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패왕(小覇王)’으로 불리던 강동의 젊은 맹주 손책이 죽자, 그의 어린 동생 손권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손권은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에게 물려받은 땅을 지키는 데만 급급했을 뿐, 한 번도 중원으로 진출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당시 19세로 조조보다는 27세, 유비보다는 21세나 어렸다. 두 사람이 산전수전 다 겪은 풍상꾼이라면, 그는 햇병아리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그러니 섣불리 움직이기보다는 방어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손권은 지지 기반이 매우 약했다. 형 손책의 유언에 따라, 주유(周瑜)가 그를 보좌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때 주유가 한 인물을 추천했는데, 그가 바로 말로써 적을 제압한 노숙(魯肅)이었다. 하지만 당시 노숙은 친구 유엽(劉曄)과 함께 양주의 떠오르는 군벌 정보(鄭寶)를 따르고자 했다. 주유는 그런 그를 극구 말리며 “신하가 주군을 선택할 때는 주군의 자질과 천운을 살펴야 한다”라고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주유의 추천을 받아 손권을 처음 알현했다.
손권이 물었다.
“나는 제 환공, 진 문공과 같은 공적을 세우고 싶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겠소?”
노숙이 말카지노 쿠폰.
“한 황실은 이미 기울었지만, 조조라는 항우가 있습니다. 당장 그를 깨뜨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우선, 강동을 지키면서 정세를 살피다가 조조가 북쪽을 차지하면 그 틈을 노려 황조와 유표를 쳐서 장강 유역을 장악해 제위에 오르십시오. 그리고 유비를 끌어들여 조조를 견제해야 합니다.”
― 《삼국지》 권54 〈오서〉 ‘노숙전’ 중에서
이 말은 곧 ‘반역’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19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군주에게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손권의 태도가 의외였다. 그는 놀라기는커녕 내심 기뻐하며 그를 즉시 책사로 임명하고, 밤마다 한 침대에 누워 정세와 전략을 논의했다. 이에 노숙의 진언을 ‘침대 위에서 세운 계책’이라는 뜻에서 ‘탑상책(榻上策)’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제갈량의 ‘융중대(隆中對, 제갈량이 ‘융중’에서 밭을 갈고 생활하면서 세운 전략 보고서)’와 매우 유사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손권에게 있어 노숙은 유비의 ‘제갈량’이자, 조조의 ‘순욱’이었다고 할 수 있다.
노숙은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은 전략가였다. 삼분지계 역시 제갈량이 아닌 그의 머리에서 먼저 나왔고, 적벽대전에서 오·촉 연합을 끌어낸 것도 그였다. 그런데 촉만이 한 황실의 적통을 잇는다고 생각한 《삼국지연의》의 저자 나관중에 의해 우유부단하고 어리숙한 인물로 묘사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아둔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전략적 식견이 매우 높고 재능 역시 걸출했다.“수전(水戰)에서는 주유, 육전(陸戰)에서는 노숙”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노숙은 사람됨이 정직하고 엄숙하며, 군사를 잘 다스리고, 금령은 반드시 행하고 … (중략) … 담론을 잘하고, 문장에도 뛰어나고, 생각이 깊고 원대했으며, 현명함이 다른 이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주유가 죽은 후로는 노숙이 최고였다.
― 《삼국지》 권54 〈오서〉 ‘노숙전’ 중에서
노숙의 능력은 특히 외교술에서 빛을 발카지노 쿠폰.그는 약소국 오나라가 중원의 강자 조조를 견제하고, 삼국의 한 축을 차지하려면 유비를 지렛대 삼아야 한다고 생각카지노 쿠폰. 이에 때로는 유비와 협력하고, 또 때로는 경쟁하는 실리적인 외교술을 펼치며 오나라를 천하의 맹주로 만들고자 카지노 쿠폰.
그 때문에 촉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를 계속 유지카지노 쿠폰. 심지어 형주를 빌려달라는 유비의 요청마저 승낙카지노 쿠폰. 손권 역시 그의 생각에 동조카지노 쿠폰. 그 대신에 유비로부터 형주 제후 유기(劉琦)가 죽거나 익주나 서천을 장악하면 즉시 반환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전하는 바로는 제갈량과 조조는 그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특히 조조는 들고 있던 붓을 떨어뜨릴 만큼 노숙의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전략에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그의 계획은 치밀하고 정교했다.
그런데 그만 문제가 발생했다. 유비가 익주(益州)를 차지한 후에도 형주를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손권이 제갈근(諸葛瑾, 제갈량의 형)을 사자로 보내 형주 반환을 요구했지만, 유비는 거절했다. 분노한 손권은 즉시 여몽(呂蒙)을 파견해 무력으로 장사·계양·영릉을 빼앗게 했고, 유비는 관우를 익양에 파견해 그들과 대치하게 했다. 이른바 ‘익양대치’였다.
알다시피, 형주를 비롯한 3군은 결국 다시 오나라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노숙은 당장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촉의 경계심이 풀어지기를 기다렸다. 그러니 아무리 적이라도 그의 사려 깊은 생각과 치밀한 지략에 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갈량과 주유 사이를 오가며 천하 삼분지계를 논의했던 노숙은 “단순한 친구나 적을 대하기는 쉽지만, 친구인 동시에 적은 대하기가 어렵다”라며 “누구라도 언제나 적이 될 수 있고, 동맹이 될 수 있다. 상대를 적으로 받아들일지, 친구로 받아들일지는 자기 지혜에 달려 있다”라고 생각했다. 생각건대, 이보다 당대의 상황을 더 정확히 표현하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노숙의 혜안은 뛰어났다.
노숙은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 장소(張昭)를 비롯한 오나라 대신들은 물론 유비와 제갈량, 관우가 그가 어리고 불손하다는 이유로 비난할 때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럴수록 오히려 더 머리 숙였다. 논공행상 역시 관심 없었다. 형식보다는 내실을, 명분보다는 실리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일부러 알면서 속아주기도 카지노 쿠폰. 이에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에 매우 인색했던 관우조차 “오나라의 영웅은 오직 노숙뿐”이라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노숙은 어린 주군, 손권을 황제로 세워 천하를 통일하려는 야망을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천하 통일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었고, 시간 역시 그의 편이 아니었다.
서기 217년, 노숙은 끝내 마음속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병사하고 말았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가 죽자 손권은 크게 슬퍼하며 장례식에도 직접 참석했다. 정적이었던 제갈량 역시 그의 죽음을 사흘이나 슬퍼했다고 한다. 비록 적이었지만, 마음을 나누었던 지기(知己)의 죽음을 진심으로 추모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노숙의 죽음으로 인해 촉과 오의 동맹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 일로를 달리며 관도대전, 적벽대전과 함께 《삼국지》의 3대 대전으로 꼽히는 ‘이릉대전’으로 치달았다. 그 결과, 전쟁에서 패한 촉은 관우와 장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영역이 익주 일부로 축소되며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 승리한 손권은 동오(東吳)를 건국하며 초대 황제에 올랐다. 그러니 제갈량으로서는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위나라라는 공동의 적에 함께 맞섰던 노숙의 죽음이 두고두고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