해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는 일반 스님들과 비슷한 권한을 부여해 공식적으로 '주지 법사'가 될 자격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차이는 두 종단이 대처승에 대한 의견차에 의해 종단이 갈렸을 정도로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재가자의 권한에 대한 견해차가 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서 태고종은 조계종에 대해서 '대승적이지 못하다.'라고 비판하고, 조계종은 태고종에 대해 '대처승들이나 재가승들이나 다른 게 없으니까 구분을 못 하지.'라며 비판한다.


4. 한국의 산티아고 순례길, 천년불심(千年佛心) 길트레킹 코스

조계산(曹溪山)은 순천을 대표하는 명산이다. 전라도에서는 영암의 월출산, 광주의 무등산과 함께 3대 명산으로 꼽고 있다. 이 세 개의 산이 삼각형 꼭짓점을 이루고 있다. 산 전체가 활엽수림으로 울창하고, 수림의 종류도 다양하여 전라남도 채종림(採種林)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다.


조계산의 풍광이 좋은 것은 산에 올랐을 때 보는 전경도 있지만 계곡을 따라 형성된 폭포도 인상적이다. 비룡폭포(飛龍瀑布)는 용이 날 듯 물결이 떨어지는, 그 아름다운 광경은 또 한 번 답사객의 혼을 빼놓는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송광사와 선암사 일원은 명승 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조계산을 이야기하려면 동쪽에 있는 선암사(仙巖寺)와 서쪽에 있는 송광사(松廣寺)를 빼놓을 수 없다.


조계산은 한 마디로 불국토의 산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산의 이름부터 그런데 조계산은 신라 때 창건한 송광사와 함께 송광산(松廣山)으로 불리다가 고려 때 조계산으로 바뀌었다. 이후 청량산(淸凉山)으로, 조선 선조 때 조계종의 중흥 도량이 되면서 조계산으로 다시 고쳐 불렀다.


송광사(松廣寺)와 선암사(仙巖寺)라는 거대 사찰이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위치해 있는데 송광사는 조계종이고, 선암사는 태고종이다.


먼저 송광사는 우리나라 삼보사찰 가운데 하나인 승보사찰(僧寶寺刹)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이다. 6.25 한국전쟁이 나기 전에는 8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50여 채의 건물이 남아있다. 사찰 경내에는 목조삼존불감(국보), 고려고종제서(국보), 송광사국사전(국보)과 송광사경패(보물), 송광사하사당(보물), 송광사약사전(보물), 송광사영산전(보물) 등 수많은 국가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산의 남쪽에는 높이 800m의 선암(仙巖)이 있고, 동쪽 사면에는 선암사가 있다. 선암사에서 시작하여 선암 굴목재, 보리밥집, 송광 굴목재를 통해 연결된 이 천년불심길은 한국의 산티아고라고 불리며 탐방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심신의 평온함을 선사한다.


5. 선암사의 3무(無)


선암사 가람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바로 3무(無), 즉 세 가지가 없는 것인데 첫 번째 무(無)는 다른 사찰들과는 달리 사천왕문이 없다. 그 이유는 조계산의 주봉인 장군봉의 기운이 강해서 굳이 불법의 호법신은 사천왕상을 모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무(無)는 협시보살상이다. 대웅전의 석가모니 부처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이미 삼독을 멸하고 마구니에게 항복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웅전의 석가모니는 협시보살을 따로 두지 않고 단독으로 봉안되어 있다.


세 번째 무(無)는 대웅전의 어간문이다. 어간문이란 대웅전 정면의 중앙에 있는 문을 말하는데 보통의 사찰들은 어간문을 만들어 스님이나 불자들이 드나들 수 있지만 선암사에서는 석가모니처럼 깨달은 자만이 어간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하여 어간문을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선암사 대웅전은 중앙에 문대신 난간을 설치하여 출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6. 선암사의 주요 공간


선암사(仙巖寺) 승선교(昇仙橋)

선암사 승선교는 조선 시대 건립된 아치형의 다리이며 1963년 대한민국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암사의 부도전을 지나 사찰 경내로 진입하려면 건너야 하는 다리이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다리를 홍예교(虹霓橋)라 불렀는데, 우리말로 하면 무지개다리이다. 승선교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늘에서 선녀가 목욕하려 내려왔다가 하늘로 다시 올라간다는 뜻이다.


