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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Mar 03. 2025

중세 유럽인 이야기 (1)

카지노 쿠폰 보르자와 루크레치아 보르자

중세가 끝나고 근대로 접어드는 르네상스 시대는 극단적인 대조를 보인다. 한편으로는 셰익스피어나 미켈란젤로 같은 천재적인 예술가들이 지극히 아름다운 문학과 예술 작품들을 창조하여 우리에게 전해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쟁탈전이나 광기 어린 전제정치, 냉혹한 정치 공작을 통해 근대국가가 형성되었다. 피렌체는 가장 치열한 정치 투쟁 무대 중 하나로서, 특히 피도 눈물도 없는 체사레 보르자의 가혹한 행적은 오히려 마키아벨리의 찬탄을 불러왔다.


보르자 가문(The Borgias)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는 찬란한 문화 발전을 이루었으나 정치적으로는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특히 15세기 말 로마는 ‘신성함도 법도 없고 오직 금과 폭력이 넘쳐나는 비너스의 제국’이라는 말이 돌았다. 흔히 타락한 교황의 대명사로 통하는 알렉산데르 6세(재위 1492~1503)와 그의 아들 카지노 쿠폰(Cesare Borgia)그리고 딸 루크레치아(Lucrezia Borgia)는 이 시대 혼돈의 극단을 증언하는 사례다.


스페인 사람이었던 로드리고 보르자(Rodrigo de Borgia)의 큰 아버지가 1455년에 209대 교황 칼리스토 3세로 즉위하자 스페인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던 조카 로드리고를 불러들여 추기경 겸 교황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로드리고는 교황청 상서 부국장으로 있는 동안 막대한 재산을 끌어 모았으며 3명의 여인에게서 여러 명의 자식을 낳고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선출되었다.


로드리고는 추기경 직책을 수행할 때 반노차 카타네이(Vannozza Cattanei)라는 여인을 애첩으로 두었다. 두 사람은 조반니와 카지노 쿠폰 두 아들을 낳았고, 이어서 1480년 세 번째 아이인 딸 루크레치아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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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6세 교황과 반노차 카타네이 출처 구글 이미지]

반노차 말고도 로마 귀족 집안 출신인 줄리아 파르네세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20세가 안 된 그녀는 명목상의 남편이 있었지만 60세가 다 된 로드리고의 여인이었고, 사람들은 그녀를 뒤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불렀으며 그녀의 오빠인 알레산드로는 누이의 애인 덕택에 추기경이 되었고 후에 211대 교황 바오로 3세가 되었다.

카지노 쿠폰[보르지아 가문도 출처 구글 이미지]

카지노 쿠폰의 성장


1480년에 212대 교황 교황 식스토 4세는 체사레가 성직을 가질 수 있도록 사생아라는 오명을 벗겨주었다. 체사레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고 생애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지만 그의 가족과 문화적 배경은 거의 전적으로 스페인적이었다. 이복형인 페드로 루이스는 간디아 공작이었고 그가 초기에 받은 성직령은 모두 스페인에 있었다.


7세 때 체사레는 교황청 서기장 겸 발렌시아 성당의 참사회원으로 임명되었다. 어린 시절에 그를 가르친 가정교사는 파올로 폼필리오와 조반니 베라였는데, 이들은 둘 다 스페인의 카탈루냐 출신이었다. 체사레는 적어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 였을 뿐 아니라 놀랄 만큼 총명한 인물로 인정 받았다.


체사레는 1489년 교황령에 있는 교황청립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체류했고, 이후 3년간 페루자와 피사의 대학들에서 공식 교육을 마무리했다. 1491년 15세 때 사제 서품을 받지 않는 가운데 팜플로나의 주교가 되었고, 그리고 그 해에 팜플로나 주교의 신분으로 피렌체 공화국의 피사로 가 그곳에서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차남이자 추기경이며 후일 레오 10세로 알려진 조반니 메디치와 알게 된다.


그 뒤 1492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가 교황에 선출되자 18세에 발렌시아의 대주교(추기경)으로 선출되고 스페인 최고재판관 자격까지 부여받아 권력의 심장부에 진출했다. 성직자의 자식들은 사생아 취급을 받기에 보통 주교까지가 한계인데, 카지노 쿠폰처럼 교황의 사생아가 추기경까지 오른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다.


