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dy강성 Dec 28. 2024

카지노 가입 쿠폰 대왕 (3)

페르시아 전쟁 이후

중앙아시아로


고대 박트리아(Bactria) 지방은 오늘날 이란 동부에서 시작되는 지역이다. 중심 도시는 박트라(Bactra, 현 아프가니스탄 발흐)이다. 박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탄생지이자 중심 도시로서 동페르시아 지역에서 가장 번창했던 도시 중의 하나였다.

카지노 가입 쿠폰
카지노 가입 쿠폰
카지노 가입 쿠폰[박트리아와 발흐 외곽 성벽 유적(위), 현 발흐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고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이란의 동부와 서부는 서로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수도 테헤란이 속해 있는 이란의 서부에 해당되는 지방 그리고 오늘날의 이라크와 그대로 겹치는 메소포티미아 지방에 살았던 고대 페르시아인은 ‘가우가멜라’전투페르시아에게 치명적인 결정전이었다는 것을 정확하게 인식했다.


그에 반해 오늘날의 중앙아시아로 총칭되는, 박트리아가 위치한 페르시아제국 동부에서는 단지 한 번의 전투에서 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서로 기본적인 사고방식과 성향이 이렇게 극명하게 차이가 나다 보니 그런 베소스와 아직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미련을 갖고 있는 다리우스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도피조차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다리우스 추격


게다가 카지노 가입 쿠폰가 동세대의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빠른 속도로 쫓아왔다. 추격에 나선 병력은 먼저 ‘콤파니온’이라고 불리는 500명의 기병과 창을 던지는 병사와 궁병이 1,000여 명 정도의 소수정예 부대였다. 역사가들이 모두 ‘경이적인 속도’라고 평가한 추격이 시작되었는데, 하루 돌파 거리가 60~80킬로미터 정도였다고 한다.

일단 오늘날 테헤란이 된 라가에로 향했다. 그곳에서 다리우스가 이미 ‘카스피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 지방의 ‘험지’를 넘어 도망쳤다는 것을 알았다. 다음 날 마자이오스의 아들이 가져온 편지에는, "베소스와 그의 동료들인 ‘지방장관’ 3명이 다리우스를 황제에서 폐위하여 포로로 끌고 동쪽으로 도주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도망치는 베소스 일행이 반드시 들를 수밖에 없는 이 지역의 유일한 도시인 담간(Damghan)까지 최단 거리의 길을 선택했다. 최단 거리의 길은 도로가 나 있지 않은 사막을 지나는 길이었다. 사막을 가는 동안 알렉산드로스를 비롯한 전원이 갈증의 고통을 겪었다. 그래도 하룻밤에 80킬로미터를 주파했다.

[이란 테헤란 출처 구글 이미지]
[이란 담간의 모스크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속도에 추격을 당하는 쪽도 놀랐다. 그들도 카지노 가입 쿠폰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해 도주에 불필요한 것을 모두 버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버린 것에는 다리우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방장관 3명은 칼에 찔린 다리우스를 길옆 풀밭에 버리고 달아났다.


알렉산드로스는 몸에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 유체를 덮은 다음 모여 있는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황제의 유체는 생전에 그가 누린 지위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수사에 있는 모후에게 보내라고 명령했다. 장례도 페르시아 황제 다리우스 3세의 자격으로 거행할 것을 명령했다.


타인보다 앞서가는 자의 비극


페르시아의 황제 다리우스가 죽은 뒤에 알렉산드로스가 한 번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비극이 그를 덮쳤다. 처음으로 알렉산드로스에게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것도 어릴 때부터 함께 배우며 자랐던 ‘왕의 콤파니온’이라 불리는 동료 사이에서 발생했다.


마케도니아 상층부에서 자라기 시작한 왕에 대한 불만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에서 생겼다.

첫째, 패자인 페르시아인을 ‘지방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그들을 우대한 것.
둘째, 왕 앞에 엎드려 공손함을 맹세하는 페르시아인의 관습을 승자인 마케도니아인에게도 강요한 것.
셋째, 호화로운 비단으로 만든 페르시아풍 의복을 몸에 두르거나 금은이나 보석으로 장식된 옥좌에 앉는 등 실질적이고 강건한 마케도니아인임을 잊고 페르시아의 나약한 생활방식에 매료된 듯 보이는 것.
넷째, 이집트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카지노 가입 쿠폰가 실제로 믿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
다섯째, 다리우스가 죽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멸망했으니 이제 동방 원정의 목표가 이미 달성되었는데도 계속 동방원정을 하려 한다는 점.


첫째, 둘째 불만은 페르시아를 다스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고 헤파이스티온이 알렉산드로스에게 페르시아 예절을 취했다는 것은 장난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해명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리고 셋째, 넷째 문제는 아직도 정복욕에 불타고 있는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화려함에 취할 리가 없었고 실제로 신탁을 믿는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마지막 불만을 살펴보자. 이 문제는 알렉산드로스와 부하 장수들의 전략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물론 페르시아의 황제가 죽은 것은 맞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패권을 차지했던 지금까지의 왕조(아시리아, 리디아, 메디아)는 모두 티그리스강의 동쪽에서 시작되는, 오늘날로 치면 이란의 동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북쪽의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산악 지대의 사람들의 습격에 의해 멸망했다.


더구나 다리우스를 살해한 이들은 이 지방에 세력 기반을 둔 베소스를 비롯한 3명의 ‘지방장관’, 즉 3명의 유력자였다. 이 세 사람은 알렉산드로스의 추격을 피했다면 언젠가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위협할 것이 분명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문제를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었다. 이 지방을 공격한 것은 그리스와 페르시아를 융합한 대제국을 꿈꾸었던 알렉산드로스가 단순한 정복욕이 아니라 냉철한 전략을 토대로 한 일이었다.

필로타스의 처형


그러나 불만을 품기 시작한 동료들 앞에 왕의 입장을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만약 이 불쾌함이 표면화되었다면 반드시 누군가가 변호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알렉산드로스 본인이 설득에 나섰을 것이다. 물론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심각했다. ‘왕의 콤파니온’이라는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신뢰하는 동료들이 관여했기 때문이다. 사전에 발각된 이 음모의 끈을 더듬어 올라가자 필로타스에게 닿았다.


카지노 가입 쿠폰보다 4세 연장자였던 필로타스는 파르메니온의 장남이었다.이제까지 알렉산드로스는 필로타스에게 기마 군단의 총지휘라는 대임을 맡겨왔다. 아버지 파르메니온이 선왕인 필리포스의 시대부터 중신이었고 알렉산드로스 시대에도 2인자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에 아들 필로타스가 대임을 맡은 것이 아니었다. 필로타스 본인이 우수한 장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30세가 된 필로타스가 알렉산드로스의 암살을 꾸몄을까? 대답은 완전 ‘노’이다. 그는 그런 짓에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새어나오듯 들려오는 불온한 분위기를 알렉산드로스에게 전하지 않았을 뿐이다. 알렉산드로스는, 고위에 있는 사람을 재판하는 것은 동료인 군대의 고관들이 모인 곳에서 해야 한다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법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렇게 필로타스의 운명은 동료들에게 맡겨졌다.


