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지음
제9장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 충성심의 딜레마
(What Do We Owe One Another?: Dilemmas of Loyalty)
사과의 말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한 나라를 대표해 공개적으로 사과의 말을 하기란 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최근 수십 년은 과거 역사의 부당 행위를 공개적으로 사과카지노 게임 사이트 문제를 둘러싸고 고뇌에 찬 주장들이 빈발했던 시기였다.
사과와 손해 배상
독일은 2차 대전에서의 유대인 대학살 책임을 인정하고, 생존자와 이스라엘에 수백억 달러 상당의 배상금을 지급했으며, 여러 해에 걸쳐 독일 정치 지도자들은 나치의 만행을 공개 사과했다.
1951년 하원 연설에서, 콘라트 아데나워(Konrad Adenauer)독일 수상은 “독일 국민의 절대다수는 유대인을 상대로 한 범죄를 혐오하고 그 범죄에 동참하지 않았다. 하지만 입에 담기도 어려운 범죄가 독일 국민의 이름으로 저질러졌기에, 그에 대한 도덕적, 물질적 배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에 반해 일본은 전쟁 때 저지른 만행을 사과카지노 게임 사이트 데 미온적이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일본군은 한국 등 여러 아시아 국가의 여성과 소녀들 수만 명을 강제로 끌고 가 매매춘을 시키고 일본군의 성 노예로 삼았다.
2007년 아베 신조일본 총리는 그 책임이 일본군에게 없다고 주장했고, 그러자 미국 의회는 일본 정부에게 사과할 것을 촉구카지노 게임 사이트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또 다른 사과 논란은 토착민에 대한 부당한 역사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1910년대부터 1970년대 초까지, 피가 섞인 호주 원주민 아이들(어머니는 대개 원주민이고 아버지는 백인)은 강제로 부모와 떨어져 백인 수양부모 가정이나 정착촌에서 살아야 했다.
이 유괴행위는 영화 <토끼 울타리(Rabbit-Proof Fence)(2002)에 잘 묘사되어 있다. 이 영화는 1931년에 정착촌을 탈출하여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는 부모를 찾아가는 세 여자아이의 이야기다. 2008년 케빈 러드 총리는 호주 원주민에게 공식 사과를 발표했다(아래 <지리의 힘 오스트레일리아편 참조).
미국에서도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계 미국인들을 미국 서해안 수용소에 억류했던 일을 공식 사과카지노 게임 사이트 법에 서명했다.
가장 크게 대두되는 사과 문제는 노예제 유산에 관한 사안일 것이다. 남북 전쟁 후 정부는 해방된 노예에게 "땅 40에이커(160제곱킬로미터)와 노새 한 마리"를 약속했지만,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후 2007년에 버지니아 주가 제일 먼저 사과를 했고, 2008년에는 미국 하원이 노예제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진 인종 차별 정책인 ‘짐 크로법'(Jim Crow laws)에 대해 흑인들에게 사과카지노 게임 사이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공개 사과를 정당화카지노 게임 사이트 주요 근거는, 정치 공동체에 의해(혹은 그 이름 아래) 부당하게 고통받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 부당함이 희생자와 후손에게 미치는 지속적인 영향을 인식하며, 부당 행위를 저지른 사람이나 그것을 막지 못한 사람들의 잘못을 배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할까?
이러한 사과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원칙적은 논리는, 앞선 세대가 저지른 잘못을 현세대가 사과할 필요는 없으며, 사과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사과한다는 것은 결국 부당 행위에 일부 책임을 떠맡는다는 것이다. 내가 하지 않은 행위를 내가 사과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일어난 일을 내가 어떻게 사과할 수 있단 말인가?
도덕적 개인주의
공식 사과에 대한 원칙적인 반박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태도는 문제를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 우리는 이 개념을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내 책임은 내가 스스로 떠맡은 의무만으로 제한된다는 생각은 자유주의적인 사고다. 이 사고방식에 따르면, 도덕적 행위자인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이며, 기존 도덕의 속박을 받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하는 자아의 초기 개념은 존 로크로부터 나왔다.합법 정부는 합의에 근거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우리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지, 아버지의 권위나 왕의 권력에 구속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한 세기가 지나 이마누엘 칸트는 선택하는 자아의 더욱 강력한 개념을 제시했다.자유롭다는 것은 자율적이라는 의미이고, 자율적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 부여한 법칙에 지배된다는 의미이다.
