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게임 사이트 섬(島) 그림들을 기다리며
1. ‘空’
“말없이 어떤 풍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만 있어도 욕망은 입을 다물어버리게 된다. 문득 ‘공空’의 자리에 충만이 들어앉는다. 내가 지나온 삶을 돌이켜보면 그것은 다만 저 절묘한 순간들에 이르기 위한 노력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 때문이었을까?” (『섬』 장 그르니에. 김화영 옮김. 민음사. 33쪽)
‘공空’은 산스크리트어 ‘sunya’(텅 빈)라는 형용사 혹은 ‘sunyata’(공한 것)이라는 명사의 번역어카지노 게임 사이트. 영어로는 ‘Emptiness’ 정도로 표현될 수 있다. ‘공空’의 개념은 매우 특수하다. ‘공空’ 사상은 초기 불교의 ‘연기설緣起說’을 재해석함으로써 부처의 기본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했다. 따라서 ‘공空’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지탱하고 있는 핵심 기둥이라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불교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공’은 인간을 포함한 일체만물에 고정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말로써 ‘공’이라는 말은 ‘인연因緣’(=연기緣起patītyasamutpāda)과 같은 의미다. 용수보살(나가르주나)에 의하면 인연에서 비롯된 것(중인연생衆因緣生), 그 모든 것은 ‘공’하다고 했다. 따라서 인연이 곧 ‘공’하다고 이야기한다. (不知何因緣故空) 『중론』 용수, 중론관인연품제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다른 사물들과 서로 얽혀 있는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사라지는 존재이므로, 그 모양이나 형태, 또는 그 성질이 전혀 변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카지노 게임 사이트.
모든 사물들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어서 그 스스로의 자아가 없기 때문에 그것이 ‘무아無我’다. 자아自我가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곧 ‘공空’이라고 한다. 이 말을 불교에서는 ‘자성自性’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즉 실체가 자성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래서 실체가 없다는 말을 ‘무자성無自性’이라 한다. 인연(연기)의 핵심이 바로 무자성이라는 이야기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 무자성이 바로 공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지만 불교의 공은 이와 같은 인간의 언어논리와 그 판별에 따르는 진실성 그 너머에 있다.
‘장 그르니에’의 공은 불교의 공은 분명 아니다. 추측해 본다면 아마도 무無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 무와 공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 무는 공으로 나아가기 이전의 상태다. 이를테면 무는 사물의 존재가 있었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린 상황을 나타낸 글자다. 無를 파자破字 해보면 대大 + 林(수풀이 우거진 모양) +화火인데 숲에 큰 불이 나서 나무들이 모조리 타 없어진 상황을 뜻한다. 즉 존재의 가정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 無다. 그런가 하면 ‘공’은 이러한 무의 상황이 유지되어 모든 존재의 카지노 게임 사이트자조차 사라진 텅 빈 상황을 말한다. 존재했었는지 혹은 존재할 것인지조차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비어있음이 공이다.
그르니에의 공은 무이고 그 무라고 인식되는 공간에는 뭐든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막 깨끗하게 비워져서 뭐든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르니에의 ‘절묘한 순간’도, ‘내가 그렇게 하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은 저 투명한 하늘의 기억’도 거기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2. 島
육지와 한 몸이었던 땅 덩어리가 자연 현상인 바닷물(강물도 포함)에 의해 멀리 떨어져 버리는 상황에서 이전의 땅 덩어리와는 전혀 다른,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독립 공간이 섬카지노 게임 사이트. 인간 족속들은 늘 새로운 것과 분리된 것에 기이할 정도로 크게 반응한다. 인류 역사가 그렇게 해서 형성되었고 또 유지될 것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여 섬은 수평선水平線이 만든 허상카지노 게임 사이트. 그저 물 위에 솟은 작은 ‘육괴陸塊’ 일뿐카지노 게임 사이트. 심지어 영어 ‘Island(섬)’의 어원은 ‘thing on the water’(물 위에 있는 것)카지노 게임 사이트. 하지만 인간들의 상상력으로 섬이라 불리는 순간, 섬은 처음 그 이름을 지어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상상을 인간에게 안겨 주었다.
한자 島 역시 새 鳥와 뫼 山이 합쳐진 형성 글자이니 섬은 처음부터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존재임에 틀림없다. 그 섬이 엄경근의 마음에 들어온 것이다. 그가 천착했던 달동네와 섬은 사실 한 몸, 다른 모양이다. 역시 그가 즐겨 묘사하는 달도 마찬가지다. 달동네, 달, 섬은 엄경근이 살아왔던 시간과 살아갈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비밀의 정원인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달동네에서 실제로 자란 엄경근은 엄습하고 퀴퀴한 자신의 달동네를 상상으로 끌어올려 환상과 꿈, 그리고 쓸쓸함과 낭만이 존재하는 곳으로 만들었고, 달동네에 떠 오른 달도 자신의 마음에 품어 따뜻하고 행복한, 한편으로 오래 꿈꾸는 달로 변화시켰다. 엄경근은 어떤 달에는 집도 여러 채 지어도 보고, 또 어떤 달에는 꿈만 가득하게 담아 보고, 가끔은 달을 당겨 슬픈 인어(루살카) 옆에 놓기도 하였다.
그런 엄경근이 이제 섬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이미 오래전부터 섬은 그의 마음속에 있었을 것이다. 그가 바닷가에서 살아온 날들이 얼마인가! 이미 몇 편의 작품에서 섬에 대한 그의 시선을 느꼈다. 그가 그리는 여러 섬들과 그 섬마다 있을 이야기를 천천히 기다린다.