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대 10국 시대(서진 멸망 후 존재했던 5호 16국 시대와 이름이 비슷하지만, 시기가 완전히 다르다), 당나라 멸망 후 송나라 건국까지 약 50여 년을 말하는 이 기간에 5개 왕조가 들어서고, 황제가 열 번 바뀌었다. 그만큼 난세였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것도 있었다. 중국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임에도 재상 자리만은 한 인물이 독차지했다. 어지간한 수완을 지닌 인물이 아니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풍도(馮道). 앞서 말한 풍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는 수많은 왕조가 일어서고 망하는 난세에 무려 23년 동안 재상으로 있었다.그야말로 진정한 카지노 가입 쿠폰의 달인이었던 셈이다.
5조 8성 11군(五朝八姓十一君, ‘5개 왕조에서 8개의 성을 가진 11명의 임금을 섬겼다’라는 뜻)의 카지노 가입 쿠폰으로 출사했던 풍도는 권력의 풍향을 꿰뚫어 볼 줄 알았다. 특히 그는 입조심을 처세의 근본으로 삼았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口是禍之門)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舌是斬身刀)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閉口深藏舌)
가는 곳마다 몸이 편안하리라(安身處處宇)
― 풍도, 〈설시(舌詩)〉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 오로지 자기 능력만으로 재상에 오른 풍도는 말과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잘 알았다. 그래서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을 구분하고, 말을 할 때와 안 할 때를 알았다. 이는 그가 처음 관직 생활을 유수광(劉守光) 아래서 한 덕분이었다.
5대 10국 시대 초기 군벌로 연(燕)을 건국한 유수광은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살인을 밥 먹듯이 했으며, 부하들 역시 말 한마디 잘못하면 가차 없이 목을 베었다. 풍도 역시 그의 성미를 잘못 건드려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 옥에 갇히는 데 그쳤다. 그가 평소 보여준 인품과 청렴함에 반한 이들의 탄원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가 멀다고 잔혹하고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항상 솔선수범하며 근검한 생활을 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군영 안에 자그마한 초가집을 짓고, 침상도 없이 풀더미 위에서 잤다.
또한, ‘하늘에 순응하고, 황제가 아닌 백성에게 충성하는 것’을 삶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 때문에 힘 있는 절도사들이 수시로 황제 자리를 찬탈하는 중에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하고, 백성의 평안한 삶을 위해서 노력했다. 황제가 바뀌는 것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예컨대, 명종(明宗, 후당의 제2대 황제)의 사위 석경당(石敬塘, 후진의 초대 황제)이 거란의 도움을 받아 후진(後晉)을 건국한 후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그를 사신으로 보내려고 했을 때도 기꺼이 그 임무를 수행하며 이렇게 말했다.
폐하께서는 북쪽 왕조의 은혜를 입었으며, 신은 폐하의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이에 수많은 유학자가 그의 처신을 두고 ‘지조 없는 기회주의자’, ‘변절자’, ‘최고의 간신’이라며 손가락질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忠臣不事二君)”라는 유교적 잣대로 그를 난도질한 것이다.
중화사상에 젖은 유학자들의 눈에 풍도는 절묘한 줄타기의 달인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후대로 내려올수록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한마디로, 풍도에 대한 평가는 유교적 가치관의 쇠약과 궤를 같이하는 셈이다.
풍도는 단 한 번도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한 적이 없었을 만큼 자신에게 엄격했다. 예컨대, 그는 죽을 때 “가장 쓸모없는 땅에 매장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인정하듯, 누구보다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모범을 보였다. 직접 농사짓고, 흉년이 들면 가진 재산을 풀어 어려운 사람을 도왔으며, 전쟁터에 나가면 병사들과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나아가 정말 필요한 상황에서는 후환을 무릅쓰고서라도 간언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예컨대, 요나라 태종 밑에 있을 때는 그의 부하들이 백성을 학살하고 약탈하는 일을 그만두도록 간하여 많은 이들의 목숨을 구했는가 하면, 후주의 세종을 보좌할 때는 황제의 말을 거스르면서까지 친정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니 신하 중에는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병사와 백성은 그를 “옛사람의 풍격을 지닌 거대한 산과 같은 인물”이라며 존경하고 따랐다.
그를 중용했던 황제들 역시 이를 잘 알았다.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가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던 시절, 수많은 황제가 그를 재상으로 등용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간신이라는 말을 듣는 이유는 그의 행위가 충성과 지조를 중시하던 당대의 가치관이나 윤리관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5개 왕조마다 충성을 다짐했을 터이니, 그때마다 신의를 강조했을 그로서도 면목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출세와 보신을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가 황제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했던 일 중에는 백성의 삶에 큰 도움이 된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충성의 대상은 황제가 아닌 백성이었다.
풍도는 말년에 자신의 호를 ‘장락노(長樂老)’라고 짓고 철저히 은거의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 한 권의 책에 자신의 카지노 가입 쿠폰술과 인생관을 담았다.
아래로는 땅을 기만하지 않고, 가운데로는 사람을 기만하지 않았으며, 위로는 하늘을 기만하지 않는 삼불기(三不欺, 절대 속일 수 없는 세 가지)의 삶을 살았다. 그 결과, 하늘의 도움으로 여러 차례 곤경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도 중원 왕조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하늘의 보살핌 덕이다.
― 풍도, 《장락노자서(長樂老自敍)》 중에서
난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생존’이다. 생존해야만 어떤 이상이라도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풍도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가장 현실적인 처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 그를 ‘간신’이나 ‘변절자’라고만 할 수 없는 이유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 영합적인 그의 처세가 옳다는 것은 아니다. 지조 없이 변절을 일삼은 기회주의적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기록 너머의 진실이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재구성된 그의 삶을 두고 양극단의 평가가 오가듯, 누구도 거기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난세일수록 리더의 처신은 주목받기 마련이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삶의 기준이 되고, 평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리더의 처지에서는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건 간에 평가는 엇갈리기 마련이다. 풍도를 비롯한 난세 영웅들의 삶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