20세기에는 존 롤스가 칸트의 자율적 자아 개념을 수용해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정의론을 이끌어 냈다.그는 우리의 특정한 이해관계와 이점이 사라진 무지의 장막 뒤에서 선택해야 할 경우 어떤 정의의 원칙에 동의하겠는지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칸트와 롤스의 생각에는, 특정한 목적이나 애착에 구속되지 않은 도덕적 행위자를 생각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는 지금 세상에서 자신의 지위나 위치를 만든 역할이나 정체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정의를 생각하는 데 있어서, 만약 특정한 정체성을 배제해야 한다면, 오늘날 독일인이 유대인 대학살을 배상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거나, 현세대 미국인이 노예제나 인종 차별 정책의 잘못을 배상해야 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우리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독립적 존재라는 개념은,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이 특정 도덕이나 종교적 사고에 기반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지지한다. 대신 좋은 삶을 규정카지노 게임 사이트 여러 시각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정부는 도덕적 중립을 지켜야 카지노 게임 사이트가?
정부는 좋은 삶의 의미를 판단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고대의 정치 개념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는 좋은 인격을 기르게 하고 좋은 시민이 되도록 카지노 게임 사이트 데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이성적인 법의 본질[을 조사하기] 전에, 가장 바람직한 삶의 본질부터 밝혀내야 한다. 그것이 불분명하면, 이상적인 법의 본질 또한 불분명할 수밖에 없다."
반면 칸트와 롤스는 좋은 삶에 대해 종교적으로든 세속적으로든 특정 개념을 강조하는 정의 이론은 자유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론은 타인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인간을 목표를 선택할 능력이 있는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존중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중립적인 국가가 유리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특정한 선(공리주의자는 쾌락 또는 복지 극대화,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성을 실현하고 인간 고유의 능력을 계발하는 것) 관념을 주장하면서 이로부터 권리를 도출하는 정의 이론을 비판한다.
두 사람은 이러한 추론법을 거부하면서 권리가 선보다 앞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의무와 권리를 정하는 원칙이 좋은 삶에 대한 어떠한 특정 관념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정의와 자유
권리가 선보다 앞선다는 주장에 대한 논쟁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유의 의미에 관한 논쟁이다. 권리가 선에 앞선다는 롤스의 주장은 "도덕적인 사람은 스스로 선택한 목적의 주체다"라는 신념을 반영한다.
정의는 좋은 삶을 단정하지 말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은 인간을 도덕적 선입견에 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택할 권리를 지닌 자아로 본다는 사고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생각들이 근대 자유주의 정치사고의 특징이다.
미국의 정치적 논쟁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중립을 지키는 국가와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자아라는 이상이 정치권 양 진영에서 모두 발견된다는 사실이다.
즉 정부와 시장의 역할에 대한 논쟁의 대부분은 어떤 방법으로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다.
평등주의적 자유주의자들은 시민의 자유와 사회적, 경제적 기본권(의료, 교육, 고용, 수입 안정성 등)을 강조한다.이들은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할 수 있도록 하려면 정부는 진정한 선택의 자유를 가능케 카지노 게임 사이트 물질적 조건을 확보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자들(흔히 보수주의자로 불린다)도 나름대로 개인의 선택을 존중카지노 게임 사이트 중립 국가를주장한다(로버트 노직).이들이 볼 때, 중립적인 국가는 시민의 자유와 사유 재산권을 엄격히 보호카지노 게임 사이트 정부를 필요로 한다.이들은 복지제도가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할 자유를 주지 않고, 다른 사람의 선을 강요한다고 주장한다.
