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4월, 우리 과수원에 꽃이 피기 시작했다. 살구꽃, 복숭아꽃과 자두꽃, 사과꽃이 피면서, 우리 집은 커다란 꽃다발이 되었다. 화려하기는 복숭아꽃이 단연 최고라고 했다.
그렇기에 무릉도원이라는 말이 있을 게다.
그때부터 우리 집은 동네에서 보기 드문 집이 되어갔다. 일찍 폈다가 진 개나리가 낮은 담장을 푸른색 잎으로 둘러쳐졌고, 마당의 화단엔 뾰족하게 돋아났던 새싹들에서 봄꽃들이 하나 둘 피기 시작한 것이다.
겨우내 아버지가 들여놨던 구근들을 옮겨 심은 것들도 고개를 들었다. 집 주변엔 일부러 심거나 가꾸지 않은 꽃들도 마구 피기 시작했다.
예전엔 벚꽃도 이맘때 폈던 거 같다. 벚꽃보다 먼저 핀 목련은 이미 파란 잎사귀를 피어올리고 있었다. 집 주변 여기저기에 노란 민들레가 지천으로 널렸고, 아무렇게나 자란 찔레가 꽃을 피어 골짜기마다 향기를 자욱하게 할 거였다.
곧 우리 집 마당가에 서 있는 키 큰 라일락 나무에서도 보랏빛 꽃이 흐드러지게 필 거고, 그 향기는 어둠이 내린 봄밤을 적실 거였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 엄마에게 말했다.
“아유, 이렇게 꽃천지에서 살면 소원이 없겠어요.”
엄마가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한철만 살아보세요. 과수원이 얼마나 일이 많은데요.”
뭐든 겉에서 보면 화려함만 보이는 거다.
그렇게 꽃대궐 같은 과수원을 가꾸려면 남들 다 쉬는 겨울에도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거름을 사다 나르고, 나무의 주변을 파고 거름을 주고, 가지치기도 해야 했다.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꽃이 피면서 과수원의 곳곳에 농약통이 놓이기 시작했다.
꽃이 지자마자 나무마다 농약이 뿌려질 거였다.
커다란 함지에 농약을 붓고 물을 길어다 부었다. 그곳에 수동펌프가 연결된 긴 호수를 늘여놓았다. 호수는 넓은 과수원의 나무마다 돌아다녀야 했기에 매우 길었다.
농약을 칠 때는, 한 사람이 농약통 옆에 서서 수동펌프의 막대기처럼 생긴 손잡이를 앞뒤로 쉬지 않고 움직이면, 다른 사람이 호수의 끄트머리에 붙은 분무기를 들어서 나무마다 농약을 살포했다.
농약이 나올 때마다 공중으로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농약을 맞은 나뭇잎에는 뽀얀 색의 자국이 남아 있었다. 농약을 친 후에 엄마는 과수원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혹여 독한 살충제를 손으로 만질까 싶어서였을 것이다.
커다란 비닐하우스 안엔 이미 참외와 수박의 씨앗이 발아해서 모종으로 자라고 있었다. 이른 봄 엄마는 좁고 긴 비닐 자루에 흙을 채우고 어른 손가락 길이보다 조금 더 긴 길이에 맞춰서 떡을 썰듯이 칼로 잘랐다. 거기에 참외와 수박의 씨앗을 두세 알씩 심었다. 그리고 물을 주기 시작했다.
엄마는 “조로”라고 불리는 물뿌리개로 비닐하우스에 아침저녁 물을 주었다. 그때 수도가 아닌 펌프라고 불리던 지하수에서 물을 퍼다가 주는 것이기에 물주는 일은 고된 일이었다.
우리 집 주변엔 돌이 많았다. 그렇기에 지하수를 파는 데도 고생을 했다고 했다. 아무리 파도 물길이 보이지 않았고, 커다란 바위까지 나와서 그것까지 뚫어야 했다. 그러나 물맛이 너무 좋았다. 암반수였다.
여름엔 손일 시릴 정도로 차가웠고, 겨울에는 어떤 강추위에도 얼지 않을 정도 따뜻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여름에 큰 통에 물을 받아놓고 김치통도 담가놓고 수박도 넣어두었다. 천연 냉장고였다.
그때는 냉장고가 없었다. 여름에 얼음을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상하기 쉬운 것들을 보관했다. 그러나 시골에서 얼음을 구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먼 거리에 있는 읍내에서 얼음을 사 오다가는 도중에서 다 녹아버렸을 것이다.
마을입구에 있는 송씨네 구멍가게에도 아이스크림을 아이스박스에 넣어두고 팔았다. 두꺼운 스티로폼 뚜껑을 열면 고무주머니가 올려져 있었다. 고무주머니 안엔 얼음과 소금이 함께 들어 있었다.
고무주머니는 들어낼 때마다 짭짤한 소금맛이 손에 묻어났다. 지금은 아이스크림이라고 부르지만,
그때는 “하드”나 “카지노 게임”라고 불렀다.
그때는 돌아다니는 카지노 게임 장사도 있었다. 카지노 게임 장사는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어깨에 메고 다녔다. 시골엔 카지노 게임 장사가 한 여름이 아닌, 늦봄에서 초여름까지 집집이 돌아다녔다. 너무 더우면 얼음이 쉽게 녹아서 그런 거라고 했다.
아이스박스 안에는 소금을 넣은 얼음주머니가 들어 있었다. 카지노 게임 장사가 마을에서 꽤 먼 우리 집까지 올라오곤 했다.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
“시원하고 맛있는 카지노 게임!”
하고 소리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좁은 길을 걸어왔다.
나는 여전히 미루나무에 기대서서 카지노 게임 장사가 오는 것을 보고 있다가 엄마에게 달려갔다.
“엄마, 카지노 게임가 와.”
그것은 사달라는 얘기였다. 엄마가 밭에서 일하던 허리를 펴고 집 마당으로 나왔다.
카지노 게임 장사가 마당에 들어서서 다시 한번 외쳤다.
“달고 시원한 카지노 게임!”
카지노 게임 장사는 열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투박스러운 네모난 통이 마르고 키가 크지 않은 소년의 어깨에 짓누르듯이 매달려 있었다. 어린 내가 봐도 카지노 게임 통이 너무 커서 그 소년에겐 무거워 보였다.
소년이 카지노 게임 통을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열었다. 두꺼운 아이스박스의 뚜껑이 열자 노르스름한 고무로 된 얼음주머니가 나왔다. 얼음주머니 밑에 막대기가 꽂힌 카지노 게임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포장지 없이 팥 색을 띤 기다란, (지금의 비비빅처럼 생겼는데 훨씬 가느다랗게 생겼다.) 카지노 게임와 우유맛 나는 카지노 게임가 제멋대로 담겨 있었다.
카지노 게임는 백 원에 열 개를 넘게 줬던 거 같다.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플라스틱 바가지를 들고 나왔다. 소년이 바가지에 카지노 게임를 담아 주고 덤까지 주었다.
스티로폼 밖으로 나온 카지노 게임는 금방 녹았다. 나와 동생이 하나씩 집어 먹는 사이, 서서히 카지노 게임는 녹기 시작했다. 다 먹기도 전에 바가지엔 팥알과 우유가 뒤섞였다.
희뿌옇고 걸쭉한 카지노 게임 물 위로 나무 막대기가 둥둥 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