1493년에는 명의(名義) 성당인 산타마리아노바 교회를 맡은 추기경이 되었다. 그는 이제 아버지의 주요 참모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진정한 종교적 소명의식이 없었다. 교황청에서 그는 성직자의 의무는 지키지 않고 사냥 파티와 호색적인 간통 및 화려한 옷차림을 즐기는 인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카지노 쿠폰 보르자 출처 구글 이미지]

루크레치아의 정략 결혼


한편 딸마저 권력 추구의 도구로 삼은 로드리고는 고작 열한 살이던 루크레치아를 두 명의 에스파냐 귀족과 차례로 약혼시켰다. 상대방이 양다리를 걸친 상태라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두 약혼자는 크게 분개했다. 다음 해인 1492년, 문제의 보르자 추기경이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되면서 상황이 급변한다.


교황은 이탈리아 북부의 강국 밀라노와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루크레치아의 이전 약혼을 모두 파기하고 딸을 밀라노 공작의 조카 조반니 스포르차(Giovanni Sforza)와 결혼시켰다. 열네 살 연상인 남편과의 정략결혼이 행복할 리 없다.

[루크레치아 출처 구글 이미지]

다음 해 나폴리왕국의 왕위 계승 문제로 교황과 밀라노 공작 사이에 갈등이 벌어지면서 밀라노 공작은 프랑스 국왕과 결탁하여 나폴리로 공격해 들어가려 했고 교황은 이를 저지하려 했다. 결국 프랑스군이 로마로 공격해 들어와서 산탄젤로성에 피신해 있던 교황이 항복하고, 프랑스군이 나폴리까지 쳐들어갔다가 되돌아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난리를 겪는 동안 사위 조반니가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데다가 루크레치아에게 계속 냉랭한 태도를 보이자, 교황은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전 주요 지역을 정찰할 때 함께 동행했으며 부친의 협상에 은밀히 관여하였고, 스페인에 있던 형제 후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편지까지 보내는 등 가문의 일도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 로마로 향하는 동안 아버지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지켜봐야 했고, 결국 12월 18일 피신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군이 로마 근처에 도달했고, 로마 시민들 또한 알렉산데르 6세에게 프랑스 왕과 협상하지 않는다면 성문을 열 것이라고 통보했으나 알렉산데르 6세는 갑작스럽게 로마에 남아 샤를 8세와 협상을 했다.

샤를 8세가 산탄젤로 성과 젬 왕자를 넘기는 것과 체사레를 볼모로서 나폴리 원정으로 동행하는 무리한 조건을 걸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부자는 지하통로로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프랑스군의 포위공격으로 알렉산데르 6세는 샤를 8세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1월 28일 체사레는 프랑스군과 함께 나폴리로 향했으나 1월 30일 벨레트리에서 말구종으로 변장한 채 프랑스군 진영을 탈출해 로마로 스플레토에 있는 알렉산데르 6세에게로 돌아왔다.

카지노 쿠폰의 탈출을 알게된 샤를 8세는 경악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체사레를 내놓으라고 항의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며, 점차 두 사람 사이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비록 샤를은 나폴리에 무혈입성하여 나폴리 왕을 자칭하긴 했지만, 알렉산데르 6세의 제안에 의해 교황령을 주축으로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최초의 신성 동맹을 결성하는 한편 당시 스페인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으로 피신한 전(前) 나폴리 왕이 스페인의 지원군과 함께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샤를은 급히 프랑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샤를 8세와 1494년 이탈리아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결혼했다가 다시 결혼 무효 처분을 당해 충격을 받은 루크레치아는 수녀원에 들어가서 아예 나오려 하지 않았다. 교황은 딸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시종 페드로 칼데스(Pedro Caldes, 일명 페로토Perotto)를 보냈다. 22세의 젊은 남성 시종이 18세의 이혼녀와 자주 만나 인생 상담을 하다 보니 뜻하지 않게 두 사람의 관계가 뜨거워졌고, 루크레치아는 임신했다. 페로토가 목숨을 구하기 위해 교황에게 달려갔으나, 카지노 쿠폰는 단도를 쥐고 바티칸 궁을 가로질러 그를 추격하여 교황이 보는 앞에서 그를 찔렀다.