승선교와 관련해서는 조선 숙종 시기 호암대사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대사가 관음보살의 모습을 보기 바라며 백일기도를 하였지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자 낙심하여 벼랑에서 몸을 던지려 하였다. 이때 한 여인이 나타나 대사를 구하고 사라졌는데 대사는 자기를 구해주고 사라진 여인이 관음보살임을 깨닫고 원통전을 세워 관음보살을 모시는 한편, 절 입구에 아름다운 무지개다리인 승선교를 세웠다.


길이 14m, 높이 4.7m, 폭 4m로 기단부(基壇部)는 자연 암반이 깔려 있어 홍수에도 다리가 급류에 휩쓸릴 염려가 없는 견고한 자연 기초를 이루고 있다. 다리의 아래 부분부터 길게 다듬은 돌을 연결하여 무지개 모양의 홍예(虹霓)를 쌓았으며, 그 짜임새가 정교하여 밑에서 올려다보면 부드럽게 조각된 둥근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홍예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자연석을 쌓아 석벽을 이루고 그 윗부분에도 돌을 쌓았는데, 모두 주변의 냇돌을 이용하였다.


다리 한복판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돌이 밑으로 삐죽 나와 있어 장식적 효과를 주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것을 뽑아내면 다리가 무너진다고 전해오고 있다. 이 용머리는 세속으로부터 사찰을 수호하고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는 중생들을 보호하고 수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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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仙巖寺) 강선루(降仙樓)

강선루는 초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30년에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데, 측면 기둥 중의 하나가 계곡에 빠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2층으로 이루어진 누각으로 1층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고, 2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을 얹은 건물이다. 2층은 전체가 마루이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1층의 기둥 사이가 넓어 2층 누각을 떠받치는 보조기둥을 4개 세웠다. 누각의 정면과 후면에는 서로 필체가 다른 ‘강선루(降仙樓)’ 편액이 처마 가운데 걸려있고, 다른 기문이나 시판은 없다.


승선은 선계로 오른다는 뜻이고 강선은 선계로 내려온다는 뜻이다. ‘선암사(仙巖寺), 강선루(降仙樓), 승선교(昇仙橋)’. 조계산 자락의 선암사 초입은 모두 신선과 연관된 이름이다. ‘선암사’는 절 서쪽에 있는 평편한 큰 바위에서 신선들이 바둑을 두었다는 유래에서 이름 지어졌고, ‘강선루’는 신선이 내려와서 노니는 누각이고, ‘승선교’는 아침 해 떠오르듯 신선들이 놀다 하늘로 올라가는 다리라는 의미이다. 선암사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온통 신선들의 놀이터이다. 승선교에서 강선루에 이르는 진입 부분은 선암사의 얼굴로 많은 답사객들과 탐방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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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암사(仙岩寺) 삼인당(三印塘)

삼인당은 긴 타원형의 연못 안에 섬이 있는 독특한 양식으로 선암사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문왕 2년(862)에 도선국사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삼인이란 제행무상인(諸行無常印), 제법무아인(諸法無我印), 열반적정인(涅槃寂靜印)의 삼법인을 뜻하는 것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독특한 이름과 모양을 가진 연못은 선암사에서만 볼 수 있다.

선암사(仙岩寺) 삼인당(三印塘)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불교의 중심사상, 즉 석가모니의 방대한 가르침을 세 개의 단어로 축약하고 있는 개념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무상"은 진리 외 "모든 것은 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에서 무상함을 인식하는 것을 말하는데 자연의 변화, 인간의 생로병사, 감정의 흐름 등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고 항상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집착을 내려놓고 현재를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의 소유물, 그리고 우리의 신체조차도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고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 진리를 깨닫게 되면 고통을 줄이고 마음의 평온을 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법무아(諸法無我)

"제법무아"는 "모든 것은 '나'가 아니다"는 의미로, 자아의 고집과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현상과 존재가 본질적으로 '나'라는 고정된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나'라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는 조건들의 집합일 뿐,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생각, 감정, 신체적 감각 등은 모두 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을 '나'라고 집착하게 되면 고통이 된다.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으면, 우리는 더 자유롭고 평화로운 상태에 이를 수 있다.


