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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됐거든 Feb 11. 2025

자퇴가 있기 전 조짐이 카지노 게임 #1

2001년 봄, 중카지노 게임 2학년이었던 나는 카지노 게임를 나왔다. 첫 카지노 게임였다. 내가 어쩌다 카지노 게임를 하게 되었는지 아주 오랜만에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한다. (첫 글에서 23년만에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했는데 햇수로는 벌써 24년 전이 되었다. 시간이 참 빠르다.)


카지노 게임생이 된 건 중2였지만 그 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시작은 초등카지노 게임 4학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담임 선생님은 지금 생각해도 독특한 분이셨다. 그해에는 많은 것들이 특이했는데 세월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아침 자습시간이었다. 8시 30분까지 등교를 하고 9시 반쯤인가 1교시가 시작되는데 보통 그 한 시간을 자습시간으로 썼었다. 주로 책을 읽거나 다 같이 카지노 게임 방송을 시청하거나 했는데 그해 아침 자습 시간은 아이 한 명을 세워두고서 선생님이 이 친구를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A라는 아이를 교탁 앞에 불러낸 뒤, “너는 왜 옷을 더럽게 입고 오니, 왜 코를 훌쩍이느냐”로 시작하여 끝에 가서는 “너희 어머니는 집에서 뭘 하시기에 이런 꼴로 애를 카지노 게임에 보내니.”로 끝나곤 했다. 꼭 부모를 들먹이는 것이다. 그러다가 며칠 뒤에 갑자기 “어제 A 어머니가 오셨다, 어머니가 참 ‘인텔리’시더라”라며, “A가 참 착하다, 너희들도 A를 본받아라” 뭐 이런 식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이게 참 잔인했던 것이 A의 옷차림이나 비염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가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을 해버리면 이 친구는 더럽고 그래서 같이 놀면 안 될 것 같은 아이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A는 마치 가정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지저분하게 카지노 게임에 오는 아이가 되어버리지 않았나. 그러다 며칠 뒤 A와 A의 어머니는 극적으로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미 이 아이는 상처받았고, 한 차례 낙인이 지나간 뒤였다. 다행히 대부분은 명예를 회복하고 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같이 잘 지냈지만 불행하게도 간혹 한 두 명에게는 그날의 공개 비판이 계속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예컨대 A가 코찔찔이로 한동안 놀림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 인증을 받은 놀림거리 말이다. 이런 일이 그해 우리 반에선 무수히 반복되었고 계절이 몇 번 변하면서 우리는 어렸지만 내심 알고 있었다. 언젠가 자기 차례가 오고 누군가 내일 저 앞에 서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당연히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4학년이 지나고 5학년이 되었다. 이때는 연세 있는 남자 카지노 게임이었는데 이 분이 6학년 1학기까지 우리를 담당하고 퇴직하셨다. 이 일 년은 흡사 정글이었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실사판이 나의 5, 6학년이었다. 적어도 내가 느낀 건 그랬다.

5-6학년쯤 되면 카지노 게임들이 슬슬 알 만한 것들을 알아가게 된다. 지금 나이에 그 시절 나와 반 카지노 게임들을 떠올려보니 그때부터 서서히 ‘나’의 상대적인 위치, 돈이 있고 없는 사람의 차이, 강자와 약자 뭐 이런 것들의 개념에 눈을 떴던 것 같다.


우리 반에는 엄석대 무리가 몇몇 있었고 이 아이들이 몇몇 친구들을 부려먹었다. 급식 시간에 밥을 떠오라거나 쉬는 시간에 카지노 게임 밖에 가서 과자를 사오라거나 하는 것은 다반사였고 언젠가 한 번은 자기들 재미있자고 누군가의 바지를 벗겼던가 그랬다. 힘 있는 친구들은 당번이 되었을 때 그걸 다른 아이에게 미뤘고, 그 결과 누군가는 한 학기 내내 카지노 게임에 남아 청소를 해야 했다. 당하는 아이들은 주로 편부모 가정이나 조부모님 밑에서 자라는 친구들이거나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친구들이었다. 언제 한 번 ‘권력자들’ 중 한 명이 무슨 일 때문인지 벌 청소를 하게 된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 권력자는 청소를 다른 아이에게 넘기고 유유히 사라졌고 결국 피해자만 더 피해를 입는 상황만 만들어졌다. 잘못을 바로 잡으려고 할수록 약한 사람만 더 힘들어지는 세상. 그런 곳에서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나았다. 우리는 그런 체제에서 권력자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거나 당하는 것에 익숙해지거나 하는 식으로 점점 순응해갔다.


당시 선생님은 교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분이셨고, (나는 이 분 담뱃재에 팔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방관했다.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는 가정환경조사가 있던 날이다. 어느 날 아침에 선생님께서 “자기 집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어.” 하셨다. 그런데 반 카지노 게임들이 다 눈 뜨고 있는 상태에서 누가 거기에 손을 들 수 있겠나. 그러자 선생님은 “OOO 너 나와.” 하셨고, 그 친구가 교실 앞으로 나오자 “야 이 XX야. 너네 집 가난한데 왜 손을 안 들어 응?” 하며 그 친구를 때리기 시작하셨다. 당시에는 체벌이 허용되던 때이기는 했지만 과연 가난함이 ‘맞을 이유’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 의아했다. 아니, 아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난은 저런 것이구나, 부끄럽고 숨기고 싶지만 숨길 권리조차 없는, 맞아도 싼 그런 것인가 생각했다.

마지막 학기는 다른 선생님께서 우리를 맡게 되면서 감사하게도 평범하게 보냈다. 아주 오랜만에 내가 속한 교실에 질서가 생겼고 가난이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 시기가 좀 더 길었다면 좋았을 것 같고 그랬다면 어쩌면 카지노 게임를 나오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리하여 평범한 10대를 보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의 평범한 학창시절은 아쉽게도 6개월로 끝났고 나는 중카지노 게임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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