이런 막장의 상황에서 교황과 카지노 쿠폰는 다시 루크레치아를 나폴리 왕의 서자인 아라곤의 알폰소와 결혼시켰다. 이번에도 오빠 카지노 쿠폰가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재위 1498~1515)와 결탁하여 밀라노를 지배하고 더 나아가서 나폴리왕국까지 차지하려는 욕심을 품었다.


1498년 4월 4일 남편 샤를 8세가 문틀에 머리를 부딪히는 어이없는 사고로 사망했다. 당시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자로 샤를 8세와 결혼을 했던 안과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없었기 때문에, 안은 결혼 계약대로 다음 국왕인 루이 12세와 결혼해야 했다. 루이 12세는 샤를 8세의 누나인 프랑스의 잔과 이미 결혼한 상태였지만,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교섭하여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를 프랑스가 지원하는 것을 댓가로 첫 결혼이 강요된 결혼이었다는 핑계로 혼인을 무효화시키고 안과 결혼했다. 1504년 생 드니 대성당에서 두 번째 대관식이 거행됐고 안은 프랑스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이나 왕비가 된 인물이 되었다.

샤를 8세의 왕비이던 시절과는 다르게 루이 12세의 왕비로서 안은 브르타뉴 여공작의 지위를 회복했다. 안은 루이 12세와의 사이에서 두 딸 클로드와 르네를 낳았다. 브르타뉴 공작위를 차남이나 딸에게 상속하여 프랑스 왕위와 분리할 것을 보장받았고 장녀 클로드를 후계자로 삼았다. 안은 브르타뉴가 보이는 블루아 성에서 살았으며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을 지지했다.

안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장녀 클로드를 카를 대공에게 시집보내려고 했지만, 어떻게든 브르타뉴 공국을 얻어보려는 남편 루이 12세는 그녀를 프랑스 차기 왕위계승자인 앙굴렘의 프랑수아와 결혼시키려고 하였다. 브르타뉴 공국이 프랑스와 합병되는 것만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었던 안은 죽을 때까지 클로드와 프랑수아의 결혼을 반대했고 공국을 차녀 르네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루이 12세는 이러한 안의 주장을 결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은 여행을 명분으로 각국을 돌아다니며 브르타뉴 공국의 독립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생 내내 임신과 유산을 반복한 안은 매우 쇠약해졌고, 결국 1514년 1월 9일 신장 결석으로 사망했다. 유언장에는 브르타뉴 공국을 차녀 르네에게 물려주겠다고 적혀 있었는데, 루이 12세는 이를 무시하고 장녀 클로드를 브르타뉴 여공작에 임명했다. 이후 루이 12세는 클로드를 프랑수아와 결혼시켰고, 결국 프랑수아 1세가 즉위한 후 브르타뉴 공국은 영원히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루이12세와 왕비 안 드 브루타뉴 출처 구글 이미지]

카지노 쿠폰가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고 벌인다는 사실을 잘 아는 알폰소는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로마에서 도주했다. 1500년 7월 15일, 다섯 명의 자객이 길거리에서 알폰소를 공격했다. 루크레치아는 중상을 입은 남편을 간호하면서, 혹시 오빠가 또 공격해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방 앞에 호위병 16명을 배치했다. 그러나 카지노 쿠폰 앞에서는 이런 정도는 무용지물이다. 사흘 뒤 알폰소는 어느 틈엔가 누군가에 의해 목 졸려 죽은 상태로 발견되었다.