재판을 받는 필로타스나 재판을 주도하는 헤파이스티온과 크라테로스모두 소년 시절부터 스파르타 사람 레오니다스에게 카지노 가입 쿠폰와 함께 교육을 받은 동료들이었다. 과거의 동료를 앞에 두고 이전부터 자존심이 높은 것으로 유명한 필로타스는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내내 의기양양한 태도를 무너뜨리지 않았다. 판결이 내려지는 동안 카지노 가입 쿠폰는 홀로 막사 안에 남아 있었다.


재판에서 누군가가 필로타스에게 물었다. 왜 그 낌새를 왕에게 알리지 않았는가? 필로타스가 말했다. 고자질하는 것은 성격에도 맞지 않고 왕에게 보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구체적인 계획도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료들은 전투 상황에서 그런 정보는 당연히 보고해야 하고, 필로타스가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필로타스는 옛 동료 가운데 누구 하나 반대표를 던지지 않아 전원 일치로 사형에 처해졌다.

[필로타스의 재판 출처 구글 이미지]

파르메니온의 죽음


필로타스의 처형 후 여러 명의 관계자가 사형에 처해졌다. 이제 남은 사람은 파르메니온이었다.고대의 역사가들은 알렉산드로스가 엑바타나에 남아 있는 파르메니온에게 서둘러 알렉산드로스 아래에 있는 장수 세 명을 보냈다고 한다. 파르메니온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려주는 확실한 사료는 없다. 마케도니아 군대의 병사들은 파르메니온이 처형된 아들의 책임까지 지고 자결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생전에 파르메니온이 차지하고 있던 지위, 즉 마케도니아 군대 전체에서 카지노 가입 쿠폰 다음가는 지위는 오랫동안 파르메니온의 부장을 담당하고 있던 크라테로스에게 돌아갔다. 크라테로스는 이후 카지노 가입 쿠폰의 ‘2인자’가 되었다.그것도 후방 기지인 엑바타나에 있지 않고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 전체 일정을 함께했다.

[카지노 가입 쿠폰(좌)와 크라테로스(우) 출처 구글 이미지]

필로타스가 죽고 공석이 된 기마 군단을 통솔하는 지위는 헤파이스티온과 클레이토스 두 사람에게 돌아갔다.2,000명의 기병 군단을 둘로 나누어 하나씩 맡겼다. 필로타스 사건에 관여된 것으로 밝혀진 인물들이 사형을 당하면 공석이 생겼고 곧바로 다른 사람으로 채워졌다. 이 무렵 승진한 사람 가운데는 카지노 가입 쿠폰가 세상을 떠난 뒤에 이집트의 왕이 된 프톨레마이오스도 있었다.


재개된 동방원정(기원전 329년)


기원전 329년, 4개월 뒤에 27세가 되는 알렉산드로스는 봄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동방 원정을 재개했다. 이번에는 단순히 다리우스를 살해한 3명의 ‘지방장관’을 추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대로 둘 수 없는 세 사람을 추격하면서 페르시아제국의 동방 전체를 제패하는 것이 참된 목적이었다. 따라서 지난번에 소수정예로 추격했던 것과는 달리 이번에는 군대 전체를 데려갔다.


알렉산드로스는 전투에 승리해 획득한 지역 가운데 전략적으로 요충지라고 생각되는 지역마다 ‘알렉산드리아’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 도시라기보다 기지를 건설하고 길을 내거나 다리를 세우는 일을 하는 이른바 ‘인프라’ 전반을 담당한 사람은 헤파이스티온이었다.


베소스는 거의 죽음에 이른 다리우스를 던져주면 알렉산드로스가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추격해오는 것을 보고 도망치기를 포기했다. 마케도니아 군대가 지나가는 곳 주변을 불태워 적의 보급을 끊은 다음 8,000명의 박트리아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의 속도가 베소스의 예상보다 빨랐다. 알렉산드로스는 자기 군대가 먹을 것이 떨어지기 전에 결말을 지었다.

[박테리아 기병 출처 구글 이미지]

알렉산드로스가 거느린 제1군과 크라테로스가 거느린 제2군의 협공을 당한 박트리아 군대는 괴멸당하기 전에 항복했다.베소스만 도망쳤다. 그들은 ‘가우가멜라’ 전투에도 참전해서 알렉산드로스의 위용을 느꼈을 것이다. 항복에 그치지 않고 이후 알렉산드로스 밑에서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물론 젊은 왕은 이를 받아들였다. 박트리아 지방의 ‘지방장관’도 페르시아인을 임명했다.


한편 이번에도 카지노 가입 쿠폰의 손에서 도망치는 데 성공한 베소스는 다리우스를 살해한 동료 2명 가운데 1명을 찾아갔다. 베소스는 그곳에서 자기를 ‘재앙신’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베소스가 찾아간 동료는 오늘날의 우즈베키스탄 일대로 고대에는 소그디아나(Sogdiana)라고 불린 지역의 ‘사트라프’인 스피타메네스(Spitamenes)였다. ‘지방장관’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부족장 수준이었기 때문에 문명 수준이 낮았다.

[소그디아와 소그디아 여인들 출처 구글 이미지]

스피타메네스는 베소스를 사로잡아 알렉산드로스에게 인계하는 것 외에 그의 추격을 막을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실행했다. 박트리아 지방장관으로 ‘가우가멜라전투’에서 좌익을 거느렸던 베소스는 엑바타나로 호송되어 페르시아 법에 따라 발가벗겨진채 처참하게 사형을 당했다. 그럼에도 알렉산드로스는 추격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페르시아제국의 동쪽 끝까지 제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애를 먹인 게릴라전(기원전 328년)


살해범을 모두 처리할 때까지는 1년, 동방 전역을 제패할 때까지는 다시 2년이 걸렸다. 본격적인 동방 원정을 재개했다면 2년이면 끝났을 터다. 오늘날의 인도 북부,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파키스탄 북부까지 포함한 광대한 지역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지역은 넓기 때문에 특수한 사정이 있었다.


먼저 지형이 복잡했다. 이는 지역 곳곳에 할거하는 부족의 수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그들을 통합할 힘을 가진 대국도 없었다. 페르시아 황제의 통합 통치는 표면적인 것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평원에서 양쪽 군대가 마주하고 싸우는 형태의 전투가 벌어질 일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게릴라전뿐이다. 이제는 산악 지대에 숨어 예상도 하지 못한 때 예상도 못한 방향에서 공격해오는 게릴라를 상대로 싸워야 했다.

[중앙아시아 지역 고대 부족들 출처 구글 이미지]

어쨌든 카지노 가입 쿠폰는 그런 상황에서도 연전연승했고, 이렇게 지형도 복잡하고 사회형태도 다양한 중앙아시아를 제패하는 데 성공한 유럽인은 전에도 없었고 나중에도 없었다. 오직 알렉산드로스뿐이었다. 특히 보급은 병사들이 감동할 정도로 잘 기능했다. 그리스에서 중앙아시아의 힌두쿠시산맥의 산속까지 알렉산드로스가 명령한 보급 물자가 하나도 빠짐없이 도착했고 사적인 편지를 포함한 공문서도 분실하는 일 없이 모두 제대로 도착했다.


