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홍한별 역, 2024), 『이처럼 사소한 것들』, 다산북스
"어디든 운 나쁜 카지노 게임은 있기 마련이니까."(21쪽)
불운한 카지노 게임은 어디든 존재한다. 하지만 카지노 게임들은 그게 자신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디든 있기 마련인데 그게 내가 속한 곳은 아닐 거라고 선을 긋는다. 나만 아니면 된다고 무심코 넘어가기 일쑤니, 타인의 불운은 곧잘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된다. 이렇게 너와 나를 분리하는 것은 결국 다음의 결론을 얻기 위해서다.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55쪽)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우리는 너와 나를 가른다. 그래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으면"(24쪽) 자기 손에 쥔 것을 무사히 지키며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불행을 목격하고도 모른 척 방관하는 것은 그래서다. 이 논리는 불행의 결과가 개인의 자발적 선택에 근거한다는 명제로 합리화된다. 가령 이렇게.
"그게, 세상에는 사고를 치는 여자들이 있어."(56쪽)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주인공 빌 펄롱의 아내 아일린은 자기 딸들이 어린 나이에 홀로 아이를 가지는 일 따위는 겪지 않으리라 확신한다. 석탄·목재상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보호 아래 도시에서 평판이 좋은 세인트마거릿 여학교를 다니며 교육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문제를 일으키는 카지노 게임들은 강 건너 수녀원에 따로 있다. 선한목자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는 여자아이들 같은. 풍문에 이들은 죄를 짓고 수녀원에서 교화 중이라 한다. 아일린에게 "걔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57쪽)므로 상관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사고는 누구에게나 뜻밖에 일어난다. 운이 선택의 영역이 아니듯이 사고 또한 마찬가지다. 더구나 아일린이 말한 사고 "치는" 여자들이 실은 사고를 "당한" 여자들일 수 있다. 그 여자들이 당한 사고를 아일린의 딸이라고 피해 갈 수 있을까? 만약 내가 그 세탁소에서 일한 여자였다면? 혹은 만약 내 어머니가 그 세탁소 출신이라면? 이 "만약"이라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을까?
너와 나 사이의 경계는 얼핏 보기에 아주 뚜렷하다. 카지노 게임원과 마을을 가르는 강처럼 넘어갈 수 없어 보이고, 세인트마거릿 여학교와 세탁소가 있는 카지노 게임원을 구분 짓는 담장처럼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사실 자의적인 구분일 뿐이다. 카지노 게임원의 권력은 강을 넘어와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세인트마거릿 여학교와 세탁소는 둘 다 동일한 카지노 게임회의 산하 기관이다.
담장 하나 너머로 어떤 여자아이들은 곱게 교복을 입고 합창을 배우고, 어떤 여자아이들은 신발도 신지 못한 채 바닥에 엎드려 광이 나도록 걸레질을 한다. 전자의 평화로움은 후자의 착취로 지탱되고, 이 이분법적 구조는 다수의 방임을 토대로 유지된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수녀원으로 대표되는 권력이 자행하는 폭력은 시민들의 위선을 뒷배로 둔다. 마을 카지노 게임들은 수녀회에서 조직적으로 어떤 소녀들을 학대하고 있는 걸 짐작하면서도 태연히 성당 미사에 참석해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을 빈다. 저들의 영향력에 주눅 들어 눈치를 보며 몸을 사리고 그저 모르는 척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소수의 희생을 자양분 삼은 평화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사고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사건은 우리의 의지 밖에서 생겨난다. 모든 걸 다 잃는 일은 너무나 쉽게 일어나니(22쪽), 아무도 "만약"의 가능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수녀원에 땔감 배달을 갔다가 우연히 한 여자아이를 만난 펄롱이 무의식 중에 환기한 사실도 이것이다. 자신도 저 폭력의 희생양이 될 수 있었음을, 누군가의 호의를 덕분에 운 좋게 피했음을 말이다. 엉망진창으로 잘린 머리카락에 젖이 새어 나오는 앞가슴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못하고 창고에서 홀로 밤을 지새운 가냘픈 소녀를 보고 펄롱은 자기 삶이 무엇에 빚지고 있는지를 상기한다.
펄롱은 미혼모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그 어머니조차 펄롱이 열두 살이던 해에 뇌출혈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그런 펄롱이 그럴듯한 사업장을 꾸리고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다섯 딸까지 얻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 것은 미시즈 윌슨과 네드의 보살핌 덕이다. 가족들마저 등을 돌린 열여섯의 어머니를 돌봐준 카지노 게임은 그녀가 일하던 곳의 주인이었던 미시즈 윌슨이 유일했다. 미시즈 윌슨의 농장에서 일하던 네드가 아버지 없는 펄롱의 곁을 함께 지켜주었다. 펄롱의 삶은 이렇듯 사소해 보이는 이 존재들로부터 말미암았다.
어쩌면 너의 운은 나의 선택으로 결정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너의 어려움을 돕기로 선택할 때 너는 운이 좋은 사람이 된다. 가지고 태어난 조건만 보면 운이 나쁘다고 할 법한 펄롱이 미시즈 윌슨의 선택으로 도리어 운 좋은 사람이 되었듯이. 그러니 우리의 선택에 따라 운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이 가변성이 "만약"의 가능성을 새롭게 구성하니, 이로부터 삶의 의미가 파생한다. 비록 너무나 미미해서 알아채기 어렵지만, 삶은 늘 이처럼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지는 셈이다.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미혼모가 되는 일이건 고아가 되는 일이건 벌어져야 할 일이라면 여지없이 벌어진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이웃에게 닥친 불행이 나에게 오지 않으리란 법 없고, 오늘의 행운이 내일도 계속되리라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불가피성과 잠재성이 결국은 너와 나 사이에 그어둔 선을 흐리게 만든다. 이 무너진 경계 틈에서 용기가 싹트고, 보잘것없는 것들의 연약하고도 강력한 힘은 여기에서 생성된다. 카지노 게임 미약했으나 그 끝은 그리하여 창대해지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