카지노 쿠폰의 야망


1498년 8월 17일 카지노 쿠폰는 추기경단에서 추기경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고, 곧 루이 12세의 특허장을 가지고 로마에 도착한 프랑스 사절로 통해 발랑스 공작이 된다. 1498년 10월 카지노 쿠폰는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그곳에 있는 나폴리 공주 카를로타와 접촉할 겸 새로운 동맹인 프랑스의 왕과 귀족, 고위 성직자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지노 쿠폰는 마르세유를 거쳐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있는 곳까지 도착해 왕과 사냥터에서 만나 이후 한동안 프랑스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카를로타와는 결혼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유명해졌으며 1499년 5월 루이 12세의 주선으로 프랑스 왕족이자 나바라 왕 호아네스 3세의 여동생인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는 2개월 동안 아내 샤를로트와 함께 있다가 그해 7월 루이 12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200기의 기병을 거느린 채 참전해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로마냐 공국


1499년 10월 체사레는 프랑스군과 함께 밀라노로 입성했고, 로마로 돌아와 교황령군 총사령관이 된 체사레는 1499년부터 1502년에 걸쳐 로마냐와 우르비노 등 수많은 지방을 정복해 로마냐 공국을 세워 통치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의 원정은 단번에 진행된 것이 아닌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첫 번째 정벌은 로마냐 지방으로 본래 교황령이었으나 아비뇽 유수를 계기로 지방 귀족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도시들이었으며, 그 도시들을 발판으로 이탈리아 전토를 통일하는 것이 알렉산데르와 카지노 쿠폰의 목표였다.

그해 11월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독이 묻힌 편지를 보낸 포를리와 이몰라의 백작부인인 카테리나 스포르차(Caterina Sforza)를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보였다. 1500년 2월 카지노 쿠폰는 일부 군사를 거느린 채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레치아의 2번째 남편이었던 비셸리에 공작 알폰소가 갑작스럽게 암살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또 다시 모든 의혹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카테리나 스포르차 출처 구글 이미지]

그해 8월에 그는 다시 군대를 몰고 내분 중인 시에나를 점령했고 그리고 여세를 몰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파문을 받은 리미니, 파엔차, 페사로를 쳤고, 수많은 용병부대 및 프랑스군으로 이루어진 12,000명을 이끌고 리미니로 진군, 리미니의 영주였던 판돌포 말라데스타는 체사레에게 항복한 후 서둘러 가족들과 함께 리미니에서 도망쳐 카지노 쿠폰의 교황군은 리미니에 무혈입성했다.


그의 2번째 목표는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첫 남편이었던 조반니 스포르차가 있던 페사로였고, 조반니는 옛 처남이 기세등등하게 페사로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싸우지도 않고 페사로에서 도망쳐, 체사레는 또 다시 리미니처럼 무혈입성했다. 그해 11월 체사레와 그의 군대는 12세의 어린 영주인 아스토레 만프레디가 지배하는 파엔차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피엔차는 다른 두 도시와는 달리 끝까지 저항하다가 1501년 4월 영주인 아스토레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아스토레 만프레디는 로마로 보내졌다. [출처 나무위키]

[출처 나무위키]

이런 상황에서 교황 가문은 루크레치아의 세 번째 결혼을 주선했다. 상대는 장래 페라라 공작이 되는 에스테의 알폰소였다. 1502년 1월, 마침내 루크레치아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 페라라로 떠났다.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로마의 악덕에서 벗어난 그녀는 마침내 행복한 삶을 되찾았다. 두 사람의 사랑의 결실로 아이도 여럿 낳았다.


카지노 쿠폰와 마키아벨리


체사레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만큼 유능한 통치자로서 단기간에 로마냐 공국을 베네치아나 밀라노 등에 맞설 만큼 키워냈다. 그의 군사적 역량을 보여주는 전술이 가장 잘 드러난 예는 로마냐 원정(1502~1503년)이었다. 1502년의 우르비노 공격은 전혀 예상 밖이었고 또한 번개처럼 신속했기 때문에 우르비노는 총 한 번 쏘아보지 못하고 항복했다. 이어서 그는 카메리노로 진격했고 이 도시도 곧 굴복했다.


체사레(Cesare)는 라틴어 카이사르(Caesar)의 이탈리아식 발음이었지만 체사레는 자신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동일시했으며, 자신의 군대의 깃발에 ‘Aut Caesar, aut nihil (카이사르이거나, 아무 것도 아니거나)’라는 글을 새겨 넣고 행군을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이 고용한 용병대장들이 자신들도 결국 토사구팽되고 영지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자(‘마조네의 난’), 카지노 쿠폰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가장 아끼던 심복 부하까지 죽여가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며 이들을 세니갈리아 성에 모아놓곤 단번에 집단 처형하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면모를 과시했다.