또한 그는 동방을 제패하는 도중에 25개가 넘는 ‘oo 지방의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붙은 새로운 도시, 정확하게 말하면 기지를 건설했기 때문에 그곳에 병사를 배치해야 했다. 따라서 병사를 보충하는 일도 빼놓을 수 없었다. 언제나 지정한 장소에 지정한 숫자의 병사가 도착했다.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oo 지방의 알렉산드리아’ 가운데 하나가 카불과 더불어 아프가니스탄의 중요 도시인 칸다하르(Kandahar)이다.

[1880년 2차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칸다하르 성채 앞에 주둔한 영국-인도군 출처 구글 이미지]

한편 베소스를 사로잡아 넘기면 카지노 가입 쿠폰의 추격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소그디아나 지방의 ‘사트라프’인 스피타메네스 역시 목숨을 1년도 부지하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집요한 추격에 불만을 터뜨린 부하 장수들의 손에 살해되고 말았다.그들은 스피타메네스의 목을 들고 알렉산드로스에게 항복했다.


이제 동방 원정에서 카지노 가입 쿠폰 앞에 남은 곳은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부에 해당하는 산악 지대뿐이었다. 기원전 328년도 겨울로 접어들었다. 다음 봄을 기다리며 소그디아나 지방의 수도인 사마르칸트에서 겨울을 나기로 결정했다. 21세에 동방 원정을 시작한 알렉산드로스도 어느덧 28세가 되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출처 구글 이미지]

클레이토스의 죽음


사마르칸트에서 겨울을 나던 알렉산드로스와 부하 장수 모두 다음 해인 기원전 327년부터 페르시아제국 동쪽 제패의 마지막 단계로 돌입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 밤도 ‘지방장관’의 집 한쪽에서 카지노 가입 쿠폰와 부하 장수를 위한 연회가 열렸다. 카지노 가입 쿠폰보다 20세 정도 연장자였던 클레이토스는 왕의 동료인 다른 장수들과 달리 마케도니아 왕국의 상층부 출신이 아니었다. 그의 누이동생은 카지노 가입 쿠폰의 유모였다.


다음날은 행군을 떠나는 날도 아니었고 그날 밤 왕이 자리에 있어도 사실상 동료들끼리 즐기는 연회여서 편안한 술자리였다. 결국 모두 만취했는데, 파르메니온의 죽음과 페르시아인을 융합하려는 정책에 불만을 갖고 있던 클레이토스가 술에 취해 속에 담아두던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불만을 쏟아했다. 이집트의 신관이 신의 아들이라고 한 것이 대수인가, 필리포스의 아들이라는 것이 부끄러운 일인가하고 비난했다.


표정이 싹 바뀐 카지노 가입 쿠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몇 명은 클레이토스를 방 밖으로 끄집어낸 다음 여전히 소리치고 있는 그를 별실로 데려갔다. 카지노 가입 쿠폰도 완전히 취한 상태였다. 더 이상 분노를 참을 수 없던 카지노 가입 쿠폰는 클레이토스를 찾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왕의 목소리를 들은 클레이토스가 동료의 손을 뿌리치며 되돌아왔다.


돌아온 클레이토스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한 소절을 낭송하면서 카지노 가입 쿠폰 앞에 섰다. '승리는 병사들의 공적인데 장수는 종종 그것을 잊는다'라는 구절이었다. 격분한 알렉산드로스는 위병이 갖고 있던 창을 빼앗아 클레이토스를 향해 던졌다. 창은 가슴에 직격했다. 클레이토스는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즉사였다.

[클레이토스를 죽이는 알렉산더 출처 구글 이미지]

술이 깨고 후회하기 시작한 28세의 젊은이는 사흘 밤낮을 혼자 틀어박혀 이무 것도 입에 대지 않고 아무도 만나지 않으며 간간히 클레이토스와 그의 여동생이자 알렉산드로스의 유모였던 라니케(Lanike)의 이름을 흐느껴 불렀다. 항상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던 그로서는 아마 그때 처음으로 자기혐오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도 나흘째에는 병사들 앞에 알렉산드로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28세의 왕은 책임감 때문에 예전의 알렉산드로스로 돌아갔다.


카지노 가입 쿠폰의 결혼


다음 목표는 오늘날의 파키스탄 동부 일대를 제패하는 것이었다. 인더스강이 흐르는 이 지방은 인도의 왕을 칭하고 있는 포로스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언제나 다음 목표로 가기 전에 이미 제패한 지방을 다지는 일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다. 등 뒤에 적을 두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제 중앙아시아에는 중소 부족장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고 경의를 표하는 누군가를 아군으로 삼는 것이 지름길이었다.


박트리아 지방의 중간 규모 부족장 가운데 옥사르테스(Oxyartes)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젊은 정복자의 지배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데려온 딸을 헌상했다. 고대 역사가들은 록사네(Roxane)라는 이름을 가진 이 딸이 절세의 미녀였다고 전한다. 알렉산드로스는 그녀와 정식 결혼식을 올렸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이를 정략결혼으로 보기도 했다. 그녀가 어느 정도 미녀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녀가 아이를 낳은 시기는 결혼 후 5년이나 지난 뒤였다.

[카지노 가입 쿠폰와 록사네 출처 구글 이미지]

옥사르테스를 아군으로 삼은 효과는 곧바로 결실을 맺었다. 박트리아인 옥사르테스는 동포들에게 알렉산드로스의 지배를 받는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설득했고 그래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알렉산드로스의 부장이 된 크라테로스와 협력해 군사적인 제압에도 참여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안심하고 다음 목표인 인도의 왕 포로스와의 대결을 준비하기 위해 ‘oo 지방의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붙인 도시의 하나인 박트리아의 도시로 돌아왔을 정도였다.

[카지노 가입 쿠폰가 제패한 중앙아시아 지역 출처 구글 이미지]

수구파의 암살 음모


그런데 여기서 알렉산드로스는 다시 마케도니아의 수구파에 의한 음모에 직면했다. 마케도니아 군대에는 젊은 왕이 진행한 현지인과의 융합 정책 에 동의하지 않는 자가 늘 있었다. 그 사람들이 보기에 마케도니아의 왕이 마케도니아의 여자나 그리스의 여자가 아닌 패배자인 중앙아시아의 여자와 결혼한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의 암살 음모가 진행되었다. 주모자라기보다 사상적인 지도자인 사람은 철학자 칼리스테네스(Callisthenes)였다. 그는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조카였는데,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에 동행한 수많은 민간인 가운데 하나였다. 칼리스테네스는 마케도니아의 고관 자제들을 선동했다. 왕의 암살 계획을 알게 된 알렉산드로스는 스승의 조카임에도 용서하지 않았다. 칼리스테네스는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서 죽었다고 전한다.