이 둘 모두에게 중립을 지향카지노 게임 사이트 정의론은 다원화된 사회에서 자주 나타나는 도덕적・종교적 논쟁에 정치와 법이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그러나 샌델은 선택의 자유는 (공정한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의 자유도) 정의로운 사회의 기초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또한 본질적인 도덕 문제를 다루지 않고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다. 설령 가능하다 해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왜 그런지 살펴보자.
공동체의 요구
자유주의자들의 자유 개념으로는 우리가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칭찬하기까지 하는 다양한 도덕적, 정치적 의무(여기에는 연대와 충성의 의무, 역사적 기억과 종교적 신념에 관한 의무가 포함된다)를 이해할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한 공동체와 전통으로부터 생겨난 도덕이다.
롤스의 《정의론》이 미국의 자유주의에 풍부한 철학적 영감을 제공한 지 10년이 지난 1980년대에, 샌델을 포함해 몇몇 비판자들이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unencumberred) 자아'라는 롤스의 이상에 도전했다.
그들은 우리가 목적과 애착으로부터 벗어나 정의에 대해 추론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공동체주의적’비판가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가능하단 말일까? 어떻게 우리를 소속된 존재이자 자유로운 자아로 볼 수 있겠는가?
이야기카지노 게임 사이트 존재로서의 인간 -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이 문제에 매우 강력한 답을 제시한다. 그는 《덕의 상실(After Virtue)》(1981)이란 책을 통해,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 목적과 목표에 도달카지노 게임 사이트 방법을 설명한다.
삶을 살아가는 과정은 어떤 통합이나 일관성을 염원하는 서사적 탐색을 해나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서 갈림길에 마주쳤을 때, 나는 내 삶의 전반에 가장 적합하고 마음이 가는 길을 찾아내려 애쓴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의 행사라기보다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카지노 게임 사이트 것에 가깝다. 여기에는 선택이 포함되지만, 그것은 해석에서 나오는 선택이지 의지의 주권적 행위가 아니다.
때로는 내 앞에 놓인 길 가운데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가 나보다 남에게 더 확실히 보일 수도 있다. 나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본 친구가 나 자신보다 나를 더 잘 알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나는 개인으로만은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친숙하게 될 때만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의미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의 정체성을 지닌 자로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런저런 도시의 시민이며, 이런저런 조합 또는 전문가 집단의 일원이다. 나는 이런저런 친족, 부족, 나라에 속한다. 그러므로 내게 좋은 것은 소속 집단 사람들에게도 좋아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친족, 내 나라의 과거로부터 다양한 빚, 유산, 정당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런 것들이 내 삶의 기정사실을 구성하며 내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이는 부분적으로는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는 서사적 설명이 현대의 개인주의와 맞지 않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는 "나를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 분리 가능하다"라는 추론은 잘못이다라고 주장한다.
그의 시각은 인간을 자유로운 선택권을 지닌, 과거의 부담을 감수하지 않는 자발적 존재로 보는 시각과 확실히 대비된다. 우리는 이 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첫 번째 방법은 어느 쪽이 도덕적 사유의 경험을 더 잘 담아내고 있는지 자문해 보는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은 어느 쪽이 도덕적, 정치적 의무를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지 묻는 것이다.
합의를 넘어서는 의무
자유주의적 사고에 의하면, 의무는 오로지 두 가지, 인간이기에 생기는 보편적인 자연적 의무와 합의에 의해 생기는 자발적 의무뿐이다.
전자는 인간을 존중하고 정당하게 대우하며 잔인한 행동을 삼가는 등의 의무로서 자율적 의지(칸트) 또는 가상적 사회 계약(롤스)으로부터 생기기에, 합의라는 절차가 필요 없다.
자발적 의무는 보편적이지 않고 특수하며, 합의로부터 생겨난다. 당신 집에 페인트를 해 주기로 약속했다면 나는 그렇게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집까지 모두 페인트를 칠해줄 의무는 없다.
자유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어느 수준까지는 모든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지만, 그 이상으로는 우리가 약속한 것만 지키면 된다.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볼 것인가, 서사적 개념으로 파악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회 계약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세 번째 부류의 의무를 인정하느냐에 달렸다. 그 의무를 연대 의무 또는 구성원(membership) 의무라고 칭하자.