이 사건을 두고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카지노 쿠폰 보르자를 매우 훌륭한 통치 행위를 수행한 인물로 제시한 바 있다.

“로마냐 지방을 점령한 공작(카지노 쿠폰)은 그 지역이 예전부터 무질서가 난무하는 곳임을 알게 되었다. 이곳을 평정하기 위해 라미로 도르코Ramiro d’Orco, 혹은 Ramiro de Lorca라는 잔인하지만 유능한 인물을 파견하면서 전권을 위임했다. 그는 단기간에 질서와 평화를 회복했으며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했다. 시민들의 반감이 높아졌다는 것을 눈치챈 공작은 분위기를 무마하고자 했다. 이제껏 행해진 잔인한 조치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대리인인 라미로의 난폭한 성격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를 이용하여 어느 날 아침 공작은 두 토막이 난 라미로의 시체와 형구들, 피 묻은 칼을 광장에 전시했다. 참혹한 광경을 본 시민들은 한편으로 만족감을 느끼면서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키아벨리는 당시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증오의 대상이 된 체사레 보르자를 존경했지만 그의 결점과 한계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지노 쿠폰의 호전성과 대담성, 그리고 전쟁을 할 때는 거대한 정복 사업도 작게 보며 영광과 정복을 위해서는 피로와 위험을 마다하지 않는 점은 당시 이탈리아의 어느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던 자질로서도 마키아벨리는 카지노 쿠폰의 이러한 점을 존경했다고 한다.


[카지노 쿠폰와 마키아벨리, Federico Faruffini, 출처 구글 이미지]

카지노 쿠폰와 다빈치


1502년 7월 로마냐. 당시 분열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던 불세출의 영웅 체사레는 세기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자신의 참모로 기용했다. 체사르는 다빈치에게 모든 지역의 자유통행을 허가하고 공국내의 성채, 요새, 시설의 토목공사는 진행 중일지라도 다빈치와 협의하고 그의 지시를 따르도록 포고령을 발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의 세기의 만남은 8개월 만에 끝이 난다.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병사하자 라이벌이던 율리오 2세와 비밀협약을 맺어 콘클라베에서 그를 지지했으나, 선출된 교황 율리오 2세는 간단히 손바닥을 뒤집어버렸고, 체사레 역시 중병에 걸렸기 때문이다. 체사레 사후 다빈치는 다시는 군사 고문이 될 수 없었고 다시 예술가로 돌아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사고의 거인이라면 카지노 쿠폰 보르자는 행동의 천재다. 레오나르도가 현실을 벗어난 경지를 유유히 걸어가는 인간이라면 카지노 쿠폰는 현실의 강에 태연하게 말을 몰고 들어가는 인간이다. 그러나 이 두사람의 공통점이 하나있다. 자부심이다.” 『카지노 쿠폰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에서 시오노 나나미가 당대의 걸출한 인물이었던 두 사람을 비교한 대목이다.



카지노 쿠폰의 최후


카지노 쿠폰의 결정적인 패착은 알렉산데르 6세의 평생 숙적이었던 줄리아노 델라 로베로 추기경을 다음 교황으로 지지한 것이다. 교황군 총사령관직과 로마냐 공국을 인정받는 조건이었다. 체사레는 정치에서 배신이 밥 먹듯이 일어난다는 것을 잘 알았고 자신도 마키아벨리가 탄복할 정도로 배신을 잘했다. 그런데도 아버지로 인해 지난 11년간 고배를 마셔온 로베로 추기경이 자신 편이 될 것이라 너무 쉽게 생각했다.


새 교황 율리오 2세는 베네치아가 로마냐 지역을 공격해오자 먼저 카지노 쿠폰에게 방어책임을 맡겼다. 그러나 그가 임지로 떠나려고 하는 순간에 마음을 바꾸어 카지노 쿠폰를 체포해서 감금시켰다. 대신 교황군 사령관직과 로마냐의 방어는 율리오 2세의 조카이자 우르비노 공국의 주인인 귀도발도 델라 로메로에게 맡겼다. 카지노 쿠폰는 친구인 곤짤로 코르도바가 책임자로 있는 나폴리로 도망갔으나 다시 한 번 배반을 맛보게 된다. 율리오 2세 교황의 강요를 받은 스페인의 페르디난드 왕의 지시로 스페인으로 이송되어 감금되었다.