알렉산더의 왕실 시종 중 한 명이자 칼리스테네스의 전 제자였던 마케도니아의 헤르몰라우스(Hermolaus)가 왕실 멧돼지 사냥 중에 일어난 사건에서, 왕실 의례를 어기고 알렉산드로스가 멧돼지를 죽이는 것을 도왔다. 이 일로 헤르몰라우스는 채찍질을 당하고 말을 끌어내리는 등 공개적으로 굴욕을 당했습니다. 이로 인해 헤르몰라우스와 다른 여러 왕실 시종들은 알렉산드로스를 암살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젊은 귀족들은 체포, 고문, 심문을 받았습니다. 고문을 받는 동안 헤르몰라우스는 칼리스테네스를 알렉산더에 대한 음모의 일부로 연루시켰다. [출처: 위키백과]


군대 재편성


박트라(Bactra)로 돌아온 알렉산드로스는 인도의 왕 포로스와의 대결을 위해 군대 재편성에 착수했다. 클레이토스가 죽은 자리를 메우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일단 손을 댄 알렉 산드로스는 단지 자리를 메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기회로 유효성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재편성을 추진했다. 그는 개개인의 희망을 듣고 임무를 맡기는 지도자가 아니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중요한 역할을 맡은 기마 군단, 달리 '왕의 콤파니온'인 3,000명을 다섯으로 나누어, 제1대는 자신이 맡고, 제2대에서 제5대까지의 지휘는 각각 헤파이스티온, 크라테로스, 페르디카스(Perdiccas), 데메트리오스(Demetrios)에게 맡겼다.이 지휘관들의 면면을 보면 카지노 가입 쿠폰가 얼마나 기마 군단의 공격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다. 사실 군단 전체의 총지휘를 맡겨도 될 정도의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페르디카스와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출처 구글 이미지]

세 차례에 걸친 대전투와 그 외의 소규모 전투에서 잃은 인원수와 동방 원정 도중에 건설한 많은 기지에 방어 요원으로 남긴 인원수를 빼고 마케도니아에서 보내온 보충병을 더하면 3만 5,000~4만 명의 병력이 꾸준히 유지되었다. 이 사례도 알렉산드로스의 역량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 스스로 전체 군대를 지휘하는 것에 흥미가 없기도 했다. 군대의 규모가 커지면 움직임이 둔해진다. 또 병참의 문제도 증가한다.


그는 '주도권을 손에 쥐는 쪽이 이긴다'라고 말했다. 주도권은 숫자가 많다고 장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페르시아 황제처럼 숫자가 많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알렉산드로스는 양보다 질로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천생 그리스인이었다. 군단을 분할해 각각 책임자를 명확하게 한 것도 머릿 수로 열세인 군대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이 기본 전략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인도로 가는 길


기원전 327년당시 그리스인은 인도에 관해 전혀 몰랐다. 하지만 29세가 된 알렉산드로스에게는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다음에 할 일만 생각했고 동쪽으로 원정을 계속할 이유는 충분했다. 우선 아케메네스 왕조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다리우스 1세도 인더스강까지 원정해 강 서쪽 모두를 페르시아제국의 영토로 만들었다는 점이었다.


또한 파키스탄 북부를 지배하며 인도 왕이라고 칭하는 포로스(Poros)가 ‘가우가멜라전투’ 때 다리우스 3세가 제국 전역의 유력자들에게 참전을 요청했을 때 15마리의 코끼리를 보낸 전력이 있었다. 알렉산드로스의 논리에 따르면, 이 포로스를 굴복시키지 않는 한 옛 페르시아제국 전역을 정복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이번에도 외교적 해결을 먼저 시도했다. 하지만 그리스의 젊은이가 제시한 제안에 포로스(*키가 2미터가 넘었다고 한다)는 이렇게 대답했다. “온다면 환영한다. 다만 무기를 손에 들고 와라.” 환영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쯤 되면 알렉산드로스도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마지막 대전투가 벌어진 ‘히다스페스(Hydaspes)’로 가는 길이 열렸다.

[그리스 사절을 맞는 포로스 출처 구글 이미지]

박트라를 떠난 때는 그해 여름이었다. 출몰하는 게릴라를 퇴치하며 전진하느라 그해 겨울은 아프가니스탄의 카불에서 보냈다. 포로스가 기다리고 있는 파키스탄 북쪽으로 향한 때는 다음 해 봄이었다. 척후들이 가져온 보고를 통해 인도의 왕 포로스가 인더스강의 지류인 히다스페스강 동쪽 강변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직선거리로 따지면 동쪽으로 600킬로미터 떨어진 오늘날의 파키스탄 북부 지역이다.

[아프가니스탄 카불 출처 구글 이미지]

아프가니스탄에서 파키스탄으로 가는 행군 도중에 포로스가 지휘하는 군대 규모도 밝혀졌다. 보병이 5만 명, 기병이 6,000명이었다. 양쪽 바퀴에 낫을 단 전차가 500대, 코끼리가 200마리였다. 반면 카지노 가입 쿠폰 쪽의 병력은 보병이 4만 명, 기병이 4,000명이었다. 전차와 코끼리는 없었다.이정도 규모라면 몇 배의 페르시아 군대도 물리쳤던 알렉산드로스로서는 크게 부담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도 착오를 저질렀다. ‘가우가멜라’에서는 15마리밖에 없던 코끼리가 ‘히다스페스’에서는 200마리로 늘어난 것을 단순한 숫자의 차이 정도라고 생각한 부분이다. 게다가 포로스는 전투 경험이 많은 베테랑 코끼리들을 끌고 왔다. 200마리 베테랑 인도코끼리의 위력을 알렉산드로스가 깨달은 것은 실제로 직접 싸워본 이후의 일이었다.

마지막 대전투 '히다스페스'


기원전 326년 5월, 양쪽 군대는 히다스페스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했다. 인더스강의 지류였지만 강폭이 1킬로미터에 달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수량도 많고 유속도 빨랐다. 게다가 포로스는 강 맞은편에 200마리의 코끼리로 두꺼운 벽을 만들어놓았다.

[출처 구글 이미지]

알렉산드로스는 이 광경을 보고 생각했다. 먼저 1킬로미터 떨어진 강 건너편의 코끼리 무리가 볼 수 있는 곳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캠프라고 하지만 막사를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적에게 보이는 것이었다. 자기 군대가 적에게 들키지 않게 행동할 때도 막사를 그 위치에 그대로 두었다. 이것이 그가 실행한 첫 번째 양동작전이었다(히다스페스전투 1).