자연적 의무와 달리 연대 의무는 특수하며 보편적이지 않다. 그 의무에는 우리가 져야 할(엄밀히 말해서 이성적 존재가 아니라 역사를 공유하는 존재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자발적 의무와 달리, 합의에 기초하지는 않는다.
연대와 소속
아래 사례에서 도덕적 무게가 실려 있는지 생각해 보고, 그렇다면 이를 사회 계약의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는지 판단해 보자.
Case 1 가족의 의무
가장 기본적인 예는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느끼는 특수한 의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의무와 특히 자식의 부모에 대한 의무는 합의와 상호 이익을 따지는 계산으로는 이를 적절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이를 부모는 아이를 갖기로 선택했다면 특별히 사랑으로 돌보겠노라고 자발적으로 동의했다고 보거나, 부모를 돌봐야 카지노 게임 사이트 도덕적 책임은 어린 시절 자신이 부모의 보살핌을 받았으니 이를 다시 갚겠다고 합의한 셈이라는 논리는 너무 매정하게 여겨진다.
그렇다면 아이를 어떻게 키웠느냐에 따라 나중에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요구할 수 있는 책임의 정도가 달라진다고 해야 할까?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자기 부모를 보살필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도덕적 책임은 상호 이익과 합의라는 자유주의 윤리를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Case 2 프랑스 레지스탕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나치가 점령한 프랑스 지역에 대한 폭격에 나섰다. 공장과 군수 시설이 목표였지만 민간인의 희생도 불가피했다.
어느 폭격기 조종사가 명령을 받고 보니 공습 목표 지역이 자신의 고향 마을이었고, 그는 이번 임무에서 자기를 빼달라고 요청한다. 이 조종사의 태도는 정당한가? 아니면 나약한 것인가?
이 조종사는 특정인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뺐을 수 없기에 거부한 것이다. 그의 태도는 고향 마을의 일원으로서 부담을 감수하는 정체성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고, 그 행동에 나타난 인격을 존경할 수도 있다.
Case 3 에티오피아 유대인 구출 작전
1980년대 초, 에티오피아에 기근이 발생하자 약 40만 명이 이웃 나라인 수단으로 밀려들어 난민 수용소에서 근근이 생활했는데,1984년 이스라엘 정부는 ‘모세 작전’이라는 항공 수송 작전을 은밀히 감행해, ‘팔라샤(Falashas)’라고 불리는 에티오피아의 유대인 1만 4천 명을 이스라엘로 수송해 구출하였다.
이 일은 옳은 일일까? 에티오피아 난민 중에 유대인만을 골라 수송카지노 게임 사이트 행위는 불공평한 차별이 아닐까?연대 의무와 구성원 의무를 인정하는 시각으로 본다면 이 사건은 난민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를 넘어 에티오피아 유대인을 구할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애국심은 미덕일까? - 마이클 월쳐
애국심은 흔히 논란이 되는 도덕 감정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반박의 여지가 없는 미덕으로 보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복종, 쇼비니즘, 전쟁의 근원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 그 의무를 합의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애국심의 열렬한 옹호자인 장 자크 루소는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정체성은 보편적 인간성의 하나로 반드시 추가해야 할 요소라고 주장한다. 시민들이 충직함과 동질성으로 묶여있다면 외부인들보다는 서로에게 더 큰 의무를 느낀다는 것이다.
국가는 외국인에 비해 자국민에게 당연히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자국 시민에게는 전 세계인에게는 미치지 않는 특별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에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한다.
그렇지만 국가 간 불평등은 국가 공동체 주장을 복잡하게 만든다. 나라 간의 빈부의 격차가 너무 크다 보니 공동체의 요구는 평등의 요구와 긴장 관계에 있다. 이민이라는 불안정한 문제도 이 긴장을 반영한다.
국경 순찰
이민 제도 개혁 문제는 정치의 지뢰밭이다. 광범위하게 지지받는 유일한 이민 정책은 미국과 멕시코 간의 국경 지역 보안을 강화해 불법 이민자를 막는 것이다.이 일에는 텍사스 보안관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인터넷을 통해 감시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자발적으로 참여한다고 한다.
