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복직원을 쓰기 위해 학교를 찾았다. 말이 3년이지 30살에 첫 아이를 낳고 3년간의 휴직, 그리고 복직 후 1년 만에 다시 둘째를가져 다시 3년을 휴직했으니 거의 8년에 가까운 시간을 학교와 멀어져 그냥 '엄마'로만 살았더랬다. 아직 복직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복직원을 쓰려고 학교에 가는 것인데도 화장을 하고 옷을 차려입고 옷장 속에 먼지 쌓인 오래된 명품가방도 꺼내 들었다.
맞다. 나는 설렜다.
그동안 엄마로, 아내, 동네 아줌마로만 살았던 나에게 그래도 돌아갈 내 자리가 있다는 건 참 감사한일이었다.
하지만 소풍 가는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만으로학교에갈 순 없었다. 내가 학교를 떠나 있는 긴 시간 동안 학교사회는 안팎으로 너무 많은 변화가 있었고, 나는 10여 년 전의 교직사회에그대로머물러 있으니 갓 발령받은 신규교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더군다나 다시 출근하게 될 학교는 발령받고 계속 휴직하느라 한 번도 근무를 해보지 못한 13 학급의 소규모 학교였다.작은학교다 보니 이미 교사들 사이에도 친분관계가 형성된 후 일 테고, 나는 아는 얼굴조차 한 명도 없는 그야말로 낯선 세계에 발을 디디는 것이었다. 학기 중에 전학 오는 아이의 심정이 이런 걸까. 다음부턴 중간에 전학 오는 아이 잘 챙겨줘야지.
그렇게 교무실 테이블에 앉아 오늘 처음 만난 교감선생님과 이런저런 나의 신상에 대한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훅 들어오는 교감선생님의 한 마디.
"선생님. 연구부장을 좀 해주셔야겠는데요."
"네? 제가요? 연구부장을요? 저 지금까지 부장 한 번도 안 해봤는데요."
교사의 업무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생활지도를 하는 것 외에 행정 업무가 더해진다. 업무는 학교마다 교사들이 1/n로 나누어 갖는데 그 또한 업무량 편차가 심해서, 교사도 사람인지라 상대적으로 가벼운 업무를 받고자 어쩔 수 없는 눈치게임을 한다. 그중기피업무 3대장이 바로 교무카지노 쿠폰, 연구카지노 쿠폰 그리고 새롭게 떠오르는 기피업무의 최고봉 생활안전카지노 쿠폰(학교폭력담당). 그중 연구부장이라 함은 학교의 전체적인 교육계획을 작성학고 1년간의 교육과정 운영을 책임지는 자리이다. 그러니까 나처럼 경력이 오래도록 단절된, 8년 만에 학교로 돌아오는 헌내기 교사가 맡았다가는 학교 교육과정이 망할지도 모른다는 거다.
그런데 저한테 연구카지노 쿠폰을 하라고요 지금?
저 이제 3년 만에 복직하는데요!
빽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차분하고 우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교감선생님, 저 3년 만에 복직해서 학교 적응하는 것만도 걱정인데 제가 어떻게 부장을 하겠어요. 정 해야 한다면 1년 뒤에 할게요. 올해는 정말 어려울 것 같아요. "
교감선생님은나의 대답쯤이야 예상했다는 너그러운 표정으로 나보다 더 차분하게 말씀하신다.
"선생님, 자 보세요. 지금 우리 학교에 신규발령받은 교사가 대부분이고요. 그다음으론 이제 갓 신규를 벗어난 선생님들. 그리고 교무부장님, 이렇게 계신답니다. 선생님이 그래도 교육경력은 많으신 편이니 해주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선생님이 안 하시면 이제 2~3년 차 되신 어린 선생님들이 하셔야 되는데 그분들께 연구부장을 맡기는 건 우리 선배들이 못할 일이죠."
아니요, 그게 교직경력이라고 치면 나도 이제 7년 차라고요!! 말이 7년 차지, 8년이나 집에서 우리 애들만 키우느라 애들은 어떻게 가르쳤는지, 학급운영은 어떻게 했는지 다 까먹은 거 같아서 걱정돼서 죽겠다고요. 제가 신규나 다름이 없다니까요.
역시나 마음속으로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차분함과 우아함을 잃지 않는 나.
"교감선생님, 제가 나이만 먹었지 교직 경력은 30살에 단절돼서 경력이 그리 많지 않아요."
"아니요, 선생님. 나이 말입니다..."
"아.. 나이요.... 나이는 제가 많긴 하죠."
망했다. 나이 공격에는 당해낼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학교에 복직원을 쓰러 간 그날 교무부장님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연구카지노 쿠폰'이라는 내겐 너무 과분한 업무를 등에 업고 왔다. 나이 먹는 건 정말이지 좋은 게 하나도 없다. 억울해죽겠다.
나이 마흔 살, 교대 졸업 16년 만에, 교직경력 8년 차에 '연구카지노 쿠폰'이라는 직책을 달고 학교를 이리저리뛰어다니며 어찌어찌해 냈다.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내 기억 속 어딘가 저장되어 있던 10년 전의 연구카지노 쿠폰님들을 떠올려가며도장 깨기 하듯 하나씩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1년을 무사히 보냈다.
이제 1년을 마무리 짓는 12월, 학교에서는 다시 눈치게임이 시작되고 있다.
내년에 몇 학년을 할까? 업무는 어떤 거로 하지? 머리를 굴려본다.
퇴근 무렵 뜬금없이 울리는 교실 전화
"선생님, 교무실로 오세요."
교감선생님이시다. 촉이 왔다. 가지 말까.
"부장님, 내년에도 연구부장 하실 거죠?"
아니요! 절대 못해요! 저 애도 둘이나 있고요, 둘째는 이제 다섯 살 밖에 안돼서 아직 엄마 손이 많이 가구요. 남편은 바빠서 매일 늦게 들어와서 독박육아도 이런 독박이 없어요. 저 올해도 육아하느라 업무 하느라 치여서 정말 힘들었거든요. 아니, 교감선생님. 제가 육아시간 쓴다고 일이 없어서 일찍 갔구나, 일이 할만해서 일찍 가는구나 생각하시면 경기도 오산이구요. 남은 업무들 다 집에 들고 가서 애들 재우고 했다구요. 그런데 내년에 또 하라구요?
이 말들은 그대로 삼킨 채 우아하게 답하는 나.
"네. 내년에도 할 사람이 없으면 제가 해야죠."
아. 나는 이런 내가 너무 싫다.
좋은 것도 좋다고 하고, 싫은 거도 좋다고 말하는 우아하고(우아한척하고) 차분한(척하는) 나.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이는 모두가 공평하게 1년에 한 살씩 먹기에 나는 내년에도 교무부장님 다음으로 나이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