두 번째 양동작전은 강을 건너 전투를 치르기 위해서 강의 수량이 줄어드는 가을까지 전투를 미룬다는 것을 적에게 알리는 작전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가짜 도하작전을 매일 장소를 바꿔가며 지속했다. 그때마다 포로스는 자기 병사들을 소동이 벌어지는 곳으로 보내야 했다. 이 작전이 ‘가짜’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10일 정도 계속되자 포로스는 양치기의 ‘늑대가 나타났다’가 계속 되는 것처럼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심리 상태가 되었다. 한편 소동을 계속하는 동안 카지노 가입 쿠폰는 어떤 지점이 쉽게 건널 수 있는지 찾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베이스캠프에서 상류로 20킬로미터 정도 거슬러 올라간 지점이었다. 강폭도 500미터 정도로 좁았다. 게다가 강이 동쪽으로 크게 휘어져 흐르기 때문에 포로스의 본진에서 50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의 전략은 다음과 같다. 먼저 군대를 둘로 나누고 제1군은 카지노 가입 쿠폰가 거느리고 강을 건너간다. 제2군의 지휘는 크라테로스가 맡는다.크라테로스는 베이스캠프에 남아 있다가 맞은편에서 이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있는 200마리의 코끼리가 90도로 몸을 틀어서 움직이기 시작하면 눈앞의 강을 건너기 시작한다. 강을 건너면 적군의 배후에서 공격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협공에서 제1군의 임무는 처음에 먹이가 되어 적을 유인하고 전투가 본격화되면 공격의 주력이 되어야 한다. 알렉산드로스는 제1군에 기마 군단 4,000명 가운데 3,000명을 배치했다. 각 부대의 지휘관도 소년 시절의 동료라고 부를 수 있는 헤파이스티온과 페르디카스를 비롯한 젊은 세대였다. 밤이 되자 알렉산드로스의 제1군은 몰래 강을 도하했다.


알렉산드로스 군대가 강을 건넜다는 정보가 전해지자 포로스는 일단 아들이 지휘하는 기병 2,000명을 알렉산드로스에게 보냈다. 군대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전과 동일하게 맞은편에 있는 적의 동향을 감시하고, 나머지 반은 90도 각도로 방향을 전환해 알렉산드로스가 거느린 군대와의 전투에 대비했다(히다스페스전투 2). 하지만 왕의 아들이 거느린 2,000명의 기병은 곧바로 알렉산드로스에 의해 괴멸되었고, 왕의 아들도 그때 전사했다.

이제 포로스는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도 알렉산드로스가 더 빨랐다. 왕자가 지휘하던 2,000명의 기병을 괴멸시키고 곧바로 기병과 내가 ‘해병’이라고 부르는 공격용 보병이 섞인 혼성부대를 편성했다. 젊은 케노스(Kenos)에게 지휘를 맡기고 북상해오는 포로스 군대의 왼쪽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강변 일대가 늪지인 것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적의 낫이 달린 전차를 몰아넣어 무력화시키려고 했다. 실제 전투는 코끼리들의 분투라는 착오 빼고는 알렉산드로스가 생각한 그대로 전개되었다. 포로스는 차례차례 늪지로 밀려서 무력화되는 낫이 달린 전차를 보면서, 강변에 남아 있는 나머지 군대를 모두 동원해 싸울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에서 코끼리들이 한 무리가 되어 전진할 때 코끼리의 위력은 충분히 발휘된다. 처음에는 절반이, 나중에는 나머지 절반까지 합류한 코끼리 군단은 무리를 이루지 못했다. 그사이에 크로테로스가 지휘하는 제2군이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포위해서 괴멸시키는 작전이 시작되었다(히다스페스전투 3). 하지만 그러나 전쟁터에 익숙한 베테랑 코끼리들은 포위를 당해도 기가 꺾이지 않았다.

[출처 구글 이미지]

카지노 가입 쿠폰도 여러 곳에 상처를 입었지만, 코끼리 위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던 포로스도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던진 창과 화살로 집중 공격을 당해 출혈 과다로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래도 포로스는 달아나지 않았다.피투성이가 된 주인을 코끼리를 부리는 사람보다 코끼리가 먼저 알아차렸다. 왕을 태우고 있던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보다 한층 덩치가 컸는데, 상처를 입은 주인을 아래로 내리겠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멈춰 앞발을 굽혀 땅에 댔다.


이것이 신호였다. 인도에서는 왕을 태운 코끼리가 멈추고 앞발을 굽히면 다른 코끼리도 그것을 따라하도록 훈련시켰다. 코끼리가 모두 움직임을 멈추고 앞발을 굽히면서 ‘히다스페스전투’도 끝이 났다. 전쟁터에는 마케도니아 군대의 화살과 창에 쓰러진 인도 병사들의 사체와, 숫자로 따지면 그 20분의 1 정도인 코끼리에 밟혀 죽은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

응급치료가 끝난 다음 알렉산드로스는 처음으로 포로스와 대면했다. 젊은 왕이 포로스에게 말했다.

“어떤 대우를 원하는가?”

누운 채로 포로스가 대답했다.

“죽이든 살리든 왕으로서 대우해달라.”


알렉산드로스는 포로스를 왕으로 대우했다. 몸값을 받지 않고 석방했으며, 살아 있는 그의 병사도 모두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또한 그의 영토도 모두 돌려주었다. 이렇게 되자 인도의 왕 포로스는 앞으로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황제인 알렉산드로스와 동맹 관계를 맺겠다고 약속하며, 그 보답으로 알렉산드로스가 갠지스강까지 인도를 횡단할 마음이 있다면, 병사와 코끼리 그리고 안내자까지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히다스페스’에서 애마인 부케팔로스를 잃고 말았다. 모든 전장을 같이 누볐던 부케팔로스의 죽음은 애도로 끝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는 전투가 이루어진 땅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결심했다. 그 도시는 평소처럼 ‘지방의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고 ‘부케팔리아(Bucephalia)’라는 이름을 붙였다.

[포이팅거 지도에 나오는 부케팔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종군을 거부하다


젊은 왕은 애마의 죽음을 언제까지고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과 마주해야 했다. 포로스가 인도 횡단을 돕겠다고 제안한 사실을 안 병사들이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이 돌연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에 돌입한 병사들을 대표해 알렉산드로스를 찾아온 사람은 케노스였다. 그는 ‘히다스페스’ 전투에서의 활약으로 병사들 사이에서 평판이 높아져 있었다.


케노스가 알렉산드로스에게 병사들의 뜻을 전했다.

“우리는 당신의 뒤를 따라왔습니다. 헬레스폰토스해협을 건너고 벌써 8년이 지났습니다. 8년 동안 계속 전투를 했습니다. 이제 저희도 지쳤습니다. 더 이상 동쪽으로 가는 건 피곤한 일입니다.”

종군을 거부하겠다는 의사 표시였다. 하지만 젊은 왕은 싫다거나 페르시아인 병사로 교체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일리아스』의 아킬레우스의 흉내를 내듯 분노의 표시로 3일 동안 막사에 틀어박혀 있었지만 이번에는 병사들은 반성은커녕 강경한 태도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나흘째 아침, 알렉산드로스는 모여 있는 병사들을 향해 말했다.

“너희는 어떤 전투도 어떤 적의 장수도 해내지 못한 일을 나에게 하도록 만들었다. 좋다. 돌아가고 싶다는 너희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


병사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일었다. 원하던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들은 수읽기가 부족했다. 왕은 돌아가는 것에 오케이 사인을 냈지만 그 뒤에 이렇게 말했다.