국가가 외부인의 합류를 막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민 유입 제한에 찬성하는 최선의 논리는 공동체 논리다. 마이클 월쳐(Michael Walzer)가 쓴 대로, 사회 구성원이 되는 조건을 규제하는 능력, 즉 입국 허가 및 거부 규정을 정하는 능력은 “공동체 독립의 핵심”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서로에게 특별히 헌신하고 공동의 삶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연합체인, 역사적으로 안정되고 현재 진행 중인 ‘덕성 있는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부유한 국가의 경우, 이민 유입 제한 정책은 시민의 특혜를 지키는 데도 기여한다. 더욱 강력한 논리는 저임금으로 기꺼이 일할 이민자들이 몰려올 경우 가장 취약해지는 비숙련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임금 수준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왜 가장 힘없는 우리 노동자부터 지켜야 할까? 이런 태도에는 도덕적 근거가 있을까? 샌델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그것은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인정하고 이에 따라 도덕적 행위자로서 우리의 정체성이 우리 공동체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생각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한다.
월쳐는 “애국의 정서가 도덕에 기반을 둘 때만이, 공동체의 결집이 의무와 공동의 의미에 이바지할 때만이, 이방인은 물론 자국 구성원이 있을 때만이, 국가 공무원은 특별히 자국민의 복지에 (……) 그리고 자국의 문화와 정치 번영에 각별히 신경을 쓸 동기가 생긴다.”고 썼다.
‘미국산 애용’ 운동은 불공평한가?
미국인은 자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카지노 게임 사이트 제품을 사야 카지노 게임 사이트 타당한 근거가 있을까?어려움에 처한 동료 시민을 도울 특별한 의무가 있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할 미국인은 거의 없다. 이런 의무를 합의라는 용어로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애국심이 도덕에 기반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우리에게는 동료 시민의 복지에 대한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면, 의무의 세 번째 범주인 합의가 필요 없는 연대 의무를 인정해야 한다.
연대는 자기 사람만 챙기는 편애일까?
연대 의무라는 것은 집단 이기심, 즉 자기 사람만 챙기는 편협하고 내부 지향적이어서, 애국심이나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가치를 인정하기보다는 극복해야 하는 마음가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연대와 소속 의무는 내부만이 아니라 외부로도 향한다. 내가 사는 특정 공동체에서 나오는 특별한 의무 가운데 일부는 같은 공동체 사람에게 내가 지는 의무다. 하지만 나머지는 내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들에 대해 지는 의무다.
역사적 부당 행위에 대한 집단적 사죄와 보상은 연대 의식이 내 공동체가 아닌 다른 공동체에도 도덕적 책임을 지게 하는 좋은 사례다.샌델은 내 나라가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배상하는 일은 내 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한다.
자부심과 수치심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로부터 나오는 도덕 감정이다. 외국을 여행하다가 자국민의 볼썽사나운 행동을 보면 수치심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집단 책임과 관계가 있다.
즉 우리는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 있으며, 도덕적 행위자로서 우리와 서사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다.
샌델은, "소속감에는 책임감도 동반한다. 내 나라의 과거를 현재로 가져와 도덕적 부채를 해결할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 나라와 역사에 진정한 자부심 또한 느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충성심이 보편적 도덕 원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연대 의무가 지탄받을 때는 자연적 의무를 위반하게 만들 때뿐이다. 하지만 인간을 이야기하는 존재로 보는 시각이 옳다면, 연대 의무는(때로는 자연적 의무와 대립할 정도로) 자유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엄격할 수 있다.
Case 4 로버트 리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군 사령관을 지낸 로버트 리(Robert E. Lee)는 연방군 장교로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에 반대했다. 하지만 그는 연방군을 이끌어 달라는 링컨의 요청을 고향인 버지니아에 대한 의무가 연방에 대한 의무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거절했다.
하지만 그는 노예제는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는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결정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연방을 절대적으로 지지하지만, 내 친척, 내 자식, 내 가정과 대립하는 편에 서지는 못하겠구나. 연방이 분리되고 연방 정부가 와해된다면,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 사람들과 고통을 나눌 것이다. 내 고향을 지키는 일이 아니라면 나는 더 이상 칼을 빼들지 않을 것이다.