열반적정(涅槃寂靜)

“열반적정”은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이치를 터득하고 집착을 버리면 최고 행복의 경지인 열반적정에 이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열반의 세계는 생사 고뇌를 모두 끊었기 때문에 적멸하고 적정하며 모든 번뇌와 망상이 사라지고 오직 평화와 고요함이 깃든 경지라는 말이다.


선암사(仙岩寺) 일주문(一柱門)

선암사 일주문은 9개의 돌계단을 앞에 두고 있으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을 얹었다. 2개의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앞뒤로 보조 기둥을 세웠으나 위로부터 30cm 중간에서 보조 기둥을 잘랐다. 이는 기둥 양옆으로 설치된 담장 때문인 듯하며, 다른 일주문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 배치된 다포식 건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에 배치되는 공간포를 앞면에 3구, 옆면에 1구씩 두어 공포로 꽉 차 있는 듯하다. 기둥 위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앞면 중앙에 ‘조계산 선암사(曺鷄山 仙巖寺)’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뒷면 중앙에는 ‘고 청량산 해천사’(古淸凉山海川寺)라고 적혀 있어 옛날에는 이 사찰의 이름이 ‘해천사’이고 조계산이 청량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암사 일주문은 ‘문경 봉암사 봉황문’, ‘대구 동화사 봉황문’, ‘구례 천은사 일주문’과 함께 독특한 사찰 정문으로 인정받아 2022년 12월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선암사(仙巖寺)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선암사의 주불전으로 일주문과 범종루를 잇는 중심축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시대 정유재란(1597)으로 불에 타 없어진 것을 현종 1년(1660)에 새로 지었다. 그 후 영조 42년(1766)에 다시 불탄 것을 순조 24년(1824)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은 선암사의 중심 법당으로, 그 앞에 만세루와 맞보고 있으며 앞마당에는 통일신라 시대 조성된 순천 선암사 동ㆍ서 삼층 석탑(보물) 2기가 나란히 서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대웅전은 자연석 기단 위에 민흘림기둥을 세워 지어졌고 기둥의 머리에는 용머리 장식을 하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화려한 겹처마 팔작지붕을 얹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여 공포를 앞면과 뒷면에는 각 3조, 양 옆면에는 각 2조씩을 배치하여 장엄하면서도 화려함을 표현하였다. 정면 가운데 칸의 두 기둥 사이에는 두 마리의 용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내부에는 석가모니의 좌상이 있고 그 뒤로 영산회상도가 모셔져 있다. 불상은 목조이며 불상 높이가 233cm에 달해 장엄함을 보여 주고 있다. 제작기법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측되며 아울러 불상 좌측으로는 각각 1988년에 그려진 감로탱화와 신중탱화가 있고, 불상 뒤편 우측으로는 헌종 15년(1849)에 봉안된 삼장탱화가 있다. 보통 사찰의 불보살을 보면 눈을 거의 감은 듯이 지그시 뜨고 있는데 이는 아래에서 예불을 올리는 불자들과의 시선을 맞추기 위한 배려이다.


선암사 대웅전 문 위에 단 현판의 글씨는 순조의 장인이자 순원왕후의 아버지이며, 세도가였던 김조순(金祖淳)의 글씨인데 '김조순 서(金祖淳 書)'라고 자신의 이름을 새겼다. 이와 같은 일은 원래 임금만이 할 수 있는 것인데, 당시 세도 정치 시기 김조순의 권세가 어떠했는지 잘 보여 주고 있다.

선암사(仙巖寺) 대웅전(大雄殿)


선암사(仙巖寺) 동서(東西) 3층 석탑(石塔)

대웅전 앞에 좌우로 3층 석탑 2기가 서 있다. 2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형태인데 두 탑이 규모와 수법이 서로 같아서 같은 사람의 솜씨로 동시에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하나씩의 기둥 모양을 새겼고, 각 기단의 윗면에는 3층의 굴곡을 이룬 괴임돌을 두어 윗돌을 받치고 있다.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밑받침은 각 층이 4단이다. 지붕돌 정상에는 2단의 굴곡을 이룬 괴임이 있는데, 지붕돌에 이와 같은 수법을 한 것은 희귀한 일이다. 탑의 머리 장식으로는 노반(露盤:머리 장식 받침)이 남아 있고 그 위에 작은 석재들이 놓여 있다.


