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부엌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는 커다란 검정 비닐봉지. 무시하고 싶지만 무시할 수 없다. 안에는 남편이 텃밭에서 뜯어온 엄청난 양의 쪽파가 담겨 있다. 며칠 더 두면 다 버리게 될 텐데, 내가 계획하지도 않은 일로 한참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니, 짜증이 난다.
남편은 나에게 미리 얘기하지 않고 텃밭 수확물을 가지고 오곤 한다. 감자, 고구마, 옥수수, 고추, 무, 배추, 상추 등등. 때때로 신선한 농작물이 생기니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부엌일을 싫어하고 먹는 것을 즐기지 않는 나에게는 일거리일 뿐이다. 지금처럼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나날들 가운데 던져지는 부엌일감은 더 싫다. 남편이 식탁 위에 올려놓은 봉지를 흘깃 보기만 하고 옆으로 치워두었었다. 저거 언제 카지노 쿠폰어서 언제 씻고 말려서 언제 파김치로 담그나 한숨만 나왔다.
소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글도 쓸 수 없고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뜨개질도 필사도 하고 싶지 않았다. 카페에나 나갔다 올까 했지만 귀찮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단순 반복작업이다. 저 쪽파를 해치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가지 않는 시간, 아무 생각 없이 쪽파에 매달려보기로 한다.
식탁에 달력 종이를 깔고 작은 칼과 넓은 쟁반을 꺼냈다. 검정 비닐봉지를 펼쳐보니 엄청난 양이다. 오래 걸릴 테니 핸드폰의 충전기까지 연결해 두고 유튜브를 재생했다. 쪽파 한 뭉치를 꺼내 작업을 시작했다. 뿌리를 잘라내고 지저분한 것들을 뜯어냈다. 깨끗이 카지노 쿠폰어진 쪽파가 조금씩 조금씩 쌓여 갔다. 내 손이 까매지는 만큼 속도가 빨라졌다. 카지노 쿠폰은 쪽파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쌓여가는 쪽파를 보면서 뿌듯함과 함께 걱정이 밀려온다. 이걸 또 언제 다 씻고 말리나. 그래도 쪽파를 카지노 쿠폰는 동안 시간은 잘도 간다. 문득문득 핸드폰을 들여다보지만 기다리는 소식은 오지 않는다. 게임하던 둘째가 도와줄까 묻지만 괜찮다고 했다. 왠지 오기가 났다. 끝장을 보겠어!
장장 3시간이 넘게 걸린 카지노 쿠폰기가 끝났다. 군데군데 묻어있는 흙들을 씻어 내어 채반에 쌓는다. 양이 많아 씻는데도 한참 걸렸다. 물기를 말리면서 양념장을 미리 만들었다. 인터넷을 뒤져 예전에 성공했던 파김치 레시피를 찾았다. 분량의 고춧가루, 매실액, 액젓, 설탕을 섞은 후 레시피에 없는 진간장 한 스푼을 추가한다. 내가 먹어본 파김치 중 최고인 시어머니의 비법이다. 미리 만들어두면 고춧가루가 풀어져서 버무릴 때 한결 수월해진다.
양념장을 다 만들어도 소식은 오지 않는다. 일과가 끝나가는 시간이었다. 채반 3개에 가득 차 있는 쪽파를 보면서 소식 기다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에게는 오지 않을 소식이었나 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저녁이나 먹자. 저녁 먹는 내내 이유가 뭘까 하는 생각 했다.
그래도 벌려놓은 일은 끝내야 하니 파김치 제조에 들어갔다. 커다란 양푼을 꺼내 양념을 버무렸다. 여기저기 고춧가루 양념이 튀었지만 커다란 통 두 개 가득 파김치가 담겼다.
둘째가 "하나만 먹어봐도 돼?" 하고 묻는다. "당연하지." 하나 집어먹더니 "오! 맛있어!" 하며 감탄한다. (나와 같이) 할머니 파김치를 최고로 치는 아이가, 내 파김치를 칭찬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복잡했던 생각이 가벼워졌다. 기다렸던 소식을 받지는 못했지만, 파김치 두 통과 함께 아이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냉장고에 든든하게 채워진 파김치를 보면서 안달복달했던 내 마음도 차분해졌다. 하나씩 하나씩 카지노 쿠폰고 씻어야 파김치를 완성할 수 있는 것처럼, 나는 나의 일을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하면서 다시 도전하고 다시 기다리면 된다.
그 옛날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는 항상 식탁에서 무언가를 다듬고 있었다. 이름도 모를 나물들, 견과류들. 시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었던 시어머니도 뭔가를 다듬었다. 마트에 가면 다 정리된 식재료들을 파는 세상이 되었는데도, 구부정한 자세로 손톱까지 까매지면서 부추, 쪽파, 마늘 등을 다듬는다. 열심히 다듬어서 멀리에서 온 며느리들에게 주셨다.
그 오랜 시간 나물을 다듬으면서 우리의 엄마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많은 다듬을 거리들을 앞에 두고 무엇을 기다렸을까, 학교에서 타향에서 돌아올 우리를 기다렸을까. 나처럼 가지 않는 시간을 보내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을까.
나와 여동생은 나물을 다듬는 엄마 앞에 앉아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엄마의 맞장구와 칭찬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언뜻 엄마가 지루해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엄마가 우리 얘기를 듣기 싫어하는구나 생각했다. 엄마는 원래 차가운 사람이니까. 나물 다듬는 엄마의 식탁에 앉는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엄마와 멀어졌다.
내가 담은 파김치 두 통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엄마의 지루함은 다듬어도 다듬어도 생겨나는 나물에 대한 지루함, 차려도 차려도 끝나지 않는 밥상에 대한 지루함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흐르지 않는 시간에 대한 지루함, '나'라는 존재가 사라져 버린 세상에서 살아내야 하는 지루함이었을 수도 있겠다. 나는 다시 도전하고 다시 기다리면 되지만 엄마는 그럴 수 없었다. 무엇에도 도전할 수 없고 도전해 봐야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런 삶이었다. 쪽파를 다듬다가 그때의 엄마의 지루한 표정이 이해되기 시작했다면 이상한 일일까.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 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런 상태로 우리는 닥쳐오는 인생의 무수한 이벤트를 겪어나가야 하고 그리하여 삶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부조리들로 남아있게 된다.
-단 한 번의 삶, 김영하, p20
<단 한 번의 삶에서 김영하 작가는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어머니가 20대 때 군인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어머니 친구들의 이야기를 통해 어머니의 삶을 거꾸로 꿰어가다 이렇게 적었다."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라고. 나는 김영하의 글을 빌려 이렇게 써본다."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그 영화는 보는 시기에 따라 다르게 읽히기도 한다. 특히 부모님의 인생은 더더욱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