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딱히 조미료라는 것이 없었을 때였다. 사실 하루 세끼를 챙겨 먹기도 어려운 때였다. 그때 “맛”을 따지는 것은 사치였다. 배를 곯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을 것이다.
된장국에는 똥을 떼어낸 굵은 멸치 몇 마리 넣고 된장을 푼 뒤 소금으로 간을 했다. 맑은 국에는 소금으로만 간을 하거나 국간장을 조금 넣는 것이 다였다. 나물을 무칠 때도 조선간장이라고 부르던 국간장과 참깨가루, 파, 마늘과 참기름만을 넣어서 조물조물 주물러서 엄마의 손으로 맛을 냈다.
왜간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선간장인, 메주를 소금물에 넣어서 숙성을 시킨 뒤 된장을 건져내고 남은, 조선간장과는 맛이 달랐다. 약간 달았고 짠맛이 덜했다. 지금의 양조간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맛의 차이가 있다.
일본간장이라고 해서 왜간장이라고 불렀다. 왜간장은 일제 강점기부터 있었다고는 하는데,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므로 모든 가정의 부엌에서 애용하지는 않았다.
밭에서 농사지은 콩으로 직접 메주를 쑤어서 겨우내 말린 뒤, 커다란 항아리에 물과 소금을 넣어서 숙성시킨 국간장을 더 많이 썼다.
편식이 심한 내게 엄마는 왜간장과 들기름을 넣고 밥을 비빈 후 볶은 깨를 뿌려주었다. 동생에겐 날달걀을 넣고 왜간장으로 비벼주었다. 나는 날달걀도, 익은 달걀도 먹지 않았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설탕도 귀했다. 설탕은 요리할 때 쓰는 카지노 가입 쿠폰 아니었다. 손님이 오면 물에 타서, 지금의 차나 커피처럼 대접하는 카지노 가입 쿠폰었다.
찻잔이나 유리컵은 없었다. 귀하다 싶은 손님이 오시면, 국그릇에 밥숟가락으로 설탕 몇 수저 퍼 넣은 후 찬물을 부어 내어 놓았다.
서울에서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곳에 “미원”이라는 조미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것이 흘러들어오는 것에 시골은 언제나 늦었다. 요즘처럼 동시대를 사는 것이 아니었다. 길게는 몇 년, 짧게는 몇 달이 걸려야 소식도, 문물도 들어왔다.
미원을 자세히 보면 네모난 입자였는데 설탕과 비슷한 색을 띠고 있었다. 설탕을 자주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미원과 설탕을 구별하지 못카지노 가입 쿠폰.
할머니들은 미원을 종이에 덜어서 허리춤에 넣고 다니며 심심할 때마다 꺼내 입에 털어놓기도 카지노 가입 쿠폰. 아이들은 부엌에서 엄마 몰래 빨간 신선로가 그려진, 하얀색 비닐봉지에서 미원가루를 손바닥에 쏟아서 혀로 찍어먹었다.
미원의 맛은 약간 들쩍지근하면서 느끼한 맛이 났다. 뒤를 이어 “미풍”이라는 조미료가 나왔는데 얼핏 보면 겉표지나 신선로의 그림이나 비슷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미원”을 더 선호했다.
있는 집일수록 신문물을 빨리 받아들이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 다르지 않았다. 미원은 동네에서 조금 살림살이가 나은 집의 부엌에나 있었다. 화학조미료라는 말 자체가 없었을 때 미원은 획기적인 가루였다.
아무리 맛이 없는 국이나 찌개라도 그 가루를 조금만 넣으면 감칠맛이 돌았고, 짜거나 싱거운 맛도 바로 잡아줬다.
미원은 모든 반찬에 넣어 먹었다.
나물이나 냉국, 무침, 볶음, 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넣어서 맛을 냈다. 그 맛은 보편적이었기에 모두의 입맛에 잘 맞았다.
한 마디로 마법의 가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