이 두 탑은 완전히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으며, 각 부에 다소의 손상을 입기는 했으나 규율성이 느껴진다. 위와 아래의 비율도 건실하고 우아하며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 양식을 잘 계승하고 있다. 다만 기단의 가운데 기둥 조각이 하나로 줄고 지붕돌 밑면의 받침수도 각 층 4단으로 줄어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선암사(仙巖寺) 동서(東西) 3층 석탑(石塔)


선암사(仙巖寺) 팔상전(八相殿)

선암사 팔상전은 대웅전 뒤편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전각으로 내부에 팔상도를 모시고 있다. 팔상도(八相圖)는 석가모니의 출생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여덟 장으로 압축해서 그린 그림이다. 내부 중앙에 아미타불을 모시고 그 뒤로 『화엄경변상도(華嚴經變相圖)』가 있으며 좌우로 팔상도가 걸려 있다.


이 화엄경 변상도는 정조 4년(1780)에 그린 그림으로 석가모니가 『화엄경(華嚴經)』을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웅장한 그림이다. 우리가 ‘화엄경’이라 말하는 경전은 부처가 되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하는 원인들과 그것에 의해 성취되는 갖가지 공덕을 설한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경전의 권수에 따라서 40 화엄, 60 화엄, 80 화엄으로 나뉘며 경을 설한 장소(處)와 경을 설하는 모임(會)에 따라 60 화엄은 7처 8회, 80 화엄은 7처 9회로 구분 지을 수 있지만 내용이 크게 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 그려진 ‘화엄경변상도’는 80 화엄에 따라 7곳에서 9번 화엄법회를 열었던 모습을 그림으로 도해하고 있어 ‘화엄회도’, ‘화엄 7처 9회도’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1765년에 만들어진 김룡사 화장암을 비롯하여 1770년 송광사, 1780년 선암사, 1790년 쌍계사 그리고 19세기 초반에 그려진 통도사 작품이 남아 있었다. 아쉽게도 18세기 만들어진 네 점의 작품 가운데 김룡사의 작품은 기록만 남겨진 것이고 선암사, 쌍계사 소장의 ‘화엄경변상도’는 도난을 당해 현재 남겨져 전하는 작품은 송광사 소장본 뿐이어서 2009년 이 작품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화엄경변상도’의 화면은 크게 위에서 아래로 단을 이루고 있으며 각각의 법회는 상서로운 구름으로 구분 짓고 있는데 위의 2줄은 천상에서 설법한 도리천회, 야마천궁회, 도솔천궁회, 타화자재천궁회를 아래 2줄은 지상에서 행한 보리도량회와 3번의 보광명전회, 시다림회가 그려져 있다. 7곳에서 9번 화엄법회가 열리는 모습이기에 ‘7처 9회도’이다.


사실 그림에 등장인물이 너무 많고 화면의 분할도 많이 되어 있어 ‘화엄경’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가 없이 이 그림을 보면 무척 난해하여 정확한 뜻을 알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팔상전 내부에는 보물로 지정된 33 조사도가 있는데 이는 가섭존자부터 중국의 육조 혜능 스님까지 33명의 조사를 11폭으로 나누어 그린 선종 33 조사도로서 우리나라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 또한 국내는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제작한 사례가 드물어 귀중한 불화로 평가받고 있다. 이 그림은 원래 11폭으로 구성됐지만, 안타깝게도 4폭이 도난당해 현재 7폭만 남아 있다.


팔상도와 화엄경변상도 외에도 도선대사, 서산대사, 무학대사, 지공선사, 나옹선사 등 우리나라 고승과 33 조사(祖師)들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팔상전의 건물을 살펴보면. 정면 5칸, 측면 3칸에 맞배지붕을 얹은 건물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배치된 다포계이다. 원래는 기둥 위에만 공포가 있는 주심포계 건물이던 것을 나중에 수리하면서, 앞면의 공포만 다포양식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선암사(仙巖寺) 팔상전(八相殿)


선암사(仙巖寺) 불조전(佛祖殿)

순천 선암사 불조전은 정면 3칸의 익공(翼工)계 팔작집으로 사찰 내 여러 전각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이른 시기에 건립된 조선 후기 건물로 건립 연대에 관한 자료가 확인된다.