카지노 쿠폰는 2년만에 탈옥해 처남인 호아네스 3세가 통치 중인 나바라 왕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나바라 왕국의 총사령관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1507년 31살 나이에 나바라의 친스페인 세력인 루이 드 뷰몽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던 도중 전장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적진을 향해 돌격하다가 말에서 떨어지고, 적병들에게 포위당해 최후를 맞았다.


루크레치아의 말년


카지노 쿠폰의 피사 대학 동급생 중에 '조반니 데 메디치'라는 친구는 카지노 쿠폰가 죽은 후에 217대 교황 레오 10세가 되었다. 페라라에 시집 온 루크레치아는 체사레가 죽고 12년을 더 살아 1519년에 죽는데, 죽기 전에 그녀는 페라라 대사를 통해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낸다.

'저는 두 달 전부터 몹시 고통스러운 임신 기간을 보내왔지만, 신의 도움으로 14일 새벽에 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 건강도 회복될 거라고 기대했는데, 회복되기는커녕 점점 나빠질 뿐입니다. 우리의 조물주께서는 이미 저에게 딸이라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종말을 알고 있으며 몇 시간 뒤에는 이미 제 인생 밖에 있을 거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고해도 영성체도 끝난 지금, 그리스도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비록 죄 많은 몸이지만 교황 성하께 애원하고자 합니다. 교황 성하의 자비로움으로 제 가난한 마음에 정신의 보석을 주십시오. 성하의 성스러운 축복과 함께 저를 위해 신에게 대신 기도해 주십시 오. 그리고 뒤에 남겨두고 가야 할 제 남편과 아이들에게 신의 가호와 함께 성하의 너그러운 자애를 베풀어 주시기를..


루크레치아는 39세의 나이로 열한 번째 아이를 낳던 도중 사망했다. 루크레치아가 죽음을 앞 둔 상태에서 간절하게 남편과 아이들을 부탁했는데도 2년이 안되어 교황은 페라라에 선전포고를 했다. 후대의 문학 작품과 영화, 드라마는 루크레치아를 타락한 모략가, 살인을 행하는 요부, 근친상간녀 등 악마적인 캐릭터로 각색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잔혹한 운명의 희생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보르지아 가문 이야기를 다룬 BBC 드라마와 미드 출처 구글 이미지]

카지노 쿠폰에 대한 평가


카지노 쿠폰 보르자는 놀랄 만큼 대조적인 면을 많이 가진 사람이었다. 마키아벨리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는 때로는 과묵해서 속마음조차 드러내지 않지만 수다스러운 허풍장이일 때도 있었다. 신들린 듯한 활동력이 폭발할 때는 밤새도록 작전을 짜고 지시를 내리곤 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나태함에 빠져 있을 때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고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빈둥거렸다.


그는 걸핏하면 화를 내고 측근들한테 다소 냉정하게 대했지만 백성들한테는 매우 관대했고 현지 주민의 운동 경기에 참가해 씩씩하고 멋진 모습으로 두각을 나타내기를 좋아했다. 당시 이탈리아에 그가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 영향은 주로 교황의 돈과 프랑스 군대의 지원 덕분이었다. 그는 분명 정치적·군사적 책략의 명수였으며, 그가 그토록 두드러진 성공을 거두고 이탈리아 전역에서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은 그가 겉 다르고 속 다른 이중성과 대담성을 겸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사레는 이탈리아의 중앙집권 정부를 구상하고 있었으나 그의 후광이었던 알렉산데르 6세가 죽자 그의 모든 꿈이 끝났다. 마키아벨리가 이상적 전제군주의 모델로 그를 꼽은 것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의 지지자가 되어 카지노 쿠폰의 성채들을 점검하는 조사관으로 잠시 일했던 사실이 젊은 나이에 죽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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