“다만 돌아간다고 해도 어디를 거쳐서 갈지는 내가 결정한다.”


마케도니아의 젊은이는 자기 발로 디딘 최초의 동쪽 땅에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봉헌하는 화려한 비석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병사들도 이 공사에는 기쁜 마음으로 동참했다. 귀향하기 전 왕이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를 남기려 한다고 생각했다.


인더스강


알렉산드로스는 인더스강을 따라 남쪽으로 행군하겠다고 말했다. 왔던 길로 돌아간다면 서쪽으로 2개월만 행군하면 충분히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반면 남쪽으로 가면 크게 우회하기 때문에 1년 이상 걸렸다. 돌아가는 것만 생각했던 병사들과 달리 알렉산드로스는 돌아가는 것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인더스강을 따라 하류를 향해 행군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파키스탄 남부인 이 일대는 또 다른 인도인 왕의 영지였다. 포로스와 친족 관계였던 이 왕은 영지 내로 들어온 카지노 가입 쿠폰의 군대를 침략자로 단정 짓고 철저한 항전으로 맞섰다. 성벽을 사이에 둔 공성전은 처음 생각한 것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알렉산드로스가 평소처럼 성벽 바로 아래까지 가서 최전방에서 싸웠다. 그 순간 성벽 위에서 날아온 화살이 알렉산드로스의 가슴에 명중했다. 하얀 깃털 장식을 단 사람은 알렉산드로스 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과녁 삼아 쏜 것이다. 쓰러진 채로 움직이지 않는 그의 가슴에 화살이 깊이 박혀 있었고 얼굴은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왕이 들것에 실려 가는 모습을 본 병사들은 복수심에 불탔다. 누구 하나 총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지만 전원 공격에 나섰다. 왕이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부족장에 불과한 사람의 도시는 복수의 일념으로 불타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의 총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이제까지 카지노 가입 쿠폰는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지만 이번만큼 중상은 아니었다. 의식은 돌아왔으나 아직 몽롱한 상태였다. 많은 출혈로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침상에 엎드린 채 말할 기력도 없었다. 누가 보아도 중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결국 카지노 가입 쿠폰는 다시 일어섰다.


미지의 땅을 탐색하다


기원전 325년이 되자 회복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 카지노 가입 쿠폰가 어디를 어떻게 거쳐서 갈지 구체적인 계획을 밝혔다. 우선 4만 명이 넘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제1군은 연장자로 구성된 2만 명으로 크라테로스가 거느리고 서쪽으로 간다. 최초 목적지는 제패 도중에 카지노 가입 쿠폰가 건설한 도시 ‘알렉산드리아 아라코시아(Alexandria Arachosia)’로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 해당한다.


제2군은 알렉산드로스가 지휘했다. 모두 1만 명의 젊은 세대로 구성되었다. 제2군은 탐험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한 행군을 할 예정이었다. 오늘날의 파키스탄 남쪽에서 이란 남쪽으로 들어가 호르무즈해협 근처에서 제1군과 합류한 다음 페르시아만을 왼쪽으로 바라보면서 북동쪽으로 올라간 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드는 것을 보고 수사로 가는 여정이었다.


셋으로 나뉜 마지막 군대는 나머지 병사와 기술자 그룹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좋을 제3군. 이 군대의 지휘는 크레타섬 출신인 네아르코스(Nearchos)가 맡았다. 제3군을 네아르코스에게 맡긴 것은 형태적으로는 제2군과 평행하는 길이지만 인도양에서 페르시아만으로 들어가 그곳을 북상하는 바닷길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밟지 않았던 그 땅에 ‘지방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계속 건설했다. 뒤에 올 사람들을 위한, 이를테면 선행 투자와 같은 것이었지만 그 효과는 그가 죽은 뒤에 비로소 실증되었다.


탐험 여행이라 예상치 못한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중 하나는 사막지대에서 길을 잃고 만 것이다. 마실 물도 충분하게 준비하지 못했다.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알렉산드로스는 나름대로 계획을 세워 곧바로 실행했다. 알렉산드로스를 포함한 모든 병사가 말에서 내렸다. 말에는 그때까지 보병들이 짊어지고 왔던 짐을 전부 실었다. 이렇게 해서 모두 보병이 되어 갈증을 참으며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도 결국 미지의 땅인 파키스탄 남쪽 해안에서 이란의 남쪽 해안까지 주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 또한 유럽인 최초의 모험이었다.고통이 끊이지 않는 여행이었지만 희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수사에 도착한 시기는 봄이 한창일 때였다. 기원전 334년에 헬레스폰토스해협을 건너며 시작된 ‘동방 원정’은 10년이 지난 이 해에 마침내 막을 내렸다. 카지노 가입 쿠폰는 31세가 되었다.


패배자를 동화시켜 이루려고 했던 민족 융합의 꿈


6년 만에 쾌적한 생활환경을 누릴 수 있는 문명도시 수사로 귀환했다. 병사들은 휴가를 만끽했지만 31세의 알렉산드로스 그렇지 못했다. 그는 우두머리였다. 긴급하게 해결해야 할 문제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여한 임무에서 크게 일탈한 페르시아인 고관에 대한 처리 문제였다. 부정 축재의 장본인은 그리스까지 달아났지만 알렉산드로스가 보낸 추격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봄이 한창인 수사에서 그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대한 이벤트를 진행했다. 1만 명의 마케도니아 병사와 1만 명의 페르시아 처녀의 합동결혼식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합동결혼식에서도 선두에 섰다. 다리우스 3세에게 두 딸이 있었는데, 일렉산드로스는 장녀와 결혼했다. 차녀는 헤파이스티온과 결혼했다. 2인자인 크라테로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추격을 견디지 못한 아군에게 살해된 소그디아나 지방의 ‘사프라트’ 스피타메네스의 딸과 결혼했다.*

* 다른 자료에는 다리우스 3세의 형제인 옥사트레스(Oxatres)의 딸인 아마스트리스(Amastris) 공주와 결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수사의 합동 결혼식 출처 구글 이미지]

알렉산드로스는 이미 록사네와 결혼했고, 마케도니아 장병들도 동방 원정을 떠날 때 고국에 두고 온 아내가 있었지만 알렉산드로스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패배자의 동화와 이를 통한 민족 융합이야말로 가장 큰 정치적 전략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중 결혼이었다.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건 페르시아 처녀와 결혼한 마케도니아 장병에게 그가 한 말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때 아내뿐만 아니라 그사이에 태어난 아이도 페르시아에 남겨두고 가라. 남자아이라면 마케도니아식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인은 다른 민족을 바르바로이(Barbaroi), 즉 야만족이라고 부르며 차별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조차 승리한 그리스인은 지배자이고 패배한 야만족은 피지배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이다. 알렉산드로스는 패배자 동화를 통한 민족 융합을 통해 이런 차별을 철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죽고나서 그의 생각을 이어나갈 계승자가 없었다.


마음의 친구가 죽다


얼마 전부터 늘 알렉산드로스의 옆에 있던 헤파이스티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렉산드로스가 병으로 쓰러진 친구의 병문안을 갔을 때 헤파이스티온은 큰 병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때는 큰 병으로 보이지 않았다.