불조전 내부의 목조 53 불상과 과거 7 불상은 「선암사 사적기」에 1702년에 조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어 1702년에 조성한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선암사 불조전 목조 53 불상과 과거 7 불상 60구 중 49구는 고불(古佛)이며, 11구는 도난으로 인해 새로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불상들의 배치는 가운데 상단에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7불이 봉안되어 있고, 중앙 하단과 좌우 상·하단, 남벽과 북벽의 불단에 각각 53불이 봉안되어 있다.

선암사(仙巖寺) 불조전(佛祖殿)


선암사(仙巖寺) 원통전(圓通殿)

조선 현종 1년(1660) 경잠(敬岑), 경준(敬俊), 문정(文正) 등이 초창하였다. 그리고 숙종 24년(1698) 호암(護巖) 대사가 중창하였고, 순조 24년(1824) 해붕(海鵬), 눌암(訥菴), 익종(益宗) 스님이 재 중수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원통전은 조선 왕실과도 관련이 깊은 건축물인데, 정조가 후사가 없자 선암사의 눌암대사에게 100일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순조 임금을 얻게 되었는데, 후에 순조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하여 ‘人(인), 天(천)’, ‘大福田(대복전)’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하였다. 바로, 사람뿐만 아니라 하늘에게도 큰 복전이라 칭하고 기렸으니 원통전은 그야말로 유교계와 불교계가 인정한 명당 중의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현판은 현재 건물의 내부에 걸려 있다.


대웅전 현판과 원통전 현판으로만 봐도 선암사가 당시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왕실과 세도 가문의 비호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원통전은 동남향의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보통의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정(丁) 자형 건물이며 기둥 위에 익공이 붙은 익공계 양식이다. 선암사 내에서도 같은 구역에 있는 팔상전과 불조전과 같은 익공계 양식으로 보아 세 건축물이 동시대에 만들어졌거나, 어느 한 건물이 다른 건물의 모범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정면에 2개의 기둥과 2개의 활주로 내어 지붕을 길게 돌출시켰다. 내부는 내진과 외진으로 나누어지는데 간단한 벽과 문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내진 부분의 배면 한쪽을 막아 불상을 안치하는 불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원통전 중앙문에는 모란꽃을 투각한 두 짝의 문이 있고, 그 하단의 궁창에는 두 개의 그림조각이 있는데 그중 하나에는 둥근 달을 이중의 원으로 표현하고 그 속에서 두 마리의 토끼가 방아를 찧고 있다. 불교에서 옥토끼 이야기는 제석천이 자신의 몸을 보시한 토끼를 가상히 여겨 달에 살게 하였다는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토끼의 보시는 중생을 위한 헌신과 희생을 상징한다.


또 다른 하나의 궁창에는 계수나무와 두 마리의 새를 표현해놓았다. 계수나무는 달 속에 있는 상상의 나무라는 전설이 있다. 재질이 좋고 아름다움을 나타낼 때 인용되기도 하며, 속세를 피해 소박하고 욕심 없이 살아가고 싶을 때의 도피처로 계수나무를 그리기도 한다. 달은 관음보살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처럼 원통전의 중앙문에 달을 형상화함으로써 이 공간이 관음보살의 영역임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순조 친필 현판, 대복전(大福田)


선암사(仙岩寺) 각황전(覺皇殿)

각황전의 본래 이름은 장육전으로 통일신라 경문왕 원년(861)에 다시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현종 1년(1660)에 복원하였고, 다시 영조 36년(1760)에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찰 내 가장 구석진 곳에 있는 각황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으로 규모는 작으나 화려한 멋을 지닌 건물이다. 건물 안쪽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꾸민 천장을 설치하였고, 처음 지었을 당시 만들었던 철불을 1991년 한지와 삼베를 뜯어내고 점토 위에 개금(改金)하여 현재에 이른다. 얼굴의 전체 형태는 역삼각형에 가깝고, 보림사 철불처럼 눈두덩이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머리에는 널찍한 반달 모양의 계주가 있고, 머리 꼭대기에는 원통형의 정상 계주가 있어 특이하다. 이러한 정상 계주는 주로 조선시대의 불상에서 보이는 양식적 특징이어서 보수 시 만들어 넣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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