충성심이 미덕인 이유를 살펴보자. 우리가 충성심을 도덕적으로 중요한 요구로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리의 딜레마를 결코 도덕적 딜레마로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리의 선택이 아니라, 그의 고민에 나타난 인격에 끌려 리 같은 사람을 동정을 넘어 존경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수하는 성향이다.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때로는 서로 상충하는 여러 부담을 받아들이며 산다는 뜻이다.
Case 5 형제를 지키는 사례1: 벌저 형제
보다 최근에 충성의 도덕적 무게를 시험카지노 게임 사이트 두 편의 형제 이야기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윌리엄(빌)과 제임스(화이티) 벌저 형제이야기다. 둘은 사우스보스턴에 있는 저소득층에서 아홉 남매의 형제로 함께 자랐다. 빌은 성실한 학생이었고 형 화이티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범죄의 길로 들어섰다.
상원의원에 이어 대학 총장을 카지노 게임 사이트 동생은 범죄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살인 용의자로 지명수배 중 도피하고 있던 형과 통화를 했지만 수사 당국의 협조 요청을 거부했다. 동생은 비록 수사 방해죄로 기소되지는 않았지만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났다.
대개는 살인 용의자를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도록 협조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가족에 대한 충성이 이 의무를 뛰어넘을까? 윌리엄 벌저는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Case 6 형제를 지키는 사례2: 유나바머
유나바머(Unabomber)는 주로 과학자들을 표적으로 삼은 우편 폭탄 테러범을 부른 말이다. 우편 폭탄 테러범을 추적하고 있던 수사 당국에 범인이 쓴, 3만 5천 단어로 돈 과학 기술 반대 선언문을 읽고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데이비드 카진스키는 그 말투가 형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경찰에 제보하였다.
형 테드 카진스키는 체포되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구형받게 되었다. 동생은 벌저와는 반대였다. 그렇지만 그는 형이 사형을 면할 수 있도록 애쎴고 유나바머 체포로 받은 포상금 100만 달러를 대부분 형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가족에게 전달하고 가족을 대표해 형의 범죄를 사죄했다.
이 두 사람의 선택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든 간에, 이들의 이야기는 범죄자를 정의 심판대에 세울 의무 같은 도덕보다 충성과 연대가 더 무거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이들이 직면한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우리 의무가 합의나, 인간 대 인간의 보편적 의무에만 기초한다면, 형제애로 인한 이런 곤란한 처지를 설명하기 힘들다.
정의와 좋은 삶
앞의 사례에서 발견되는 연대 의식은 도덕 및 정치에서 익숙하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연대 의식 없이는 삶을 살아가거나 이해하기 어렵다. 그것은 도덕적 개인주의나 합의적 윤리로 설명할 수 없다.
연대 의무나 구성원 의무는 선택과 관련 없는 이유, 즉 우리 삶과 우리가 소속된 공동체를 해석하는 서사와 관련된 이유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선(좋음)에 대해 사유할 때 우리 정체성의 근원인 공동체의 선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면, 중립을 갈망하는 태도는 잘못되었을 수 있다. 좋은 삶을 생각해 보지 않고 정의를 생각하기란 불가능하거나 어쩌면 바람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유주의 정치론은 정치와 법을 도덕적 종교적 논란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탄생했다. 칸트와 롤스의 철학은 그러한 의도를 과감히, 또한 더없이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의도는 성공할 수 없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뜨거운 쟁점 중 상당수가 도덕적 종교적으로 논란이 되는 주제를 피하지 못한다.
가능하지도 않은 중립을 가장한 채 중요한 공적 문제를 결정하는 행위는 반발과 분노를 일으키기 십상이다. 중요한 도덕 문제에 정치가 개입하지 않으면 시민의 삶은 저하된다. 사회는 편협하고 배타적인 도덕주의로 흐르기 쉬워진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건드리기 두려워하는 곳에는 근본주의자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다.
<10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