가을이 깊어진 어느 날, 평소처럼 페르시아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고 있을 때 한 마케도니아 병사가 숨을 헐떡거리며 알렉산드로스에게 달려왔다. 그는 헤파이스티온의 병세가 급격하게 나빠졌다고 보고했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헤파이스티온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친구의 유해에 매달려 울부짖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와 헤파이스티온 출처 구글 이미지]

사흘 낮 사흘 밤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바닥 모를 깊고 어두운 비애 속을 떠돌아다녔다. 소년 시절 알렉산드로스와 헤파이스티온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두 제자를 이렇게 평가했다. 하나의 마음이 두 개의 육체로 갈라져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음의 절반을 잃고 만 것이다. 소년 시절부터 늘 옆에 있던 둘도 없는 단짝을 잃었다.


알렉산드로스가 했던 일 가운데 하나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바치는 제사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자리에서 사람들이 앞에 있었지만 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이라는 의무 때문에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신들 가운데서도 아스클레피오스는 내게 조금도 행복을 주지 않았다. 나에게서 이렇게 빨리 헤파이스티온을 빼앗아간 것만큼 아스클레피오스의 태만을 보여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서방 원정을 꿈꾸며


해가 바뀌어 기원전 323년이 되었다. 주변에서 보기에 알렉산드로스는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장수들을 모두 소집해 다음 원정을 위한 작전 회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1차 목표는 아라비아반도의 정복이었다. 32세의 젊은 왕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육지와 해상을 통한 삼면 공략을 생각한 듯하다. 육군의 제1군을 크라테로스가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북쪽에서 아라비아반도로 공격해 들어간다.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제2군은 페르시아만을 조금 내려간 지점에서 반도의 내륙부로 공략해 들어간다. 아라비아반도의 내륙부가 넓은 사막지대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처럼 보이지만 사막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네아르코스는 해군을 거느리고 페르시아만을 남하해 아라비아 반도를 돌아 홍해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는 임무를 맡았다. 이렇게 알렉산드로스가 명령한 바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네아르코스는 오늘날의 파키스탄 남해안에서 오늘날의 이란 남해안까지 페르시아만을 항해한 개척자가 되었다. 이를 통해 아라비아반도에서 홍해에 이르는 항로의 개척도 이루어졌다.


9년 전에 성취한 이집트 제패로 오늘날의 이집트에 더해서 키레나이카(Cyrenaica)라고 불리는 리비아 동부까지 카지노 가입 쿠폰의 지배 아래 들어왔다. 이 리비아의 서부는 오늘날의 튀니지를 거쳐 알제리까지 펼쳐진 넓은 지역으로 지중해 세계의 서쪽에서 최고의 강국인 카르타고의 영토와 인접한 지역이었다.

[리비아 키레네 출처 구글 이미지]

32세가 된 알렉산드로스의 머릿속은 여전히 포부가 장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원정 계획이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인더스강까지 갔던 ‘동방 원정’이 병사들의 종군 거부로 불가능해지자 방향을 바꾼 것이 ‘서방 원정’이었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를 따르는 장병들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아무튼 바빌론에 군대 전체가 집결하는 시기는 4월, 바빌론에서 출발하는 시기는 5월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출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알렉산드로스는 장수들과 회의를 하다가 갑자기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날부터 일어났다가 눕기를 되풀이했다. 현대의 연구자들은 말라리아에 걸렸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말라리아라면 32세의 체력으로 충분히 회복할 수 있지만 이미 알렉산드로스는 체력을 많이 소진한 상태였다.


마지막 이별


죽을 날이 다가온 것을 감지한 알렉산드로스는 침대를 정원에 옮겨 놓고 장수들 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싸워온 알렉산드로스와 병사들 모두와 마지막 이별을 했다. 마지막 이별을 한 뒤에도 누구 하나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 정원에 머물러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지막 병사 하나까지 말없이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틀이 지난 밤에 알렉산드로스는 세상을 떠났다. 기원전 323년 6월 10일, 33번째 생일을 한 달 앞둔 날이었다.


왕이 죽은 뒤 알렉산드로스 아래에서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사람들, 대부분 알렉산드로스 군대의 사령관이었던 사람들은 일단 한 가지 사실에 모두 합의했다. 서쪽을 제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서방 원정’을 백지화하기로 결정했다.


헬레니즘 세계


'보다 뛰어난 자에게'


알렉산드로스는 일반적인 의미의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과 마지막 작별을 끝낸 뒤부터 일어나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왕의 방에 모인 장수들이 침대에 누워 있는 알렉산드로스에게 물었다.
“이 제국은 누구에게 맡길 생각이신지요?”


고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는 고통스러운 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보다 뛰어난 자에게.”


트라키아 반도 카르디아 출신인 에우메네스와 크레타섬 출신인 네아르코스(해군 지휘, 은퇴 후 탐사가로 활동)를 제외한 5명(크라테로스, 페르디카스, 리시마코스, 셀루오코스, 프톨레마이우스)은 연구자들도 ‘가출 동료’ ‘함께 공부한 동문’이라고 부를 정도로 어렸을 때부터 카지노 가입 쿠폰와 같이 성장하고 뜻을 같이 한 동지들이었다. 이 5명과 외국인 트라키아와 크레타 출신인 2명을 더한 7명이 참된 의미에서 카지노 가입 쿠폰의 부하 ‘장수’였다.

[에우메네스, 네아르코스, 리시마코스 출처 구글 이미지]



후계자 쟁탈전


이렇게 ‘디아도코이(Diadochoi, 후계자)’끼리 다툼이 시작되었다. 카지노 가입 쿠폰의 죽음 직후부터 시작해 기원전 270년대까지는 실로 반세기에 걸쳐 동료끼리 다툼이 일어났다. 이 모습만 보아도 후계자 가운데 누구 하나 ‘결정적인 무엇인가’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후계자 쟁탈전에는 부왕 필리포스의 세대에 속한 연장자 두 사람까지 가담했기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껍질을 벗고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에피고넨(epigonen, 추종자)’이라고 불리는 자의 자식에게 계승되면서 후계자 쟁탈전이 반세기 동안 이어졌는데, 이것이 첫 번째 요인이다.

[알렉산드로스 사후 분할된 영토, 셀레우코스(노란색), 리시마코스(오렌지), 카산드로스(그린), 프톨레마이우스(보라색)]

7명 가운데 하나는 곧바로 전투 중에 죽었고, 다른 하나는 부하에게 배신을 당해 살해되었으며, 세 번째는 전투에서 패해 감옥 안에서 죽었다. 네 번째도 전투 중에 죽었다. 7명 가운데 네아르코스만 죽은 왕을 따르듯 일찌감치 후계자 쟁탈전에서 벗어나 은퇴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은 셀레우코스와 프톨레마이오스 둘뿐이다. 이들은 시리아에서 셀레우코스 왕조를 세우고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세울 수 있었다.


[올림피아스와 카지노 가입 쿠폰 4세를 살해하는 카산드로스 출처 구글 이미지]

프톨레마이우스


프톨레마이오스는 동료들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는 사이에 알렉산드로스의 유해를 이집트로 가져가 그곳에 매장하는 정치적인 영악함도 보였다.참된 의미에서 죽은 왕의 뒤를 계승한 사람이 자신이라는 ‘정통성’을 손에 넣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현실주의자답게 곧바로 자신의 왕국이 된 이집트의 존속을 위해 움직였다. 아들을 2대 왕으로 삼은 뒤 은퇴했고 나중에는 알렉산드로스의 언행록과 같은 것을 써서 남겼다.


2004년에 나온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Alexander’는 알렉산드로스 사후 40년 후 그의 전기를 쓰고 있는 프톨레마이우스의 알렉산드로스에 대한 회상을 더듬어 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영화 ‘Alexander’ 출처 구글 이미지]

셀레우코스


반세기에 걸쳐 후계자 다툼이 진행되고 있을 때 티그리스강 동쪽에서 조금씩 마케도니아에 맞선 이반이 시작되고 있었다. 먼저 당시 인도라고 불렸던 오늘날의 파키스탄이 떨어져나갔다. 다음으로 오늘날의 ‘중앙아시아’로 일괄해서 부르는 아프가니스탄과 그 북쪽에 있는 여러 부족들이 등을 돌렸다.


이런 경향을 걱정한 사람이 셀레우코스였다. 하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도 후계자 다툼을 벌이는 사람이었다. 지중해와 가까운 땅에 안티오키아(Antiokeia)를 세우고 수도로 삼은 것을 보면 그의 관심이 지중해, 곧 유럽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원전 281년 셀레우코스의 최대 영토 출처 구글 이미지]

알렉산드로스의 제국은 나눠지기는 했지만 낱낱이 흩어지지는 않았다. 이것이 ‘헬레니즘 세계’가 되었고, 로마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200년 동안 지중해의 동쪽을 지배한 ‘헬레니즘 시대’가 이어졌다. 왜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카지노 가입 쿠폰가 남긴 것


우선, 알렉산드로스의 등장에 따른 정치적 안정을 꼽아야 할 것이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그리스에서는 민주정에 대한 정치 항쟁이 자취를 감추고 폭군만 아니라면 왕정도 좋다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알렉산드로스를 통해 그때까지 국가와 민족을 나누고 있던 장벽이 무너졌다.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 중에 ‘○○지방의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이 붙은 도시를 건설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그 수가 25~70곳에 이른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그저 알렉산드로스 자신의 이름을 날리기 위해 새롭게 세운 도시가 아니다. 제패한 지방을 확보하려면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건설한 도시이다.


‘헬레니즘 세계’가 해체되지 않은 요인으로는 그리스어가 지중해 세계의 공통어가 되었다는 사실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알렉산드로스에 의한 제패를 통해 ‘코이네(Koine)’라고 불리는 그리스어가 국제어가 되었다. ‘코이네’는 지중해 서쪽까지 확산되었기 때문에 고대사회의 공용어가 되었다. 그리스의 상인들은 어디를 가든, 상대가 페르시아인이든 카르타고인이든 로마인이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 알파벳 출처 구글 이미지]

카지노 가입 쿠폰가 생각한 거대 경제권의 2대 기지 가운데 하나는 지중해와 면해 있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였고, 다른 하나는 페르시아만으로 출입하기 쉬운 바빌론이었다. 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알렉산드로스의 머릿속을 메우고 있는 생각은 페르시아 항에서 아라비아반도를 돌아 홍해를 북상해 그곳에서 이집트에 이르는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후계자들은 바빌론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이 구상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러나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그때까지 에게해의 항구도시 피레우스와 일체화한 아테네를 대신해 지중해 최대의 경제도시가 되었다.사람들이 자유롭게 교류하고 각 지방의 물산도 널리 유통되고 공용어도 있었다. 여기에 큰 전쟁도 없는 평화로운 사회가 유지되면서 학문과 예술이 자연스럽게 만개했다. 만개의 흔적으로 먼저 연구자들의 거대 거점이 된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Mouseion)’을 꼽을 수 있다.

[무세이온 가상도 출처 구글 이미지]

여기에 수집된 1만 권의 서적을 읽기 위해 동쪽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서쪽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 이르는 지역의 연구자들이 모여들었다. 페르시아인 천문학자부터 그리스 기하학자 유클리드, 시라쿠사 출신 아르키메데스까지 '무세이온'의 연구자 동료였다. 고대 과학의 최고 전성기인 기원전 3세기부터 100년 동안은 헬레니즘 시대와 완전히 중첩된다. 해부학이 태어나고, 맥박이 병세를 아는 데 중요하다는 사실이 상식이 된 것도 이 시대였다.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 출처 구글 이미지]

철학에서는 아테네로 향하는 유학생이 여전히 많았다.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미아'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리케이온'이 건재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철학도 아테네에서 헬레니즘 세계로 확대되는 시대의 흐름에 동참했다. 에피쿠로스는 사모스섬 출신 그리스인이었지만, 그와 함께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을 대표하는 제논은 페니키아인이 었다.


‘헬레니즘 세계’의 지배자는 역시 그리스인이었고, 분할된 각 왕국의 왕들도 그리스계로 이어졌다. 그렇지만 그들도 다른 민족을 배제하지 않았다. 아시아인으로 불린 오리엔트 사람들도 알렉산드로스가 바랐던 충분한 동화와 융합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사회를 안정시킬 정도의 공생은 이루었다. 이렇게 그리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거쳐 로마로 이어졌다. 이는 ‘문화와 문명의 계승’이라는 역사에서 매우 보기 드문 행복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로마시대에 제작된 지도에는 오른쪽 끝, 즉 동쪽은 인더스강으로 되어 있다. 그곳에는 로마 시대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라틴어로 ‘HIC ALEXANDER RESPONSUM ACCEPIT’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을 직역하면 ‘카지노 가입 쿠폰 여기서 신탁을 받았다’가 된다.

그때까지 1,5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서양인은 동쪽은 알렉산드로스가, 서쪽은 카이사르가 밟은 지점까지 세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그리스 쪽 한 사람과 로마 쪽 한 사람을 병행해서 쓴 평전집이다. 거기서 알렉산드로스와 카이사르는 짝이 되어 다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고대인 플루타르코스도 여행자용으로 만들어진 이 지도를 가지고 여행한 사람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들


예술을 살펴보면 조형미술에만 조명을 비추어봐도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이 보여주 는 완성도에 입이 벌어진다. 이 시대로부터 1,500년 뒤의 사람인 미켈란젤로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남아 있단 말인가 하고 한탄했는데, 이에 동감을 표할 수밖에 없다. 그리 스 미술도 아르카익(Archaic), 즉 클래식의 뒤를 이어 헬리니스틱(Hellenistic)이라고 불리는 시대가 있을 정도이며, 당시의 작품은 오늘날 각국에 있는 미술관의 보물로 인정받고 있다.



<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